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댄서

주말에 방송되는 TV 프로 중에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시사 다큐물이 있다. 말 그대로 시청자들이 궁금해하는 사건을, 그 중에는 언론에 보도된 적이 없는 금시초문인 사건도 많지만, 방송 제작진이 많은 비용을 들여가며 치밀하게 조사를 하여 당국의 미진한 대처를 질책하는 프로그램(investigative report)이다. 사상계 발행인 고 장준하 씨의 실족사 사건, 이태원 햄버거 식당에서의 칼부림 사건, 광신적인 부모 밑에서 치료를 거부당한 김신애 어린이 사건 등은 사회적으로도 큰 물의를 일으켰다.

최근에 방영된 "어느 토요일 밤의 죽음-남겨진 살인의 의혹"(2000년 어느 여름밤 지방국도에서 벌어진 뺑소니차 사건)에서는 현장에 남겨진 증거만 분석해 보아도 타살의 증거가 역력함에도 제대로 수사를 벌이지 않고 신고자를 되레 뺑소니차 범인으로 몰아버린 수사당국을 질타하며 재수사를 요구하고 있었다. 지금도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이나 시청자들이 볼 때 "대명천지에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 무능한 경찰 탓인가, 무관심한 검사 탓인가, 아니면 무성의한 변호사 탓인가, 총체적인 사법 정의의 한계라 할 만했다.

2000년 봄 칸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여 화제가 되었던 영화 "어둠 속의 댄서"(Dancer in the Dark)를 보았을 때에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가 소개되었을 때 유럽에서는 감동과 열광의 도가니였던 반면, 미국에서는 왜 '형편없는 영화'라고 폄하하였는지 짐작이 갔다.

영화의 줄거리

Dancer in the Dark 미국 어느 시골 마을에서 체코에서 이민 온 셀마(아이슬랜드의 히피 출신 가수인 비요크 분)는 오직 한 가지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비록 싱크대 철판공장에서 힘겨운 프레스 기계를 다루고 있지만 마을 연극반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의 가정교사 마리아 역을 맡아 열심히 춤과 노래를 연습하고 있다. 그녀의 희망이란 유전적으로 시력장애를 앓고 있는 외아들이 열세 살이 되었을 때 개안수술을 받게 해주는 것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의 생일날에도 중고 자전거 사주는 것조차 주저하면서 차곡차곡 저축을 한다.

그녀의 외롭고 힘든 처지를 이해하고 많은 사람들이 도우려고 애쓴다. 중년부인 캐시(카트린느 드뇌브)는 작업장에서 그녀의 일을 돌보아 주는가 하면 뮤지컬 영화도 함께 보러 다닌다. 공장 밖에서 그녀를 사모하며 집까지 태워다 주기 위해 기다리고 서 있는 노총각 제프도 있다. 싼값에 트레일러 집에 세 들어 살게 하고 종종 아들도 돌보아 주는 경찰관 빌(데이빗 모스)은 그녀에게는 하늘 같은 존재이다.

비록 현실은 우울하고 암담하지만 뮤지컬을 좋아하는 셀마에게는 공장의 기계소음도 음악 소리처럼 들린다. 그녀는 환상 속에서 공장의 공원들과 기계소리 음악 반주에 맞춰 역동적인 춤을 춘다. 시력은 거의 실명 단계에 이르렀지만 그녀는 한 푼이라도 목표액을 채우기 위해 야간작업도 서슴치 않는다.

그러한 그녀에게 어느날 밤 경찰관 빌은 자신이 경제적으로 몹시 쪼들리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약간의 유산은 씀씀이가 헤픈 아내 때문에 모두 써버렸고 집도 저당 잡힌 은행으로 넘어갈 판이라고 말한다. 새 소파를 할부로 구입하자고 조르는 아내에게 이러한 사실을 밝힐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의 속셈은 집 어디엔가 숨겨놓은 셀마의 비밀저금통 소재를 알아내기 위한 것이다.

셀마는 실명 단계에 이른 시력 때문에 공장에서도 해고 당하고 마을 뮤지컬에서도 주연을 포기하고 만다. 그런데 마지막 월급을 채워 넣으려고 저금통을 찾아보니 속이 텅 비어있지 않은가. 그녀는 빌의 소행임을 직감하고 빌의 집으로 찾아간다. 빌의 아내는 셀마를 보고 자기 남편을 유혹하러 했느냐고 질책하며 집을 비우라고 요구한다.

이층으로 올라간 셀마는 거의 안 보이는 눈으로 빌과 실강이를 하다가 총을 들고 있던 빌을 쏘고 만다. 재정상의 궁핍으로 자포자기 상태가 된 빌이 자살할 용기는 없고 그녀에게 죽여달라고 애원하였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저금해놓았던 돈 2천달러를 되찾은 그녀는 제프의 차로 호숫가 옆 병원으로 가서 담당 의사에게 그녀가 흠모하던 체코 출신 뮤지컬 배우 '올드리치 노비'의 이름으로 안과수술 예약을 한다.

