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지난 10월 중순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는 金宇中 전경련 회장의 후임회장을 선출 문제를 논의하는 회장단 회의를 열기 전에 회의실과 비서실 내부에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는지 점검하는 소동이 벌어졌다(경향신문 1999. 10.15자 기사). 이미 99년도 국정감사가 온통 도청·감청 문제로 시종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우리 사회에서도 '몰래 카메라' 문제에 이어 도·감청 문제가 표면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해프닝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1998년에 개봉된 헐리웃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Enemy of the State)는 첩보영화라기보다 일종의 사회고발영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도 최근 우리나라에서 세계대회를 개최한 NGO(시민단체)의 활동을 부각시키는 영화라 할 수 있다.

Enemy of the State 미국에서는 일찍이 70년대부터 월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권력기관의 도·감청 및 감시(wiretapping and surveillance) 활동이 사회 이슈화되었다. 헐리웃에서도 이러한 소재를 다룬 "The Parallax View", "Three Days of the Condor", "The Conversation" 등 화제작이 많이 제작되었다. 그런데 제리 부룩하이머('콘 에어', '더 록')와 토니 스코트('탑 건', '크림슨 타이드')가 각기 제작과 연출을 맡은 이 영화는 '빅 브라더'(조지 오웰의 SF 소설 "1984년"에 나오는 정부기관)의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는 스릴러물에 그치지 않는다. 보통의 시민들 - 전직 미 국가안보국(National Security Agency; NSA) 요원과 이 분야에는 전혀 白紙상태인 흑인변호사가 막강한 권력을 가진('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헬리콥터를 동원하는 것은 예사이고 우주공간의 첩보위성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NSA의 비밀음모를 통쾌하게 쳐부수기 때문이다.

영화의 줄거리

메릴랜드주 아쿠콴 공원 호숫가에 아침 산책을 나온 미 하원 헤머슬리 위원장(실제로 제이슨 로바즈 의원이 카메오로 출연했다고 한다)이 국가안보국(미국에서도 워낙 비밀에 가려있기에 이 기관의 이니셜 'NSA'은 "Never say anything!"의 약어라는 말도 있다)의 레이놀즈 부국장(존 보이트)으로부터 반 강압적인 설득을 받는다. 국가안보 차원에서 현재 의회에 계류중인 장거리통신보안법(Telecommunications Security Bill)의 통과에 협력해 주면 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다. 그러나 그는 국가 안보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며, 이 법으로 선량한 유권자들이 다치게 된다고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힌다. 더 이상 그를 설득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레이놀즈의 부하가 그가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도록 심장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가장하여 그를 승용차에 태운 채 호숫물에 빠뜨린다.

같은 날 오전 워싱턴의 노동문제 전문변호사인 로버트 클레이턴 딘(윌 스미스)은 마피아가 관여한 노조 사건을 처리하면서 노조원들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비디오 테이프를 입수한다. 핀테로 클럽을 운영하는 마피아 두목이 불법으로 노조 활동을 방해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이 필름은 로버트 딘이 그의 대학시절 여자친구인 레이첼 뱅크스에게 부탁하여 구한 것인데 결코 위법행위에 의하여 수집한 것은 아니라는 다짐을 받는다. 그는 이 테이프를 갖고 핀테로를 찾아가서 그의 부당 노동행위는 15-20년 刑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더 이상 노조원들에게 압력을 가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물론 핀테로는 노발대발하며 1주일 안에 누구에게서 이 테이프를 얻었는지 밝히지 않으면 조직을 동원해서 보복을 하겠다고 협박한다. 핀테로 클럽을 나온 딘은 클럽의 출입구가 FBI 요원에 의해 24시간 감시당하고 있음을 알아챈다.

하원의원의 시체가 인양되던 시간 호숫가에 설치한 야생조류 관찰용 비디오를 수거하러 온 환경운동가 자비츠는 NSA 요원에 의해 수상한 인물로 지목된다. 그가 촬영한 청둥오리 필름 속에 혹시 사건 장면이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이다. 이 보고를 접한 NSA의 레이놀즈는 부하들에게 자비츠가 촬영한 필름이 공개되기 전에 속히 찾아오라는 지령을 내린다. 같은 시각 사무실에 돌아와 모니터로 호숫가의 필름을 점검하던 자비츠는 헤머슬리 의원이 괴한들에게 살해되는 장면을 발견한다. 신변의 불안을 느낀 그는 테이프 복사물을 갖고 집에서 뛰쳐나온다. 워싱턴 시내에서 괴한들의 추격을 받던 자비츠는 뒷골목으로 피신하다가 우연찮게 대학 동창인 로버트 딘과 맞닥뜨린다. 딘은 가족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려고 란제리 가게에 들렀던 참이다. 그곳에서 도망치던 자비츠는 결국 소방차에 치여 현장에서 즉사하고 만다. 그 순간 NSA는 로버트 딘이 문제의 테이프를 소지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그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첩보위성까지 동원하는 첨단 감시(surveillance) 체제를 통하여 NSA 요원들은 로버트 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다. 그의 전과기록은 물론 비디오 대여 및 은행거래 내역, 레이첼과의 수상한 금전거래관계 등이 NSA 요원들에 포착된다. 레이놀즈는 차후 소송으로 발전할 가능성에 대비 로버트 딘의 사회적 신용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도록 하고, 그를 집중 감시하기 위해 그의 휴대전화, 만년필, 구두, 바지 등 일상용품에 전파발신장치를 설치한다. NSA의 공작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레이첼은 해고 당하고, 로버트 딘은 변호사 수임사건의 불미스러운 일로 로펌 일을 그만 두게 된다. 익명의 발신자로부터 딘이 레이첼과 만나는 사진을 우송 받은 그의 부인도 남편의 여성 관계를 의심하고 딘을 집에서 내쫓는다. 오갈 데 없는 그가 호텔에 투숙하려 하자 신용카드는 이미 거래정지된 상태이고 프론트 데스크 앞에서 그의 손가방마저 도난을 당한다.

