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짓 존스의 일기

우리나라가 IMF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직장인이 이른바 '구조조정'을 당했다. 다니던 회사가, 은행이 다운사이징 위주의 구조조정을 하면서 잉여인력으로서 퇴직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중에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거나 자기 사업을 시작하여 성공한 케이스도 있고 심지어는 홈리스로 전락한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대부분 나름대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며 살고 있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에 빠진 지도 5년이 되었으니 평생직장이 보장되는 샐러리맨으로 만족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에 적응하며 살고 있는지 사회심리학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어느 노처녀의 '개인 구조조정 성공기'라 할 수 있는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Bridget Jones's Diary)는 우리의 흥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영화의 줄거리

Bridget Jones's Diary 출판사 홍보팀에서 일하는 서른둘의 노처녀 브리짓 존스(르네 젤위거)는 크리스마스날 집에 가기가 두렵다. 엄마의 음식 솜씨 맛을 보는 것은 좋지만 모든 사람들이 과연 남자가 있는지, 언제 결혼하는지 물어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중년 남자를 소개시켜주려 하고 브리짓은 간밤의 파티에서 마신 술이 덜 깬 탓인지 수다를 떨게 된다. 이 자리에서 만난 변호사 마크 다시(콜린 퍼스)는 너무 무뚝뚝하고 이혼 경력 때문에 전혀 호감을 느낄 수 없다. 마크가 자기 어머니에게 "아줌마 같은 스웨터를 입고 골초에 술주정까지 하는 뚱보를 소개시켜주려느냐"고 항의하는 것을 보고 브리짓은 굳게 결심한다.

빨리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술병을 끼고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쓸쓸한 죽음을 맞거나, 아니면 위험한 정사(Fatal Attraction)에 나오는 글렌 클로즈처럼 비참하게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해에는 체중을 20파운드 줄이고, 술과 담배를 끊고, 괜찮은 남자(a nice and sensible boyfriend to go out with)를 만나 사귀겠다는 각오하에 자기관리를 위한 일기를 쓰기로 작정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브리짓이 첫 번째로 꼽은 남자는 직장 상사인 다니엘 클리버(휴 그랜트)이다. 캠브리지대 출신으로 지성이 풍부하고 잘 생긴 것은 좋은데 바람둥이 기질이 흠이다. 브리짓은 미니 스커트와 시쓰루 원피스를 입고 출근하여 그의 관심을 끌고자 한다. 출판기념회를 계기로 다니엘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제프리 아처경과 같은 유명 작가들과 어울리고 리셉션 장을 돌아다니며 지식을 과시하기로 하는 등 온갖 계책을 마련한다. 그러나 "카프카의 모터바이크" 출판기념회는 엉망이 된다. 브리짓은 마이크 스위치를 켜지도 않은 채 고장이라고 소리지르고, 세계적인 작가 샐먼 루시디를 보고는 화장실을 묻는 게 고작이다.

실망하는 브리짓에게 다니엘이 '포스트 모더니즘'적이었다고 위로해주니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런데 다니엘이 출판기념회장에서 만났던 마크와는 캠브리지 동창이었고 마크가 그의 약혼녀를 가로채 결혼한 후로 서먹서먹해졌다는 말을 듣는다. 브리짓은 마크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위인이라며 혐오감마저 느낀다.

브리짓은 시골 삼촌 집에서 열리는 가장무도회에 다니엘과 함께 참석하기로 하고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공교롭게도 중도의 휴양지 호텔에서 마크를 만난다. 마크는 동료인 여자변호사와 동행하며, 시간도 같이 보내고 일도 같이 한다고 말하지만 마크와 다니엘 사이에는 불꽃 튀기는 신경전이 벌어진다. 그 이튿날 다니엘은 런던에 할 일이 많다는 핑계를 대고 떠나버리고, 브리짓은 플레이보이 바니걸 차림으로 혼자서 파티장에 갔다가 망신을 당한다. 왜냐하면 가장무도회 계획이 바뀌어 모두 정장차림이었기 때문이다. 수상쩍은 생각이 들어 급거 런던의 다니엘을 찾아가보니 침실에 웬 날씬한 아가씨가 벌거벗고 앉아 있지 않은가. 다니엘에게 배신감을 느낀 브리짓은 그의 만류를 뿌리치고 출판사를 그만 둔다.

브리짓은 인생의 구조조정을 실시하기로 결의를 다진다. TV 방송사로 직장을 옮기는 동시에 그 동안 남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남자가 자신이 원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을 원하게 만드는 법"(How to make men want what they don't think they want) 따위의 책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내다버린다.

어렵사리 시트업 브리튼이라는 TV 방송국에 사건기자로 취직한 브리짓은 소방서에 취재를 나가서는 실수를 연발한다. 행복한 커플들의 회식 자리에 참석했다가 비참함을 느끼고 나오는데 뜻밖에도 마크가 뒤따라 나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것도 "당신의 지금 모습 그대로"(just as you are)라고 하면서.

싫은 사람을 좋아해야 할지 어떨지 망설이는데 TV 뉴스 취재명령이 떨어진다. 쿠르드족 망명청년과 결혼한 영국 여자가 쿠르드족 남편의 강제송환을 막기 위해 제기한 소송의 판결이 나오는 대로 인터뷰를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법원 앞에 가보니 재판이 끝났고 사건 당사자들은 떠났다는 게 아닌가. 당황해하는 참에 담배 가게에서 우연히 만난 마크는 자신이 담당 변호사라면서 인터뷰를 주선해주겠다고 말한다.