그녀는 결국 뮤지컬 연습을 하던 마을회관에서 경찰에 구속되고 사건의 외형만을 판단한 배심원단에 의해 1급 살인죄(first degree murder)로 사형 평결(verdict)을 받는다. 그러나 캐시 등이 법원에 탄원을 하여 1심 변호사의 무능으로 증거조사가 미진한 탓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는 이유로 재심(retrial)을 받게 된다. 하지만 셀마는 변호사 비용으로 금쪽같은 수술비를 써야 한다는 말에 형집행 유예(stay of execution) 신청을 철회하고 사형집행을 자청한다. 셀마는 두려움에 떠는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세상"(New World)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감상의 포인트

Dancer in the Dark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화가 치민 것은 수호천사 같은 사람들이 여러 명 등장함에도, 사법 정의(司法正義)의 한계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지 못한 일이다. 같은 처지의 이민 노동자인 캐시역을 맡은 카트린느 드뇌브야 셀마와 같이 영화도 보고 뮤지칼 연습도 같이 하고 야간작업을 하는 그녀 대신 일도 돌봐주는 등 처음부터 천사표 역할을 하러 출연하였다손 치자. 칸느에서 관객들이 열광한 것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배우가 천사의 연기를 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변호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1심 변호사는 일방적인 증거조사의 허점을 파헤칠 생각은 안하고 피고인에게 자비를 호소하는 변론이나 늘어놓았을 것이다. 실력이 있어 보이는 재심 변호사는 억울하게 1급살인(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살인)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을 보고도 사례금 2천달러를 못받게 된다고 하니까 그 길로 손을 털고 일어선다. 생의 의욕을 포기한 사람을 구하려고 노력해봐야 자기만 피곤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 때는 1960년대 중반이므로 지금처럼 신문과 방송에 형사 피고인의 궁박한 처지를 알리고 일반 사람들에게 동정을 호소하는 기법이 덜 발달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호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일정 시간 이상 무료변론 등 공익(pro bono) 활동을 해야 함에도 1심 변호사의 무능을 탓하던 그가 셀마 재심사건의 수임을 선뜻 포기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말없이 공장 밖에서 셀마를 기다리고 서 있던 노총각 제프도 평소 셀마에게 호의를 베풀던 빌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았을 터이므로 그가 앞장서서 빌의 가장된 친절을 파헤쳐 봄직 한데 그가 한 일이라곤 셀마가 안과의사에게 수술비를 선납하였다는 것을 알아낸 정도였다. 한 마디로 셀마 주변사람들의 무능력, 무기력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이 영화는 애당초 덴마크 출신의 라스 폰 트리어 감독이 그가 선언한 '도그마 95'대로 휴대용 디지털 카메라(캠코더)만 가지고 매우 이색적인 뮤지컬 영화를 촬영했다 해서 화제가 되었다. 모두 여섯 편의 짧은 뮤지컬 신이 등장하는데 공장에서는 기계의 소음이, 기차 화물칸에서는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가, 사건 현장에서는 턴테이블 위 레코드판 소리가, 법정에서는 재판 장면을 스케치하는 화가의 연필 소리가, 독방에서는 환풍구에서 들려오는 찬송가 소리가, 형장으로 가는 계단에서는 간수들의 발자국 소리가 리듬과 화음을 만들고 음악이 된다.

Dancer in the Dark 한 마디로 "어둠 속의 댄서"는 북구의 신세대 감독이 신대륙으로 이민을 간 유럽인의 애환과, 가장 너그럽고 인도적인 듯 하면서도 자신들의 체제유지에 냉혹할 정도로 엄격한 미국인에 대한 비판을 버무린 작품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 영화를 이상과 같이 해석한다면 우리 역시 그 결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국에 돈을 벌러 온 외국인 근로자들이 억울한 처지를 당해도 수수방관하거나 애써 외면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처지를 돕는 척하면서 자기 잇속만 챙긴 사람도 적지 않았다. 사실 이 영화는 불우한 처지의 이웃을 돕겠다고 말만 앞세우는 사람이나 사리를 도모하는 위선적인 인간들을 질타하고 있다.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공장 기계의 소음도 뮤지컬의 반주 소리로 새겨듣고, 실명을 안타까워하는 주변사람들에게 모든 아름다운 것을 다 보았으니(I've seen it all) 괜찮다고 되레 위로를 해준다. 이 영화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가진 자'들을 위로해주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도우려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이 세상은 살기 좋아질 것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