로버트 딘은 레이첼을 만나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번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고자 애쓴다. 그의 주변을 에워싸고 증거 테이프를 회수하려는 NSA 요원들의 존재를 눈치챈 딘은 레이첼로부터 '브릴'이라고 하는 정체불명 사나이의 말을 듣고 그에게 도움을 청하러 간다. 깁섬(Gibb Island)으로 가는 페리 보트의 접선장소에서 그가 서성거리자 어느 택시 기사가 그를 태워주는데 그는 중간 연락책이다. 문제의 사나이 브릴(진 해크먼)과 드디어 접선하게 된 딘은 자기 몸이 정보기관에서 부착한 첨단 장비로 감시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가까스로 기관원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집에 돌아온 딘은 부인에게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한다. 문제의 비디오 테이프 카트리지가 그의 아들 선물로 샀던 전자게임기에 들어 있음을 알고 등교길의 아들을 찾아 그것을 꺼내 갖고 브릴을 만나러간다. 레이첼마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사건 현장에는 딘이 살인범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널려있는 것을 본 그는 복수를 다짐한다.

브릴이 판단하기에 NSA가 딘을 살인용의자로 모는 것은 그를 수배하기 쉽고 또 그가 그동안에라도 아는 것을 발설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브릴은 딘의 처지를 위로하며 그의 아지트로 가서 NSA가 찾고 있는 문제의 증거 테이프를 조사한다. 아니나 다를까 비디오 테이프는 NSA의 고위간부가 헤머슬리 의원의 살해현장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브릴 역시 중동지역에서 NSA의 통신감청 전문요원으로 일하다가 주변사람들로부터 위험인물로 따돌림받고 결국 퇴직금도 못받은 채 쫒겨났음을 이야기한다. 브릴의 아지트가 NSA 요원들의 습격을 받게 되자 두 사람은 아지트를 폭파시키고 현장을 탈출한다.

싸움의 상대와 싸울 방법을 알게 된 브릴과 딘은 통신보안법안 통과의 주역인 의원이 투숙하는 호텔에 NSA의 감청장치를 설치하고 레이놀즈 부국장의 집에도 이를 깔아 놓는다. TV만 켜도 감청되는 사실을 쉽게 알게 하여 이번 비밀공작의 총책임자인 레이놀즈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다. NSA 국장의 호된 질책을 받고 나온 레이놀즈는 증거 테이프를 팔겠다는 브릴의 연락을 받고 볼티모어 경찰청사 앞에서 브릴과 만난다. 문제의 증거 테이프가 도피 도중 훼손되었기 때문에 레이놀즈의 사실인정 진술을 녹음하기 위한 것인데 브릴은 NSA에서 못받은 퇴직금을 포함한 180만달러를 대가로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현장을 포위하고 있던 NSA 요원들에게 붙잡힌 딘과 브릴은 레이놀즈와 최후의 협상을 벌인다. 딘이 기지를 발휘해 레이놀즈에게 문제의 증거 테이프는 역시 비디오 테이프를 찾으러 혈안이 되어 있는 핀테로에게 있다고 말한 것이다. 핀테로 클럽에 간 레이놀즈 일행은 영문을 모르는 마피아 두목과 언쟁을 벌이다 마피아 일당과 총격전을 벌이고 핀테로 클럽을 줄곧 감시해 온 FBI에 의해 이 사건의 전말이 파헤쳐진다. NSA의 비밀공작 요원들은 이 사건을 국가의 假想敵(enemy of the State)에 대한 모의훈련(STO; standard training operation)으로만 알고 있었다고 진술한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국가정보기관이 마음만 먹으면 스파이 위성을 동원하여 지상에서 뛰어가는 대상인물의 모습까지 감시할 수 있다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되었지만 최근 NSA의 정보수집 활동을 소개한 기사를 읽어보면 전혀 황당무계한 묘사는 아닌 것 같다.

