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플린트

IMF 체제하에서 온 나라가 구조조정으로 떠들썩하다. 換亂에 빠진 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받은 덕분에 부채가 많은 기업이나 부실 자산이 많은 금융기관들이 홀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이유로 가차없이 퇴출 당하고 있다.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통념을 깨뜨리고 이미 5개의 은행이 P&A(자산·부채이전)란 이름으로 우량은행에 흡수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은행원이 직장을 잃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는 누구든지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는 죄목의 선고를 받으면 변명 한 마디 못하고 물러나야 한다. 최근 '도덕적 해이의 극치'라며 언론과 여론의 질타를 받았던 장은증권 파동의 전말을 알아보자.

장은증권 직원들이 명퇴금 160억원을 챙기고 회사 문을 닫았다는 98년 7월 6일자 언론 보도에 모든 신문 사설마다 이를 파렴치한 행동이라고 비난하고 급기야는 김대중 대통령도 금융기관 종사자들의 도덕적 해이에 단호히 대처하라고 관계당국에 지시했다. 그러나 7월 15일자 [미디어 오늘]에 의하면 장은증권의 명퇴금 보도는 사실과 다르며, 주주인 장기은행과 금감위의 일방적인 언론 플레이에 사실이 왜곡된 것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사실 명퇴금 12월분은 동종업계의 최저수준으로 주주인 장기은행에서 되레 이를 종용했다는 것이다. 160억원도 우리사주대출금, 주택자금, 생활안정자금 등을 상환하고 나면 직원들이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32억원으로 1인당 평균 767만원에 불과하고 100여명은 오히려 6억원이 넘는 돈을 물어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것이 약정고 올린다고 친척과 친지들을 팔았다가 결국 패가망신하고 실직하는 것에 대한 대가인 셈이다. 정부나 언론은 퇴출은행 직원들의 업무 인수인계 거부로 금융기관 구조조정이 벽에 부닥치자 금융기관 종사자들의 기를 꺾으려고 장은증권을 속죄양 삼아 여론몰이에 나선 것이라는 풀이도 있었다.

이 사건의 당사자를 언론과 트러블메이커(금융기관 근로자), 그리고 정부 및 기득권층으로 나누어볼 때 이와 비슷한 당사자의 대립구조를 보여준 영화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말하자면 A가 나쁜 줄로만 알았으나 A를 욕하던 B가 더 비난받아야 마땅한 경우이다. 체코 출신의 밀로스 포먼 감독이 만든 1996년 콜럼비아 영화사의 "래리 플린트"(The People vs. Larry Flynt)는 우리 사회의 도덕적 해이에 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해결방안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

70년대초 신시내티에서 '허슬러 고고 클럽'을 운영하던 래리 플린트(우디 해럴슨 분)는 술집 경영이 어려워지자 스트립쇼를 광고하기 위해 성인남자를 위한 소식지를 만들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누드 사진만 싣는 것은 불법이므로 적당히 기사를 섞은 '플레이보이'지 비슷한 포르노 잡지(미국에서는 이를 'Skin Mag'이라 함)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동생과 함께 출판사업을 시작한 래리는 플레이보이 잡지처럼 고상한 척 할 필요가 없다며 여성의 음부를 완전히 노출한 사진을 게재한다. 그의 지론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면 그들의 성기도 아름답게(?) 지으신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소매상들이 이 잡지를 드러내놓고 팔기를 꺼려하는 바람에 허슬러 잡지의 반품이 늘어난다.

이미 열살 때부터 켄터키 산골마을에서 밀주(moonshine)를 팔아 돈벌이에 나섰던 래리로서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마침 재클린 오나시스가 휴양지에서 全裸로 일광욕하는 사진을 입수하여 게재한 덕분에 허슬러는 단번에 2백만부 이상 매진되는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다.

