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장의 유연성

서울 여의도 공원은 바로 인근에 국회와 주요 정당의 당사가 자리잡고 있어 '집회와 시위의 광장'이라 할 만하다. 옛날의 드넓던 5·16 광장이 지금은 대부분 나무와 잔디가 심어진 동산으로 탈바꿈하였고 그 몇 분의 1로 축소된 중앙의 문화광장이 종종 집회와 농성을 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한다.

금년 들어 이곳에서 수많은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서도 삼미특수강 창원공장 해고근로자들의 경우는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법적으로는 분명히 그들이 이겼으나 IMF 관리체제하에서, 아니 21세기로 옮겨가는 노동시장에서는 법조문이나 법원의 판결도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삼미특수강 케이스는 워낙 특수한 경우이므로 어떻게 최종 결말이 날 것인지 두고 봐야 할 터이지만 우리 노동시장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법과 경제 현실의 괴리

지난 9월 11일은 삼미특수강 창원공장 근로자들이 고용승계 투쟁을 벌인지 1천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날도 어김없이 해고근로자들이 여의도에 집결하였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법대로 시행해줄 것을 소리높여 요구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1996년 12월 삼미특수강이 포항제철에 매각될 때 관할 세무서에서는 이를 법인세법상의 '사업양수도'로 파악하였다. 이는 상법상의 영업양도에 해당하여 당연히 고용승계를 포함하며, 이러한 법률판단은 1998년 5월 감사원에서도 그대로 인정되었다.

이 해 7월에는 포항제철 측이 불참한 가운데 양대 노총과 노사정위원회가 포항제철의 삼미특수강 근로자 고용승계를 보장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요컨대 "삼미특수강의 해당 근로자들을 포철 계열사에 취업시키고 관련 재판이 끝난 후 결과에 관계없이 본인이 원하면 창원특수강에 재취업시킨다"는 취지였다. 그동안 서울에 올라와 노숙 투쟁을 하던 근로자들은 용기백배하여 법적 투쟁을 강화하였다. 1999년 1월 서울고등법원에서도 고용승계가 당연하다는 판결이 나왔으나 포철 측에서는 이에 불복, 대법원에 상고하였다.

당사자인 포철과 사용자단체인 경영자총연맹은 이와 같이 법적으로 고용승계를 강요하는 것은 기업의 자율성을 무시한 처사일 뿐만 아니라 기업구조조정을 가로막는 나쁜 선례라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더욱이 우리 정부는 외환위기에 처하여 IMF 측과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대와 기업의 인수합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해고제한을 완화하며, 그 충격을 줄이기 위해 고용보험제도를 확충하고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촉진한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그렇다면 우리 정부가 추구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뭐길래 해고근로자의 법적인 권리보다 우선하는가. 법을 능가하는 초법률적 가치라도 포함하고 있다는 말인가.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란 외부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인적 자원이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재배분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업무가 등장하였을 때 그에 적합한 지식이나 기능을 가진 사람을 쉽게 구할 수 있고(기능적 유연성), 필요한 사람 수 또는 시간만큼 인원을 투입하거나(수량적 유연성), 다양한 임금체계에 맞춰 사람을 쓸 수 있어야 한다(임금적 유연성)는 뜻이다. 이를테면 요즘 인터넷 관련산업이 크게 발전하고 있으므로 인터넷에 정통한 인력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실력을 갖춘 사람도 관련 직종에 곧바로 취업할 수 있어야 인터넷 관련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1970년대 이후 두 차례의 오일 쇼크를 겪으면서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크게 문제되었다. 경기가 점차 회복되고 있음에도 고실업 구조가 장기화되는 조짐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 이유는 강력한 노동조합이 존재하고 정부의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가 클 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이 칸막이가 되어 있는 데 기인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에 따라 선진국에서는 나라마다 방법은 조금씩 달랐지만 다각적으로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타개하려는 노력이 행하여졌다.

우리 나라에서는 IMF 위기를 맞아 비로소 노동시장의 유연화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한 셈이다. 구직난이 심화됨에 따라 임시직 또는 계약직 채용, 파트타임 근로자 고용, 근로자 파견제 등이 확대되었다. 이와 함께 외자유입의 확대, 인터넷 사용의 폭발적인 증가로 기업경영의 국제화·정보화가 촉진되면서 세계화·정보화의 추세에 걸맞지 않은 인적 자원은 설땅을 잃게 되었다. 이것 외에도 우리 나라의 경우 대기업과 중소기업, 공기업으로 나뉘어져 상호간에 인적 교류가 거의 없는 노동시장의 분단화 구조에서 경직화의 원인을 찾는 학자들도 많다(김장호, [한국노동경제론] 1999, 170면).

코스닥 기업의 과열 원인

이러한 분석의 틀을 삼미특수강 케이스에 적용해 본다면 해고근로자들은 재벌 기업에서 일을 하다가 그보다 근로조건이 열악한 중소기업체에서 일하기를 포기하고 법적 투쟁에 나선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기업체에서는 새로운 지식과 기술로 무장된 근로자를 필요로 하며, 첨단장비의 도입으로 단순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나라의 노동관계법은 세계화·정보화 이전의 산업화 사회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법논리로 규정되어 있어 현실과의 갭이 크게 벌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구체적으로 타당성이 있는 해결방법은 무엇인가. 해고권리자들은 법률로 보장된 권리를 갖고 있으므로 이들에게 맞는 일자리를 제공할 수 없다면 사용자 측은 금전적 보상이라도 해주어야 한다. 그 대신 근로자들도 자신의 능력과 입장을 속히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이것은 오지도 않는 손님을 맞기 위해 상을 차려놓고 마냥 기다리는 어리석은 주인과 같다. 이럴 때에는 재빨리 다른 손님을 불러들이거나 아니면 상을 치우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21세기에는 우리 나라도 지식기반 경제로 발전하게 될 터이므로 어느 때보다도 기능적 유연성이 크게 요청된다. 당장 자신의 값어치를 낮추더라도 장래 발전가능성이 있는 중소기업체에 들어가 대기업 부문과 네트워크를 구축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요즘 코스닥 벤처기업들의 주가가 과열 양상을 빚고 있는 것도 이들의 현재가치가 높다는 게 아니라 지식기반 경제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기 때문인 것이다.
(기업평가 2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