건설산업 중흥의 조건

우리나라 제1의 건설회사인 현대건설이 유동성위기에 처하고 리비아 대수로(GMR) 공사를 수행해 온 동아건설이 사실상 파산하는 등 우리나라의 건설업계가 일대 위기를 맞고 있다. 주택, 공장, 산업기반시설의 건설을 담당하는 건설산업은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중하기도 하려니와, 오일 쇼크 직후의 외환위기 때에는 건설수출을 통한 외화가득에도 크게 공헌한 바 있다. 만일 건설업계가 작금의 위기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현재 진행 중인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차질이 생기고, 지속적인 경제발전도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케인즈 경제학에서는 건설업의 이러한 특징에 착안하여 공공사업을 확대함으로써 건설업을 매개로 한 경기부양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계 역사상으로 공공시설의 건설은 국민의 후생복지 증진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까지 많은 교훈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 로마 제국의 공공건설 사례이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소개(시오노 나나미 지음, [로마인 이야기] 제9권)된 賢帝시대의 막을 연 트라야누스 황제(Marcus Ulpius Traianus, 재위 AD 98∼117년)의 치적을 살펴보자.

SOC 정비의 이점

로마의 역대 황제들은 국가의 안전보장[外政]과 안정된 속주통치[內治], 사회간접자본(SOC)의 정비에 역점을 두었다. 제국 전역의 SOC 정비에 드는 비용은 원로원의 의결을 거쳐야 하는 국고(아이라리움)로 충당하지 않고 황제의 금고(피스쿠스)로 지출했다. 말하자면 로마 황제는 건설부장관도 겸직하고 있었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는 로마 제국 방위선 바깥에 사는 사람들―로마인들이 '야만족'(바르바리)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의 습격으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었다. 로마 제국은 다민족 국가였기에 사이가 나쁜 이웃 부족끼리 어울려 살 수 있도록,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분쟁을 조정하고 수습하여야 했다. 예컨대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도 1년에 한 번 열리는 갈리아 부족장 회의를 없애지 않았다. 그리고 부족회의의 의장, 즉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은 로마인이 맡아 더 이상 부족간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하였다.

당시 로마 제국이 속주는 물론 국경선 바깥까지 차별하지 않고 도로망 확충과 도시 건설에 힘썼던 것은 로마인들이 휴머니즘이 넘쳐서가 아니었다. 인간은 굶주리지 않으면 온건해지게 마련이므로 속주민, 야만족을 막론하고 로마 제국의 울타리 속에서 번영을 누리도록 했던 것이다. 또한 로마의 세제는 소득에 비례하므로 경제가 활성화되면 속주세도 관세도 매상세도 저절로 많이 걷히고 황제의 금고도 다시 채워지게 되어 있었다.

경제의 활성화, 즉 자유로운 경제활동은 일반 서민이나 장사꾼에게나 어느 곳이든 돈벌이가 될만한 곳을 찾아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역대 황제들의 노력 덕분에 로마 제정 때에는 안전하고 자유로운 여행을 할 수 있었는데 왜 그 후에는 천오백년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던가? 오늘날 유럽연합(EU)은 로마시대의 이상향을 꿈꾸던 사람들이 마침내 1957년 [로마 조약]을 체결하고 정치적·경제적 공동체를 통해 '재화와 자본, 노동력의 자유이동(free movement)'이라는 로마 제정 당시의 상황을 실현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보면 로마 제국의 한쪽 끝인 스코틀랜드에서 성지순례에 나선 사람이 다른 한쪽 끝인 예루살렘까지 로마 가도를 이용하여 지름길을 택해 가는 여정이 소개되어 있다. 총 4,071로마 마일(1로마 마일은 1.478킬로미터), 즉 6천여 킬로미터를 로마의 이정표를 보면서 여권을 제시할 필요도 없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SOC 건설의 財源

그렇다면 로마 제국의 황금기였던 오현제시대의 막을 연 트라야누스가 두 차례에 걸친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끌고도 로마 제국 전역에서 벌였던 엄청난 규모의 공공사업의 재원을 무엇으로 충당했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트라야누스가 정복한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 지방의 매장량이 풍부한 금광과 은광, 그리고 다키아 왕으로부터 노획한 엄청난 보물이 그 원천이었다. 무엇보다도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로마식 조형미를 유감없이 발휘한 그리스 출신 아폴로도로스를 비롯한 건축가와 엔지니어를 군대에서 차출할 수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 결과 서기 107년부터 112년에 걸쳐(이것은 당시의 건조물에 사용된 벽돌의 제조연도를 보고 확인할 수 있음)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제국 전역에 걸친 공공사업 러시가 일어났던 것이다. 다키아 전쟁 중 도나우 강에 건설한 '트라야누스 다리'는 뛰어난 기술, 웅장함에 대한 취향, 실용성에 대한 집착의 결정체였는데 이것이 제국 전역에서 실시되었던 것이다. 트라야누스 목욕탕, 트라야누스 포룸, 오스티아 항만, 아피아 가도의 복선화 등 트라야누스 황제와 건설감독 아폴로도로스가 로마와 이탈리아에 세운 공공시설물은 제국의 모든 도시에 본보기가 되었다. 그리고 황제의 영향으로 小플리니우스가 고향인 코모시에 신전과 도서관을 기증하는 등 지방의 유력자들이 사재를 털어 공공시설을 만들어 기증하는 것(noblesse oblige)도 붐을 이루었다.

건설산업 중흥의 조건

이러한 조건은 지금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나라의 건설산업이 중흥을 이룩하려면 건설산업의 중요성(그 목적이 경제적이든 군사적이든)을 투철하게 인식하는 지도자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건설역군(사명감 넘치는 엔지니어와 전문기업들), 그리고 풍부하게 조달되는 건설재원 등 3요소가 갖춰져야 한다. 건설재원은 천구백년 전의 트라야누스가 간파했던 것처럼 국민대표의 통제를 받는 국가예산보다는 사업성에 주목하는 민간자본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로마 시대의 아피아 가도는 오늘날에는 초고속 통신망이 될 수도 있고 국민들이 공유하는 데이터베이스가 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사통팔달한 도로와 공공시설이 확충되었을 때 이를 이용한 경제활동도 왕성해지고 그 과실을 국민 전체가 향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