일약 백만장자가 된 래리는 '결혼은 자유로운 남녀관계를 깨뜨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술집에서 쇼걸을 하다 잡지 제작에도 참여하며 재능을 보인 알세아 레저(코트니 러브 분)와 결혼을 한다. 보수적인 주민과 종교인들이 잡지사 밖에서 연일 항의시위를 벌이는데도 래리의 편집방침에는 거침이 없다. '性域'을 무시한 그의 잡지제작으로 그는 음란물 유포와 조직범죄 가담 혐의로 기소된다.

법정에 선 그를 위해 약관의 하버드 법대 출신 변호사 알랜 아이작맨(에드워드 노턴 분)이 시민의 기본권(civil liberty)이 위협을 받는 일이라며 변호를 맡는다. 신시내티 해밀턴 카운티 법정에서 검사는 래리가 만드는 잡지가 동성애를 미화하고 산타 클로즈까지 성욕의 대상으로 묘사하는 등 부끄러운 사진과 그림을 게재하였다며 음란에 관한 지역정서(community standard)를 해쳤다고 공박한다. 이에 맞서 래리 플린트 측은 허슬러가 다른 성인용 잡지와 크게 다를 바 없으며, 검사의 논고는 수정헌법 1조에 반하는, 풍기단속을 빙자한 검열이라고 반박한다. 래리는 배심원들에게 "버드와이저 맥주를 미성년자가 마셨다고 판매를 금지할 것이냐"고 따져묻는다. 래리의 사업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애쓰는 변호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은 유죄를 평결(verdict)하고 판사는 래리에게 25년 징역형을 선고(sentence)한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그는 無罪 석방되고 이어 신시내티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출판의 자유를 수호하는 시민연합' 집회에서 래리 플린트는 "살인 현장을 찍은 뉴스위크가 퓰리처 상을 받는 현실 속에서 누드 사진을 게재하는 것이 왜 불법이냐"며 전쟁보다는 섹스가 낫다고 기염을 토한다.

그럼에도 보수적인 조지아주에서는 사법당국이 허슬러 잡지 판매상을 단속하고 래리는 그에 맞서 몸소 잡지판매대 뒤에 선다. 그 무렵 애틀란타에 사는 카터 대통령의 여동생이 그를 만나자고 한다. 어느 사이엔가 그녀에게 종교적 감화를 받은 래리는 세례까지 받지만 그의 잡지는 십자가에 결박된 누드 사진을 게재하는 등 계속 聖域을 무시한다.

1978년 유죄를 인정하는 대신 처벌을 면하자(plea bargain)는 변호사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래리는 조지아주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나오다가 정체불명의 괴한으로부터 저격을 받고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상을 입는다. 신변의 불안을 느낀 그는 무장경호원이 지키는 헐리웃 비벌리힐즈의 맨션으로 이사하고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모르핀 주사를 맞기 시작한다. 1983년 통증을 없애는 수술을 받고 래리 플린트는 사업의욕을 다시 불태우지만 그의 부인은 삶의 의욕을 잃고 이미 마약중독에 깊이 빠져든 뒤다.

래리는 센세이션을 일으키기 위해 케네디 암살범 찾기에 1백만달러의 현상금을 내거는가 하면 존경받는 종교지도자 제리 폴웰 목사가 모친과 동침하였다는 거짓 고백기사를 잡지에 싣는다. 마침 공교롭게도 저명 기업인인 들로리언이 FBI의 함정수사에 걸려 마약밀매 현장에서 체포되는 비디오 테이프가 공개된다. 그리고 LA 법원의 판사는 비디오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법정에 헬멧을 쓰고 나타나고 성조기로 기저귀를 만들어 차는 등 기행을 일삼는 래리를 법정모욕죄로 구속하고 15개월의 정신병원 감호를 명한다.

한편 버지니아주 로아노크에서는 제리 폴웰 목사가 래리 플린트를 명예훼손을 이유로 4천만달러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고, 래리는 그의 잡지 기사를 허락도 받지 않고 전재하여 모금운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맞고소한다. 결론은 특이하게도 래리가 폴웰 목사에게 감정적인 고통(emotional distress)을 주었으므로 20만달러의 손해배상을 하라는 것이었다.

