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코너

중국은 1992년의 韓-中 수교 이후 우리나라와 훨씬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人民민주주의 독재의 사회주의 국가(중국헌법 1조 1항)로 남아 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다가 분쟁에 봉착했다거나 무슨 사건에 연루된 외국인이라면 말도 안통하고 사회체제도 다른 이곳에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이 '이상한 나라'에 간 앨리스나 다름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건을 극화한 영화가 MGM의 1997년작 '레드 코너'(Red Corner; 제작 및 감독 존 애브넛, 각본 로버트 킹·론 코슬로)이다. 중국에서는 견제와 균형의 삼권분립 원칙이 통하지 않으므로 인민법원은 인민검찰원, 공안기관(경찰)과 함께 법을 집행하고 법질서를 유지하는 사법기관의 하나일 뿐이다. 최근 베이징 중급 인민법원에서 저작권 침해사건을 국영 TV의 중계하에 공개재판으로 진행(한국일보 98.7.13자 7면 참조)한 것도 중국 당국이 사법제도를 국제기준에 맞게 운영하겠다는 정책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이 영화는 주연을 맡은 리처드 기어가 달라이 라마를 숭배하는 불교도로서 중국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인사인 만큼 이 영화는 천안문 광장, 베이징 법원청사 등의 현지 로케이션 외에는 거의 대부분의 장면을 LA 근교의 세트장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베이징에 가 본 사람들에게는 가공의 무대(예를 들어 영화 후반에 주인공이 수갑을 찬 채 지붕을 뛰어넘어 미국 대사관으로 도피하는 장면)가 엉성하게 보이겠지만 낯선 곳에서 봉변을 당하는 주인공의 처지가 남의 일 같지 않게 전달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줄거리

미국의 사업가 잭 무어(리처드 기어 분)는 중국의 방송당국과의 위성 TV방송 합작투자 건을 마무리짓기 위해 베이징에 도착한다. 미국의 TV 프로가 "외설적이며 폭력적이고 미신적"이라는 반대에 부딪치지만 개방에 적극적인 실력자의 지지를 받아 합작계약의 성사 직전에 이른다.

개방화시대의 중국 사회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사람과 이를 막으려 드는 사람들의 격전장이나 다름없다. 패션쇼도 京劇과 함께 열린다. 쇼장에서 만난 모델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자 그는 합작계약의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그녀와 호텔 방으로 돌아가 샴페인을 터뜨린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 公安(경찰)의 난입으로 잠에서 깬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동침했던 중국 여인의 살해범으로 긴급 체포된다. 그녀는 칼로 난자 당한 채 죽어 있었고 그의 옷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다. 잭은 미 대사관에 연락을 취하고자 하나 중국 공안은 "자백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저항하는 자에게는 가혹함을"이라는 중국 사법제도의 원칙에 따라 무조건 자백부터 강요한다.

구치소에 찾아온 미국 영사는 잭은 외국인으로서 외국 변호사를 세울 수 없으며 중국 인민법원에서 지정하는 중국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공교롭게도 피살자가 중국 고위장성의 딸로서 현장 증거로 보아 진범임이 확실한 잭은 중형을 면치 못하고 잘해야 형량을 낮추는 길밖에 없어 보인다. 첫 공판때 재판정에 처음 나타난 센 율린(바이 링 분)이라는 律師(중국의 변호사) 역시 유죄를 시인한 후 과음한 탓으로 정신을 잃어 그리 된 것이라고 변명하여 살 길을 찾으라고 종용한다. 무죄를 주장하면 틀림없이 사형이 선고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을 거쳐 스탠포드 로스쿨을 나온 잭은 변호사답게 중국 형법을 공부하여 직접 증인신문에 나선다. 중국의 재판정에서는 무죄추정(presumption of innocence)의 원칙이 인정되지 않지만, 율린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잭의 진지한 태도에 감화를 받고 그가 무죄라는 증거를 찾는 데 함께 노력한다. 피살자가 목에 걸고 다녔던 로켓(locket; 사진 등을 넣어 목에 거는 금합)이 자취를 감춘 것, 잭의 옷에서 심하게 클로로포름 냄새가 나는 것, 잭이 까닭없이 다른 재소자들로부터 린치를 당한 것 등 뭔가 조직적인 음모의 피해자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율린은 그의 보증하에 잭을 데리고 나와 호텔 방, 패션쇼장 등 사건 현장을 함께 돌아본다. 밤중에 피살자가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여러 차례 통화를 했다는 데 착안하여 전화국을 찾아가 착발신 기록을 뒤져보지만 그 기록은 이미 말소되어 있는 상태이다. 경찰의 호송을 받으며 이동하는 도중 의도적인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그 사이에 경찰 복장을 한 암살자가 나타나 잭과 율린을 죽이려 든다. 현장을 벗어난 잭은 천신만고 끝에 미 대사관으로 피신한다.