"미 NSA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에셜런'(Echelon; 특수부대)이라는 이름의 스파이 네트워크를 운용하고 있다. 미국에 대한 테러나 국제범죄의 단서를 포착하기 위해 첩보위성을 동원하여 은밀하게 전화, 팩스의 내용을 감청하고 전자메일을 열어본다. 예컨대 내용 중에 '기밀', '대통령', '테러'라는 말이 나오면 이것을 재분류하여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감청 및 감시활동을 강화하는 것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미국의 NSA가 국제테러 방지보다는 유럽의 첨단 산업정보를 빼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이에 대응하기로 했다. 특히 호주, 미국, 네덜란드 등 전세계의 온라인 헤커 전문가들은 지난 10월 22일을 '에셜런 파괴의 날'로 선언하고 미 NSA 컴퓨터에 수백만 건의 E-메일을 보내 기능을 마비시키기로 했다."(경향신문 1999.10.25자 기사)

우리나라의 사정은 어떠한가. 현재 정부와 여·야당이 각기 개정안을 마련하고 있는 [통신비밀보호법](법률 제4650호)에 의하면 우편물 및 전기통신(전화, 팩스, E-메일 포함)의 비밀과 자유에 대한 제한은 지금도 엄격한 법적 절차를 거치게 하고 있다. 국가 정보수사기관은 형법상의 내란·外患·公安·폭발물·뇌물·방화·아편·通貨·체포감금·약취유인 등에 관한 죄, 군형법상의 반란·이적의 죄, 국가보안법·군사기밀보호법 등에 규정된 150여 가지 범죄의 방지 또는 수사를 위해(동법 5조) 우편물의 열람과 전기통신의 감청(이를 '통신제한조치'라 한다)을 할 수 있으나 반드시 통신비밀보호법과 형사소송법, 군사법원법의 규정을 따르도록 하고 있다(3조).

통신제한조치의 허가절차는 검사(군검찰관 포함)가 법원(군사법원 포함)에 통신제한조치를 허가해 줄 것을 서면으로 청구하면 법원은 이유있다고 인정하는 경우 통신제한조치의 종류, 목적, 대상, 범위 및 기간(3개월 이내)을 특정하여 허가를 하게 된다(6조). 국가안보를 위한 통신제한조치의 경우에는 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의 허가를 얻어야 하며, 상대가 외국기관일 경우에는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7조). 또 통신제한조치로 취득한 정보는 비밀로 해야 하며(11조), 통신비밀보호법상 범죄의 예방 또는 수사·소추, 징계절차, 손해배상 소송 등에 한하여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12조).

현재 여야가 검토하고 있는 개정안의 골자는 ▷감청대상 범죄 수의 대폭 축소, ▷감청 요건의 강화, ▷감청허가 기간의 단축, ▷통신업체의 통신정보 제공시 영장제 적용, ▷불법 도·감청장비 제조자와 구입자에 대한 처벌 강화 등으로 요약된다(한겨레신문 1999.10.21자). 정부와 여당은 불법 도·감청에 의한 통신비밀보호침해죄로 고소·고발된 피의자(주로 기관원)를 검찰이 기소하지 않을 경우 고소·고발인이 법원에 이 사건의 재판회부(裁定)를 요구할 수 있게 하고(형사소송법 제260조의 개정 필요), 인권보호를 위해 수사기관이나 통신업체 종사자들이 감청 등에 의해 취득한 정보의 [비밀준수 의무규정]을 준수하도록 하는 등 내부통제 강화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에서도 정부 당국은 일반시민을 감청·감시할 때 소정의 적법절차를 거치도록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막강한 권한을 가진 NSA 고위간부는 어지간한 것은 단독으로 약식처리하고 FBI 등 외부기관의 동의가 필요한 경우에도 가짜 동의서를 만들어 처리한다. 이 영화에서도 국회의원이 투숙한 호텔 방에서 NSA의 비밀 감청장비가 나오고 FBI가 감시하는 조직범죄 본거지에서 총격사건이 발생했기에 망정이지 실제 상황이라면 영원히 덮여질 수밖에 없는(cover-up) 사건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영화는 정부당국의 불법행위에 맞서는 시민행동의 필요성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함께 하는 시민행동]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통신비밀보호법이 국가권력 앞에 유명무실해졌다고 주장하며, 첫째, 사업상 개인정보를 관리하고 있는 기업(PC 통신사와 유선 및 휴대전화 회사)들에 대해 ▷수사기관에 대한 합법적인 정보제공 내역 ▷불법적인 정보제공요청 내역 ▷CUG 폐쇄 및 게시물 삭제 내역에 관한 통계자료를 공개하고, 둘째, 사용자의 동의없는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사과 및 이의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을 약속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http://www.ww.or.kr/onestep/Main.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