마약 중독과 AIDS 감염으로 부인이 죽고 그와 의견충돌을 보인 아이작맨 변호사가 사임을 선언한 가운데 워싱턴의 연방대법원에서는 상고심 재판이 열린다. 죽기 전에 뜻깊은 일을 하고 싶다는 래리의 진정어린 호소에 감동한 아이작맨이 다시 변론을 맡아 수정헌법의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법적 공방이 벌어진다. 비록 패로디일 망정 公人(public figure)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 법적 문제가 아닌 취향의 문제(matter of taste)라 할 수 있느냐,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호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 쟁점이다. 1987년 대법관들은 전원일치의 판결로 래리의 손을 들어준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룬 연방대법원의 재판 장면은 1791년 제정된 수정헌법 제1조(Amendment I)의 표현의 자유에 관한 것이다. 이슈는 래리가 포르노그러피를 그의 잡지에 게재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폴웰 목사가 근친상간을 하였다는 모욕적인 기사를 함부로 실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는 지금도 인터넷에서의 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계속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당시 연방대법원은 "수정헌법 1조의 정신은 자유로운 사상의 표현을 존중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표현의 자유는 개인의 자유이며, 진리탐구를 위한 초석이 되고 건강한 사회를 건설하는 토대가 되므로 좋은 의견이든 나쁜 의견이든 전부 들어보기 위해 수정헌법 1조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기념비적인 판결을 내린다. 래리는 승소 판결을 받고 "자기 같은 속물이 헌법의 보호를 받는다면 어느 누구나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종교적 덕목을 최우선시하는 링컨 세이빙즈의 찰스 키팅 회장이 폴웰 목사의 소송을 부추기고 끝까지 후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의 말미에 간단히 자막으로 처리되지만 그는 미국 최대의 저축대부조합(S&L)을 경영하면서 상하의원들에게 막대한 정치자금을 뿌렸던 정경유착의 챔피온 격인 인사이다. 자산 규모가 20억달러에 달했던 링컨 세이빙즈의 도산은 미국의 저축기관들을 집단으로 쓰러뜨린 'S&L 위기'의 도화선이 되었고, 그의 정치헌금 내역은 워싱턴의 조야를 발칵 뒤집어놓은 정치 스캔들을 일으켰다.

본래 아리조나주 출신인 키팅은 '키팅 파이브'로 알려진 유력 정치인들에게 자금을 대주고 그 보좌관들에게도 사업자금을 빌려주면서 정계와 재계에 영향력을 넓혀왔다. 그러나 그의 투기적인 자산운용이 줄줄이 실패하는 바람에 결국 납세자의 부담으로 모두 (다른 S&L까지 포함하면 총 747개의 저축기관이) 청산절차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센세이셔널한 옐로우 페이퍼를 만들어 팔며 돈을 버는 것이 잘못인가, 아니면 겉으로는 고상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고객이 맡긴 돈을 마음대로 쓰면서 정·재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사리를 도모하는 것이 잘못인가. 장은증권 직원들이 평생직장으로 믿었던 직장을 떠나면서 업계에서 지급되는 최소한의 명예퇴직금을 받으려 한 게 잘못인가, 아니면 그들로 하여금 자신과 친지의 돈을 끌어 모아 헛된 약정고 경쟁을 벌이게 한 금융구조가 문제인가. 탓해야 할 것은 경영의 실패요 그릇된 거래관행이지 그 동안의 손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협상을 벌였던 증권사 직원들에게 모든 책임을 지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체코 출신의 포먼 감독이 강조하고자 한 점은 연방대법원 판결이 보여주었듯이 미국 사회가 아직도 신뢰(trust)의 기반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사회의 진짜 도덕적 해이는 고통을 균형있게 분담하려 하지 않고 남에게만 미루려고 하는 사회 기득권층의 일방통행적인 의식구조가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