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달의 관심사

신년 벽두 우리나라에서 대서특필된 것은 대통령과 전 검찰총수의 친인척 비리에 대한 특별검사의 수사 속보였다. 일부 신문에서 신년특집으로 국가적 어젠다를 다룬 기획기사도 눈에 띄었으나, 대체로 역대 정권의 말기에 으레 터져나오던 이런 스캔들 기사 말고는 우리나라의 정치적 후진성을 보여주는 비리 사건의 재발 방지책 논의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필자가 출장차 다녀온 뉴욕의 언론은 2월 1일부터 열린 세계경제 포럼(WEF)도 있었지만 대형사건의 재발방지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예컨대 매출액 기준으로 미국 7위의 대기업이었던 엔론이 너무나 쉽게 무너져버린 것에 대한 안팎의 반성이나 붕괴된 세계무역센터 빌딩에서 재난구조대책이 제대로 서 있었나 하는 당국의 자책 섞인 보고서가 주목을 끌었다.

엔론은 왜 그리 쉽게 무너졌나

'미국 주식회사'(Corporate America)의 상징이자 신경제(New Economy)의 성공사례로 꼽히던 엔론사가 갑자기 파산지경에 이른 것은 불가사의한 일 중의 하나였다. 석유와 가스, 우주산업으로 대표되는 휴스턴 경제를 떠받쳐온 대기업이 어떻게 많은 직원들(특히 401(k) 퇴직준비금을 전액 엔론 주식에 투자한 직원들)을 빈털터리로 만든 채 파산보호신청(우리나라의 회사정리절차 개시신청에 해당)을 할 수 있나 고개를 흔들었다. 정부(SEC)에서 엔론의 분식회계에 관한 조사에 착수하고 의회에서도 불투명한 기업회계처리에 관하여 청문회를 열었지만 문제의 화근은 공룡 기업의 경영 스타일에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USA 투데이가 엔론 스캔들의 내막을 파헤친 바(1월 28일자 3B면)에 따르면 이러한 결말은 3인의 수뇌진에 의하여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한다. 우선 엔론의 설립자인 케네스 레이 회장은 항상 온화한 미소와 친근하고 겸손한 제스처로 많은 직원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엔론의 파국을 몰고온 장본인으로 지목되었다. 연방정부 에너지규제감독관 출신인 그는 1985년 설립 이래 작은 가스관 회사를 일련의 기업합병과 신규 투자를 통해 다국적 에너지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여기에는 레이 회장이 관료사회에서 터득한 처세술과 정치인들의 지원을 받아 규제완화를 실현시킨 그의 로비력이 한 몫을 했다.

그러나 그의 꿈을 구체적으로 현실화한 이는 매킨지 컨설턴트 출신인 최고경영자(CEO) 제프리 스킬링이었다. 그는 1987년 갓 출범한 엔론이 경영위기에 처했을 때 회사를 가스공급회사(gas supplier)로 두지 말고 가스거래 중개회사(gas trading company)로 개편해야 한다고 자문했다.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엔론은 가스거래 계약을 팔고 사면서 공급자와 소비자를 연결시켜 주고 새로운 시장을 조성하는 일에 치중하였다. 1980년대 탈규제(deregulation)의 환경 속에서 가스중개 사업은 많은 이윤을 남겼고, 엔론은 급증하는 수익을 바탕으로 신규 사업에 진출하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다시 새로운 규제완화 조치가 필요했다. 스킬링은 1990년 엔론에 합류한 후 컨설턴트의 시각으로 경영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함으로써 레이 회장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고 1996년에는 사장(COO)에 취임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레이 회장과 스킬링 사장의 꿈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준 사람은 시카고 컨티넨털 은행 출신의 금융전문가 앤드류 파스토였다. 그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특수목적기구(SPV)를 여러 개 만들어 엔론의 부채를 옮겨놓는 수법으로 엔론의 재무상태를 건전하게 보이게 하고 공격적인 차입을 통해 사업확장에 나설 수 있도록 했다. 파스토는 1998년에는 마침내 최고재무관리자(CFO)로 승진하였는데, 그 자신이 SPV의 임원이 되어 두둑한 보수를 챙기는 한편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엔론의 주가를 띠워올렸다.

