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씽

별 생각없이 일상적으로 행동한 것이 악의적인 상대방의 함정에 빠져 누명을 쓰게 되었다면, 왕따를 당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형사처벌 받을 위기에 처하였다면 그 심정이 오죽할까. 오래 전에 어느 작가는 누명을 쓰고 감방에 들어간 사람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영화 필름을 거꾸로 돌리듯이 상황을 그 시점으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아주 냉철하게 행동할 터인데 …….

최근에도 그와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검찰 수사와 국회 청문회를 연거푸 거쳤음에도 모든 국민이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고급 옷 로비 사건'이 그것이다. 특별검사제가 도입되면 또 한 차례 대대적인 수사가 펼쳐질 전망이다.

이 사건은 국내 굴지의 재벌 그룹 C 회장의 사법처리를 둘러싸고 재벌회장 부인이 검찰총장 부인의 고급 의상 "옷값 대납요구를 받았네, 안받았네" 하며 서로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였다. 이 사건은 등장인물들이 장관 부인, 검찰총장 부인, 고급 의상점 사장이고 옷값도 일반 서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수 천만원대라는 점에서, 또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네 명의 부인의 진술이 제각기 다르다는 점에서 화제거리였다. 불과 반 년밖에 되지 않은 사건을 서로 다르게 말하니 "각자 믿는 하나님도 다르냐"하는 비아냥 소리마저 터져나왔다.

1998년 개봉되었던, 애욕과 배신을 다룬 영화 "와일드 씽"(Wild Things)도 극의 전개에 따라 상황은 바뀌지만 제자인 여학생의 "몸에 손도 대지 않았는데 강간범으로 몰린" 미남 총각선생의 억울한 이야기를 중요한 모티브로 삼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

Wild Things 범죄 스릴러(헨리-연쇄 살인범의 초상 등)를 즐겨 다룬 맥노튼 감독이 처음 이 영화의 대본을 받아들었을 때에는 플롯의 전개가 뻔한 그렇고 그런 영화일 것으로 짐작했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미국 플로리다주 남부의 블루베이 대학에서는 요트 항해술을 가르치는 샘 롬바르도 교수(매트 딜론)가 여학생들에게 단연 인기이다. 미남 총각일 뿐만 아니라 특히 여학생들에게 친절하고 자상하기가 마치 큰오빠 같다. 1년 전에 아빠를 잃은 켈리(데니스 리차드) 역시 롬바르도 교수하고 가까워지고 싶어 선생님 차를 세차하겠다고 제안한다. 롬바르도는 비록 부잣집 딸일 망정 정당한 근로소득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이를 허락한다. 그런데 롬바르도 교수는 켈리의 어머니 산드라하고도 최근까지 염문을 뿌렸던 사이이다.

켈리는 세차를 하다가 옷이 물에 흠뻑 젖었다며 막무가내로 롬바르도 교수의 집안으로 들어가는데 …. 그리고 장면은 암전(fade out)된다. 잠시후 상기된 표정으로 집에서 뛰쳐 나오는 켈리.
표정이 심각한 켈리를 다그치던 산드라는 "롬바르도 교수한테 성폭행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롬바르도를 강간죄로 고소한다. 그녀가 이사로 있는 대학에도 그의 징계를 요구하였음은 물론이다. 롬바르도는 학교에서고, 경찰에서고 '자신은 결코 여자 제자는 건드리지 않는다'며 결백을 주장한다.

경찰에서는 그가 '강제로 삽입은 하였나 사정은 하지 않았다'는 켈리의 진술을 곧이 듣고 정밀 신체검사를 통한 정액의 채취 등 증거(physical evidence) 조사는 하지 않는다. 그녀의 어머니가 블루 베이에서 손꼽는 부동산 갑부이자 유지라는 점에서 감히 켈리의 주장을 따지고들 형편도 아니다. 민완형사 레이 듀켓(케빈 베이컨 분. 그는 이 영화에 제작자로도 참여했다)은 롬바르도의 결백 주장을 반신반의하지만, 동료 여형사는 켈리의 말을 의심한다. 교수를 유혹하다가 이에 실패하자 독이 올라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롬바르도의 동료들도 "말썽부릴 만한 여자 애들을 집에 들이지 말았어야지" 하면서 누명을 벗기란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니 변호사를 구하라고 충고한다. 롬바르도는 접촉하는 변호사마다 마을의 유지인 원고의 눈밖에 나기를 꺼려하는 가운데 가까스로 켄 보우던 변호사(빌 머레이)를 구해 이 사건을 맡긴다. 그 역시 생명보험회사의 보험금을 타내려고 거짓으로 목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는 불량끼가 있는 변호사이다.

