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년에 받은 은혜

교수는 6년간 강단에 서면 7년이 되는 해에 안식년(Sabbatical)을 얻을 수 있다(3년 강의 후에 6개월만 쓸 수도 있음).
우리 학교에서는 안식만 하지 말고 연구를 더 하라 해서 "연구년"이라 부르지만, 외국에 나가서 연구를 하든, 다른 학교에 가서 강의를 하든, 아니면 말 그대로 심신의 재충전을 꾀하든, 각자의 필요와 형편에 따라 연구년을 보낼 수 있다.

필자의 경우 미국 UCLA에서 1년을 보내면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 동안 책으로만 대했던 강준민 목사님의 동양선교교회에서 주일마다 이른바 "저자 직강"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어했던 둘째를 데리고 온 것이나, 와이프 없이 아들과 먹고 살기 위해 평생 해보지 않던 요리를 시작한 것도, 또 창조과학의 섭리를 새삼 깨닫게 된 것도 연구년에 받은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

누가복음 15장에서는 먼저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예수를 비방하는 장면이 나오고, 예수님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 목자", "한 드라크마를 찾아 온 집안을 뒤지는 여자" 예화를 드신 다음 모범적인 큰아들과 방탕한 작은아들을 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하신다.

렘브란트의 명화 [돌아온 탕자] 사춘기 시절에 이른바 '범생이'과에 속하였던 나는 이 성경구절이 몹시 싫었다. 집에서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열심히 일하던 큰아들이 꾸지람을 듣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떼를 써서 부모님 돈으로 한 밑천 챙겨 갖고 나간 아들이 거지꼴이 되어 돌아왔는데 극진한 환대를 받는 모습은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되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난해하여 내 딴에는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이 아벨을 질투하고 동생을 죽이는 비극"(창세기 4:8)을 피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 구절을 이해하려 한 적도 있었다.

그 후 여러 목사님들 설교를 듣고 나서야 하나님은 이야기 속의 아버지처럼 아무 말씀없이 재산을 미리 나눠주시고 집 나간 아들을 마냥 기다려주시며, 아들이 돌아오면 한없이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큰아들이 알고 있는 아버지는 매우 엄하신 분이었지만 작은아들이 생각하는 아버지는 무슨 잘못을 해도 용서해주는 자애로우신 분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누가복음의 이 구절은 결혼을 하고 두 아들을 키우면서 읽을 때에는 느낌이 크게 달라졌다.
큰아들과 작은아들을 합쳐서 나누면 이상적인 아들(ideal type)이 되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큰아들은 원칙과 규율에 얽매어 답답한 느낌을 주는 반면 둘째 아들은 자유분방한 것은 좋지만 마냥 저 하고 싶은 대로 놔두면 곤란하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성해 가는 두 아들을 보면서 이 성경구절을 대할 때에는 생각이 계속 바뀌고 있다.
어느 아들이 요구한다고 "선뜻 나눠줄 재산이나 있나" 하는 걱정이 앞서는 까닭이다. 몇 해 전 둘째가 대학입시를 한 해 앞두고 "저도 친구들처럼 조기유학을 보내주세요" 하였을 때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때 타협안이 "대학에 들어가면 어학연수를 보내주겠다"는 것이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금 연구년을 맞아 둘째만 데리고 UCLA에 와 있는 것이다.

나아가 두 형제가 계속 의가 좋아야 할 텐데 하는 걱정까지 미리 하고 있다. 형제간에 사이가 좋았더라면 누가복음 15장도 달리 각색될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해본다. 외국에 먼저 나간 동생이 형에게 놀러오라고 초청할 수 있고, 만일 동생이 실패하였더라도 형이 "걱정 마라. 내가 아버지께 잘 말씀드릴 터이니 타국에서 고생하지 말고 빨리 집에 오라"고 하였을 것 아닌가.

차든지 뜨겁든지

요한계시록 제3장을 보면 하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셨다. 평소에도 미지근한 물로 샤워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우나 탕에서도 열탕이나 냉탕에 들어가기를 꺼려한 나로서는 이 구절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딸도 아닌 아들을 데리고 미국에서 1년을 보내야 하는 처지에 날마다 인스턴트 식품을 해먹거나, 외식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울에서는 주방에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1주일마다 장을 보고 날마다 식단을 짜서 음식을 해먹지 않을 수 없었다. 요리책과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구해 놓고 다채로운 음식들로 번갈아 식탁을 차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혀 뜻밖의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밥을 짓거나 국을 끓일 때 내용물의 온도가 100℃가 되지 않으면 음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이하는 식품영양학과는 무관한 체험에서 우러난 것임을 양해하시기 바람).