이러한 탐심의 결말은 언론에 보도된 그대로이다. 엔론이 국내외에서 벌여놓은 신규 사업들이 기대와는 달리 수익을 내지 못하고 돈만 삼키자 시장에서는 엔론의 장래를 비관적으로 보고 주가가 폭락하는 바람에 지난 수년간의 분식회계가 탄로났던 것이다. 앞으로 미 정부와 의회는 에너지산업에 대한 규제완화조치를 점검하는 한편 분식회계 방지를 위한 획기적인 대책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재난구조대책은 제대로 돼 있었나

뉴욕시 소방당국(NYFD)은 9·11 사건현장(Ground Zero)에서 구조작업을 펼쳤던 소방관을 500명 가까이 면담했다. 그리고 외부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쳐 획기적인 개선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사건이라 해도 현장 지휘체계가 무너지는 바람에 수많은 구조요원들이 우왕좌왕해야 했고, 무엇보다도 343명이나 되는 소방관이 하루 동안에 목숨을 잃은 사실이 당국으로서는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뉴욕타임스에서 일부 발췌하여 보도(1월 31일자 B1면)한 면담보고서에는 적나라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1차 여객기 충돌 직후 현장에 달려간 소방지휘관들은 금새 빌딩이 무너지는 바람에 희생이 컸다고 한다. 그러니 남은 사람들로서는 누구한테 연락할 수단도 마땅치 않았고, 무너져내린 건물 잔해 속에 갇혀 현장에 지휘소를 차릴 여유가 없었다. 뒤늦게 도착한 소방관들은 너무나 참담한 현장 상황에 망연자실해 있다가 닥치는 대로 잔해를 치워야 했다. 그러다 보니 생존자를 구조하기보다는 사체를 처리하기에 바빴다. 개중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행동하는 이도 있었지만 합리적인 지휘계통을 따르지 않고 대부분 자신의 본능적인 판단에 의존하였다. 심지어는 장비도 부족해 인근 건설현장에서 삽과 곡괭이를 빌려다 썼고, 소화전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아 허드슨 강에서 소방정을 동원해 물을 퍼올렸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두 건물의 붕괴 사이에 약 29분 정도의 시간 여유가 있었음에도 현장에 투입된 소방관들이 미쳐 피신하지 못하고 건물더미에 갇혀 희생 당한 점을 중점적으로 파헤쳤다. 당시의 상황은 동서남북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아수라장이었다. 어느 인터뷰 내용 중에는 믿어지지 않는 진술도 있었다. 현장에서 정신없이 구조활동에 매달리다 보니 흙먼지와 연기가 걷힌 후, 즉 네 다섯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쌍둥이 빌딩이 모두 붕괴된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뉴욕시 소방본부에서는 이러한 면담 내용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기는 데 그치지 않고 일반에 공개하여 쇄신방안을 마련하는 데 사용하기로 했다. 잘잘못을 가리고 책임을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희생자 유가족들이 현장 상황을 올바로 이해하고 도저히 요행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웠음을 깨닫게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사건이 재발하는 것을 막는 일일 것이다.

진정한 선진국이 되는 길

우리나라가 명실공히 선진국이 되려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터졌을 때 책임의 소재를 가리는 것 이상으로 비슷한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개선책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자기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의 책임을 따지는 일에 매달리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사회가 한 단계 진보하려면 시스템을 움직이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먼저 바꿔야 한다. 과거의 산업혁명이 그러했고 지금 진행 중인 정보혁명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에서 엔론 스캔들과 9·11 재난구조대책을 둘러싼 제도개선방안이 보도되는 것을 지켜보노라면 우리나라에서 끊이질 않는 대형 화재·교통사고, 부실기업정리, 공적자금 유용 등의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매번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리고 기초를 다져놓지도 않고 도약을 꾀하는 것, 법의 테두리 안일 망정 상식을 벗어난 재테크를 구사하는 것, 방향감각 없이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은 무위(無爲)로 그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는 물론 주변에도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