법정에서 롬바르도의 변호사는 켈리가 1년전 아빠가 자살하였을 때 가출하여 마약에 탐닉한 전과가 있는 반면 롬바르도는 '올해의 교수' 상을 받은 모범적인 선생이었음을 부각시킨다. 이때 원고측 변호사는 롬바르도가 1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에서 여학생을 성폭행하였다며 수지 톨러(니브 캠벨)라는 여학생을 증인으로 내세운다. 수지는 법정에서 롬바르도 교수가 자기를 친절히 대해주다가 어느 날 자기를 쓰러뜨리고 성폭행을 한 후 "애송이들은 흥분을 못시켜"하며 일을 끝내더라는 진술을 한다. 롬바르도의 인면수심(人面獸心) 행태에 치를 떤 여자 판사는 그의 보석을 불허하고 구치소 수감을 명한다.

이러한 경우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길이란 변호사가 원고측 주장을 믿을 수 없음을 조목조목 파헤치고, 배심원들이 '선량한 이웃'으로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피고임을 밝히는 일이다. 롬바르도의 변호사는 결정적 증언을 한 수지 역시 마약을 복용하였고 그녀가 학교 기물을 손괴했을 때에도 수지의 구명에 노력했었다는 점을 들어 그녀가 선생한테 강간을 당했다고 하면서 그로부터 한 달도 못되어 그 선생한테 도움을 청할 수 있었겠느냐며 증언의 신빙성을 공박한다. 보우던 변호사가 선서를 한 증인(witness under oath)으로서 위증을 하면 또 다시 감옥을 가게 될 것이라고 수지를 욱박지르자, 그녀는 발악하듯이 원고측 변호사가 시키는 대로 말했을 뿐이라고 폭로한다.

그 결과 롬바르도 교수는 무혐의로 석방된다. 원·피고 변호사간의 타협(settlement)에 따라 허위 고소를 한 켈리의 어머니는 950만달러의 거금을 피고측에 위자료로 지급한다. 이에 대해 켈리는 롬바르도에게 "내 몫의 유산을 받아가지고 엄마하고 놀아날 것이냐"고 반발하고, 듀켓 형사는 당연히 수사대상임에도 자기네들끼리 적당히 타협하고 사건을 무마하는 것은 묵과할 수 없다며 롬바르도와 켈리, 수지의 삼각관계에 수사의 촉각을 세운다.

여기까지는 통상적인 법정영화이며 관객들은 얄궂은 여자 애들의 함정에 빠질 뻔한 주인공의 처지에 안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성과 양심이다. 아무리 뻔지르르한 말을 하더라도 그가 비양심적인 의도를 갖고 있다면 비난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성경에도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꽹과리같다"(고린도 전서 13장 1절)고 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사건 등장인물들의 인간성이나 양심은 어떠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롬바르도 교수는 학생들로부터 인기를 끌려고 애쓰며, 부유한 여성들과 염문을 피우고 다니기에 항상 돈에 쪼들린다. 켈리는 집안은 부유하지만 부모의 사랑에 굶주려 있고 항상 탈선하려는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다. 수지는 가정 형편에 불만을 품고 (그녀의 오빠는 관광객을 상대로 악어 재주부리는 묘기를 보여주고 생계를 꾸려간다) IQ200이 넘는 비상한 머리를 바탕으로 일확천금하려는 생각을 꿈꾼다. 듀켓 형사도 치정극에 말려들었다가 그 현장을 목격한 수지를 감옥에 처넣을 정도로 파렴치한 일면을 지니고 있다.