레인지 위에 국냄비를 올려놓고 관찰해 보면 조용하던 내용물이 처음에는 밑바닥에서 공기방울이 한두 개 뽀글뽀글 올라오다가 가장자리부터 공기방울이 잇달아 올라오고 조금 지나면 전체적으로 물이 솟구치면서 대류작용이 활발히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비등점에서 모든 재료가 뒤섞이고 화학적 반응을 일으킬 때 비로소 재료들이 화합한 제 맛이 나게 되는 것이다. 스프를 만들 때에도 전체적으로 양이 부풀어올라야 제 맛이 나기 시작하고, 두부나 생선어묵을 끓일 때에는 내용물이 둥둥 떠오르지 않으면 맛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곰국이나 된장찌개의 경우에는 100℃가 오래 지속되도록 불을 줄여야 하고, 밥 같은 경우에는 충분히 뜸들일 시간을 주어야 한다.
또 식어버린 국을 제 맛이 나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 팔팔 끓여야 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야 불순물도 제거하고 소독을 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파묵칼레의 온천수. 20리 밖의 라오디게아까지 갈 때는 식어버린다. 이러한 현상을 매일 같이 경험하면서 내 자신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복음을 이해한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최고점까지 뜨거워짐으로써 영과 육이 질적으로 변화(quantum leap)된 모습임을 알게 된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처럼 차갑지 않을 바에는 뜨거워져서 자신의 모든 것을 녹여내고 새로운 사람으로 중생(reborn)하고 죄를 짓더라도 바로 회개하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라오디게아(Laodicea)는 소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2세에 의하여 그의 왕비 이름을 따서 건설된 상업 도시이다. BC133년에 로마의 속주가 되었는데 바울과 요한 사도의 활동 당시에 교회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파묵칼레(터키어로 "하얀 솜의 성"이란 뜻)로 유명한 히에라볼리에서 용출한 뜨거운 온천수가 9km 떨어진 라오디게아까지 흘러오면서 물이 식는 바람에 성경에 그렇게 묘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앙의 차원 문제

기온이 영하권으로 내려간다는 일기예보에 바깥에 내놓았던 서울 집의 화분을 집안에 들여 놓도록 했다. 그런데 화분 속에 둥지를 틀었던 개미들까지 집안에 따라 들어왔다고 한다. 프랑스의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은 작가는 개미가 지능이 있는 곤충이라고 하지만, 개미로서는 기온이 떨어지면 그들의 아지트인 화분이 집안으로 옮겨질 것이라는 것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TV에서 보았던 코넬대 천문학과 칼 세이건 교수의 다큐 시리즈 [코스모스]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가 차원(dimension)의 문제를 흥미롭게 설명해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세이건 교수는 평면에서만 움직이는 2차원적(2D)인 존재를 상정하고 3차원(3D)의 존재가 그의 노는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만일 3차원의 존재가 핀셋으로 2차원의 존재를 집어 올린다면 2차원의 사회에서는 그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고 한 바탕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UCLA 치과대학 배응권 교수 UCLA 치과대학에서 생물학을 가르치시는 배응권 교수는 창조과학론 특강시간에 우주는 무려 11차원까지 존재한다고 설명하였다. 우리는 입체 공간에 시간까지 더하여 4차원(4D)까지 인식하고 있지만, 우리가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초월적(11D)인 존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이 자유의지대로 고집을 부려 잘못된 길로 나가거나, 초월적 존재까지 부인하려 들 때 그분은 얼마나 외롭고 답답하고 화가 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저차원의 인간들이 새로운 지식과 도구를 갖게 되었다고 그것(예컨대 핵무기)을 이용하여 엉뚱하고 위험한 짓을 하려 든다면 당장 뜯어말리고 싶어질 것이다. 더욱이 고차원적 존재의 영역을 침범하려드는 것(예컨대 빗나간 생명과학)은 도저히 좌시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런 입장에 있다면 여러 번 '판갈이'(reset)를 하여 새로 시작하고 싶어질 텐데 하나님은 참을성 있게 지켜보고 계실 뿐이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이래 인류가 허다한 죄를 지었음에도 노아 시절에 대홍수로 심판하신 것 외에는 그냥 두고 보시는 것 같다.

이러한 '차원의 문제'로 성경을 읽어보니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던 창세기 제1장이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창조과학론자들이 설명하듯이 창조의 그 순간을 "빛이 있으라"는 말(logos)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있을까. 창조주의 시간 개념을 어떻게 인간이 만든 시계로 측정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그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우리 인간이 도저히 유인원에서 진화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임마누엘 하나님, 동정녀 잉태, 예수 부활을 우리의 한정된 과학지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초월적 존재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우리가 잘났다고 교만해서는 아니되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베르베르가 소설 속에서 묘사한 것처럼 개미와 화분 주인과의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고 개미가 충분히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면 주인은 화분을 떠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소통'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주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해충구제업자(terminator)를 불러 그들을 '소탕'하는 것뿐이었다. 믿음(faith)이 없는 사람들의 운명(fate)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