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참사 이후의 패러다임 쉬프트

지금까지 한 번도 전화(戰禍)를 입지 않았고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미국의 심장부에 동시 다발로 엄청난 테러가 가해졌다. 지난 9월 11일 뉴욕 맨하탄 다운타운의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이 테러범이 장악한 민간여객기가 돌진하는 바람에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고, 워싱턴 DC의 국방부 건물(펜타곤)에도 피랍 여객기가 추락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TV 실황 뉴스를 보면서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공상과학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닌가 하고 눈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WTC 빌딩에서 화염과 연기가 치솟고 110층 건물이 무너져내리는 장면을 보면서 테러범들의 소행은 '천인공노(天人共怒)'나 '극악무도(極惡無道)'란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살상을 당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세계 무적의 강대국 미국이 세계 평화(Pax Americana)를 이루었다고 자만하는 사이에 본토(homeland)의 심장부에서 진주만 공격 이후 가장 처참한 피해를 입고 만 것이다.

부시 미 대통령은 전쟁상태를 선포하고 테러범들의 배후가 밝혀지는 대로 즉각 응징에 나설 것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21세기 최초의 전쟁이 막 벌어지려는 즈음 미국은 조야(朝野)를 막론하고 종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세계정세를 다룰 수 없음을 깨달았을 것으로 보인다. 미증유의 테러 참사를 계기로 앞으로는 패러다임이 어떻게 달라지게 될지 우리가 사는 한반도와 결부시켜 생각해 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 같다.

미국인들이 깨닫게 된 것

미국 정부는 물론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미국식 사고나 행동양식이 국제적으로 심한 반발에 부딪힐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테러범이 민간여객기를 납치하는 장면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곧잘 다루어졌지만, 자살 특공대가 민간여객기를 몰고 공격목표로 돌진하는 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미국인들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수천∼수만명이 되고 미국을 공격하기 위해 맹훈련을 쌓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미국에서도 훈련을 받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 참사를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 또한 인구상으로 적지 않은 게 현실인 것이다.

중동 사태에서 미국이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석유이권을 지키는 것을 제1의 국가목표로 삼은 것이나, 세계화 시대에 주권국가들에 대하여 통상 문제를 둘러싸고 이중잣대(double standard)를 들이댄 것도 반미(反美)감정과 반미 테러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 정부 지도자들이 복수심에 불타는 국민여론을 의식한 나머지 너무 강경일변도로 흘러 미국이 장기간 전쟁상태에 빠져들 경우에는 세계경제에 회복불능의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테러범들의 배후조종자로 믿어지는 빈 라덴을 응징하려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야 하는데, 구(舊)소련 역시 아프간 함정에 빠져 허덕이다가 결국 蘇연방의 해체로 이어졌음을 미국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은 그들과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한반도 이북과 여타 지역에도 많이 있음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중동에서 작전을 전개하려면 여타 지역에서는 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다른 나라의 지원을 얻고, 무엇보다도 유엔의 깃발 아래 세(勢)를 규합하려면 유럽 국가 말고도 러시아, 중국의 협조가 절대 필요하다는 점에서 미국의 외교정책은 다소 신축성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월스트리트 영향력의 퇴조

이번 뉴욕에 대한 테러 공격은 바로 월스트리트(downtown)의 상징적인 초고층 빌딩을 파괴시켰다는 점에서 막대한 인명의 손실, 건물 손괴와 같은 유형의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월스트리트'로 대표되는 미국식 글로벌 스탠다드도 상당기간 퇴조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나아가 이미 중국계 화인자본(華人資本)에 추월 당하기 시작한 유태계 자본은 이번 사건으로 금융전문가 및 시스템, 거래량 면에서 당분간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는 IMF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동안 미국식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르는 것이 전부인줄 알았지만, 앞으로는 국제금융시장의 다원화된 자금원천에 눈을 돌리고 이들과 적극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은 남북경협의 확대, 통일에 대비하면서 한반도 이북지역에 외국자본을 유치하고자 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세 번째로는 앞으로 위기관리, 위험관리가 국가나 기업을 막론하고 살아남기(survival) 위한 절대기준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바꿔 말해서 누구나 위기관리·위험관리를 잘못하면 더 이상 생존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미국이 국가적인 재난을 당하고서도 조기에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도 위기관리와 재난복구 시스템이 거의 완벽하게 가동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만일 우리나라 같았으면 곳곳에서 전산망의 마비, 통신두절이 일어나 국가기능이 마비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예측불가능한 호전적인 집단과 이웃하여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위기관리·위험관리 시스템을 재점검하고 미비한 점은 하루 속히 보완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에 대한 교훈

미국이 국가적 자존심을 산산히 부숴뜨린 테러집단에 대한 보복을 위해 전쟁도 불사한다고 선언한 마당에 당장 평화적인 해결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21세기 벽두에 벌어진 이번 테러 참사를 계기로 국제적 다원성(international diversity)에 대한 새로운 이해, 월스트리트 영향력의 퇴조, 위기관리·위험관리의 일상화는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미국뿐만 아니라 중동지역도 주요 수출시장으로 삼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쌓여갈 때 우리나라는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중계무역기지와 물류기지를 건설하고, 나아가 통일이 되었을 때 반세기 이상의 단절을 뛰어넘는 민족적 대화합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