Femme Fatale 이후 사태가 숨가쁘게 반전된다. 켈리의 성폭행 주장은 롬바르도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으며, 수지는 거짓 증언을 한 대가로 보우던 변호사로부터 한 몫을 챙긴다. 완전범죄를 위해서는 듀켓 형사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는 수지의 꾀임에 따라 롬바르도는 듀켓을 매수하여 경찰 내부에서 강경 입장을 취하게 한다. 그리고 켈리가 수지를 살해한 것으로 연극을 꾸미고, 듀켓 형사는 켈리를 과잉방위로 쏘아죽인 후 정직을 당해 소일 삼아 롬바르도의 요트를 타게 된다. 그 요트에 숨어 있던 수지는 듀켓이 롬바로도와 다툴 때 나타나 그를 작살 총으로 처치한다. 그렇다면 950만달러는 누가 차지하는가.

이 영화는 Film Noir(비정·냉혹한 도시의 범죄를 그린 영화), Femme Fatale(필름 느와르에 반드시 등장하는 妖婦)의 정형대로 수지가 롬바르도마저 독살하고 돈을 독차지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배를 탈 줄 모른다던 수지가 소형 보트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여 형사의 의아심을 뒤로 한 채. 말하자면 이 영화는 완전범죄의 요건을 수사를 맡은 형사까지 끌어들여 공동으로 범행을 저지른 후 이간질로 공범자끼리 서로 죽이게 만드는 것으로 풀이한다. 그리고 'End' 자막이 나온 뒤에도 결정적인 몇 장면을 더 보여줌으로써 거듭된 반전(twists and turns)으로 줄거리를 잊어버린 관객들의 의문을 완전히 해소해주고 있다.

감상의 포인트

사실 이 영화에서 법률적인 측면은 별로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롬바르도가 섰던 법정이 파나마의 독재자 노리에가가 미국에 붙잡혀와 재판을 받았던 곳이라는 게 특기할 만하다 할까. 이 영화에서는 법정영화에서 반드시 제기되는 물적 증거 내지 법정 증언의 증거능력과 사실의 심판자(fact trier)로서 배심원의 판단이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각종 증거보다도 사건 관련자들의 드러나지 않는 인격과 양심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마치 많은 은행 사람들이 기업에 돈을 빌려줄 때 차주회사가 제출하는 각종 수치나 담보보다 기업주의 자질, 사업의욕, 성실성 등을 중시한다는 것과 흡사하다. 제아무리 보유 현금이 많다고 해도 경영진이 골프나 도박에 미쳐 있다면 그 기업은 오래 갈 수 없을 것이다. 같은 계열의 필름 느와르인 1981년도 화제작 "버디 히트"(Body Heat)에서도 어리숙한 변호사(윌리엄 허트)가 뒤늦게 후회한 것은 의문의 여인(캐쓰린 터너)의 관능적인 공격에 무너져 처음부터 자신을 도구삼아 범행을 추진할 정도로 영악스러운 그녀의 다른 면모를 간과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앞에서 말한 고급 옷 로비 사건의 전말도 자연스럽게 파악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증거수집과 실체적 진실의 발견은 권한 있는 수사기관에서 할 일이지만, 이 사건에 관련된 네 명의 귀부인들의 진술이 서로 엇갈리는 것은 "왜 그런 말을 해야 했을까" 하는 정황과 그네들이 살아온 인생 이력을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청문회에 불려나왔던 어느 고관부인이 이들 귀부인의 행태에 환멸을 느끼고 농촌에 들어가 땅이나 파겠다고 한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해석도 가능하다. 서로 진술이 엇갈렸으나 어느 한 쪽이 의도된 거짓말을 했다고 몰아부칠 수만도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착각이 확신이 되는 경우이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은 누구나 상황을 보는 자기만의 틀을 갖고 있다"며 자신에 유리한 쪽으로 기억을 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거의 모든 '정상인'이 갖고 있는 '달 크기 착시' - 동산 위로 떠오르는 달이 하늘 한가운데 걸린 달보다 2∼3배 이상 큰 것으로 착각하는 현상은 사진으로 찍어보면 같은 크기임에도 수평 방향은 멀리 있고 머리 위는 가깝다는 '천정 모형'에 따라 이런 착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똑같은 상황이라도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진술이 다를 수 있는 것은 개개인 특유의 상황 해석에 따른 착각 때문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청문회의 증언 가운데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도 있고, 의도적인 것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1999.8.29자 중앙일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