그가 구치소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대사관에서 신원을 보증한 것이 아니라 율린이 변호사로서의 평판과 명예를 걸고 보증한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잭은 밖에서 공안에 에워 쌓여 곤욕을 치르는 율린을 구하러 대사관 밖으로 걸어나온다. 인종과 국경,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어 새롭게 無罪 입증에 매달린 두 사람은 유력한 증인(경찰 하수인)과 증거물(로켓)을 찾아 진실을 규명한다. 어렸을 적 문화혁명 당시 紅衛兵에게 모욕당하는 아버지를 무기력하게 참고 보아야 했던 율린으로서는 더 이상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며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재판정에 나타난 검찰원장이 진실을 파헤치도록 허가하자 중국 실력자의 아들이 독일측 경쟁사로부터 더 좋은 조건으로 위성방송 합작제의를 받고 미국과의 계약을 깨기 위해 미국측 대표인 잭을 제거하고자 살인사건의 함정에 빠뜨린 것임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피살자의 아버지 洪장군은 범행 음모자를 현장에서 처단하고 마침내 잭은 석방된다.

베이징의 紫竹공원을 함께 거닐며 율린은 잭에게 "바람에 흔들리기를 기다리며 감정으로 충만해 있는 대나무 숲"을 가리키며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다. 자가용 비행기로 베이징을 떠나려던 잭은 중국을 떠날 수 없는 율린과 뜨거운 포옹을 나눈다.

감상의 포인트

레드 코너를 우리 기준으로 보면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사법제도에 관하여 약간의 기본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법무부가 법무자료 176집으로 펴낸 [중국법 연구(IV) - 사법제도]를 통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중국에서 형사사건은 인민검찰관이 인민법원에 기소를 하는 경우와 사건과 관련이 있는 공민이 직접 인민법원에 기소하는 경우 두 가지가 있는데, 이 영화는 외국인이 관련된 살인사건인 만큼 처음부터 중급 인민법원의 관할에 속한다.

본건 살인사건은 合議制로 심리하여야 하므로 인민법원의 1심 合議廷은 재판원(법관; presiding chairman)과 2인의 인민배심원으로 구성된다. 상소심은 모두 재판원으로 합의정을 구성하게 된다. 이 합의정 구성원의 권한은 평등하다. 사건에 대한 심리 판결은 반드시 합의정에서의 평의절차를 거쳐야 하며 다수결(majority)로 정하게 된다. 다만, 평의중의 소수 의견은 사실대로 조서에 기록하여야 하고 합의정 전체 구성원이 서명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인민법원의 재판에 합의제를 실행하는 것은 중지를 모으고 개인의 독단이나 주관적인 편견과 사사로운 정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는 실력자의 눈치를 보는 재판장이 증인신문을 중단시키려 하나 피고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인 중년의 여자 배심원이 끝까지 증언을 들어보자고 요구하여 진실이 밝혀졌던 것이다.

한편 이 영화에 나오는 중국의 율사는 미국의 변호사처럼 자유직업인으로서 법정의 스타는 아니다. 중국의 법률에서도 "율사는 국가의 법률업무 수행자이다"라고 규정하여 사회주의 체제의 수호자로서 공직에 종사하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형사사건의 경우 형사피고인의 위임 또는 인민법원의 지정을 받아 변호인을 맡게 된다. 율사의 임무란 피고인의 무죄, 책임의 감경을 주장하는 자료와 의견을 제출하고, 피고인의 소송단계에서의 권익을 옹호하며, 피고인이 제기하는 법률문제에 자문을 하는 등 법적으로 피고인을 돕는 일이다.

이 영화에서 율린은 처음에는 사회주의 체제에 충실한 변호사로서 스스로의 역할을 제한하였으나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잭의 모습에 감동을 받고 인생을 바꾸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죄없는 사람이 다중의 힘에 눌려 고통을 받게 해서는 안된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다. 이 영화는 그 변화의 모습을 자죽공원의 대나무 숲에 비유하고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요령있게 출세한 잭한테 그녀(잭이 하룻밤을 보낸 미모의 모델을 포함하여)는 '이상한 나라의 흰토끼'(White Rabbit in Wonderland)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