브리짓은 일약 특종을 한 민완기자(legendary reporter)가 된다. 그녀의 생일날 집으로 찾아온 마크는 그녀와 사이좋게 음식을 만들고 애정을 도탑게 하지만 그때 마침 다니엘이 찾아와 미국 약혼녀와 헤어지게 되었다며 브리짓과의 재결합을 원한다. 서로 마음에 앙금이 남아있던 마크와 다니엘은 집밖으로 나가서 치고 받는 결투를 벌인다.

다시 크리스마스를 맞아 집에 간 브리짓은 마크가 이혼을 하게 된 것은 다니엘이 들러리까지 섰던 마크의 일본인 妻를 유혹한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더욱이 놀랍게도 마크가 동료 여자변호사와 같이 뉴욕의 대형 로펌으로 스카웃되어 떠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이의 있습니다"라고 외친다. 결혼에 이의하는 게 아니라 마크 같은 고급두뇌가 해외 유출되는 것(brain drain)에 반대한다고 변명을 한다.

연말 연휴에 친구들이 파리에 놀라가자고 찾아왔는데 마크가 불쑥 나타난다. 브리짓과 작별 키스를 나누기 위해 뉴욕에서 돌아왔다는 것이다. 야한 팬티를 입고 뜨거운 시간을 보내려던 참에 브리짓의 일기를 훔쳐본 마크가 실망하고 떠난다. 속옷 차림으로 그의 뒤를 쫓아간 브리짓은 눈길 위에서 마크와 뜨겁게 포옹을 한다.

감상의 포인트

Bridget Jones's Diary 인생의 구조조정은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는 브리짓과 그녀의 엄마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인생의 구조조정에 나선다. 브리짓은 멋있는 남자를 만나기 위해 무절제한 생활을 정리하기로 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사랑이 없는 남편과 별거하기 위해 집을 나간다. 두 사람 다 많은 시행착오를 범하지만 결국 한 사람은 성공하고 다른 한 사람은 실패하고 만다.

첫 번째 이유는 브리짓의 경우 매일매일 일기를 쓰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내적 가치의 개발에 힘쓴 반면 그녀의 어머니는 쇼핑 채널의 보조호스트로 출연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 결과 브리짓은 TV 방송기자로의 변신에 성공하지면 그녀의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브리짓이 구조조정에 성공한 두 번째 요인은 후보자 두 사람을 경쟁에 붙여 진실을 밝혀내고 당당하게 선택을 한 데 있다. 그녀가 마음에 끌리는 대로 결정을 하였다면 바람둥이의 거짓된 사랑에 속고 말았을 것이다.

세 번째로는 브리짓이 구조조정의 진행상황을 계속 점검하고 방향을 수정한 것을 들 수 있다. 브리짓은 매일같이 체중을 재고 피운 담배 개수를 세어가며 목표를 재확인하였다. 심지어는 출근 길에 보이는 옥탑 전광판의 광고를 "161 파운드, 섹스 후에 피운 22개피, 밥 대신 섹스"라고 해석할 정도로 몰두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면 개인이나 기업이나 구조조정의 원리는 비슷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IMF 위기를 맞아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에 들어갔던 기업들이 경영정상화에 성공한 사례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임직원이 합심협력하여 목표달성에 노력했다는 것, 생산제품이 시장에서 환영을 받도록 품질을 개선하고 코스트를 절감했다는 것, 경영정상화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했다는 것, 구조조정 초기에 닥친 위기상황을 혼연일체가 되어 극복했다는 것 등 공통점이 많다.

그러나 이 영화의 매력은 경쾌한 유머와 위트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다분히 동명의 원작소설을 쓴 옥스포드대 영문과 출신인 헬렌 필딩이 BBC 방송기자 경험을 살려 실감나게 쓴 대사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브리짓은 다니엘과 시골로 여행을 가 밤을 지내며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방금 당신이 한 행동이 어느 나라에서는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것을 알아요?"
"그럼. 그래서 난 영국에서 산다는 게 스릴 만점이야."
"그 이야기를 총리에게 전해야겠군요. 연설할 때 써먹을 수 있게."

Bridget Jones's Diary 그렇지만 연출까지 샤론 맥과이어라는 여자감독이 맡아서 그런지 이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은 한결같이 한두 가지는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아니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타이틀백에서 브리짓이 립싱크로 부르는 노래는 오래 전에 에릭 카르멘이 불렀던 "올 바이 마이셀프"(All By Myself)라는 팝송인데 브리짓의 감정이입(empathy)이 너무나 리얼한 나머지 본래 여자가수가 부른 노래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이니 말이다.

여성작가의 원작을 여자감독이 영화로 묘사한 직장내 남녀관계를 보면 우리가 성희롱(sexual harassment)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을 넘어서 있다. 도처에서 성희롱 주의보가 울리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상대방 여성이 문제를 제기하면 무조건 남자 망신으로 이어지지만, 영국의 일류 출판사에서는 약간의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즐기는 모습들이다. 예컨대 점잖은 인권전문 변호사와의 사랑도 무미건조할 것 같은데 그가 말하듯이 "점잖은 놈도 할 짓은 다한다"고 이해하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