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생애
Our Great Father

차남 박 훤 용

박내옥 님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전국 유명산의 바위마다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때 누구든지 자기 이름을 널리 자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 그 이름이 어디 오른 적도 없으셨던 매우 평범한 분이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義人志士가 될 수 없는 것처럼 富貴功名을 탐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남을 해치지 아니하고 자기 몫을 다 하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된다. 오늘날은 개인과 가정의 가치가 중요시되는 民主社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렇게 본다면 아버지야말로 자랑스러운 생애를 사셨다고 말할 수 있다.
돌이켜보건대 그분의 생애는 苦難에 찬 우리의 現代 民族史와 궤를 같이 하였다.
1912년 壬子生이시므로 나이 서른이 넘어서까지 일제 식민치하에서 뜻을 펴실 수가 없었고, 40대 초까지는 8.15 해방과 6.25 사변을 겪으면서 이데올로기의 희생이 되실 뻔하였다 (실제로 전주 근교에서 국민학교 교장을 하시던 큰아버지 한 분은 동란 중에 참변을 당하셨다).

또 50이 넘어서도 많은 식구들을 거느리고 생계유지에 급급하셔야 했으며, 우리나라가 어느 정도 경제개발을 이룩한 다음에야 정년을 맞으셨으니 실로 숨가쁘게 살아온 한 평생이 아닐 수 없다.
고생이 다른 세대의 몇 배에 이른 만큼이나 우리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요즘 흔치 않은 훌륭한 덕목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아버지는 자녀 교육에 매우 열심이셨다.
4남 5녀는 옛날 기준으로도 대식구였음에 틀림없다. 우리 기억에도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월사금을 못내 학교에서 쫓겨온 적이 없었으며, 형제들 모두 최고 학부까지 마치게끔 뒷바라지해주셨다. 쌀 100가마를 한하고 빚을 내서라도 가르칠 작정이었다는 말씀이 정녕 빈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둘째, 아버지는 가정생활의 귀감을 보여주셨다.
일찍이 부모에 대한 孝가 너무 지극하신 나머지 직장과 맞바꾸실 정도였으며 형제간의 우애도 남다르셨다. 어려운 가정살림 속에서 어머니와 한번도 부부 싸움하시는 법이 없었고 술·담배 등 자신의 嗜好조차 삼가실 정도였으니 우리의 머리가 절로 수그러지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아버지는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셨다.
비록 내노라 하는 자리에 오르시지는 못했어도 당신의 맡은 바 책임을 항상 완수하셨으며 수십 년 회계·경리를 맡아 하시는 동안 조금도 일처리에 흠을 남기지 않으셨다.

넷째, 아버지는 지금까지 감사의 생활을 하고 계신다.
당신이 젊어서 평균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으신 것도 큰아버님들의 공으로 돌리시며, 심지어는 태평양 전쟁당시 온 국민이 헐벗고 굶주릴 때 끼니 걱정 안한 것도 직장(米倉)의 상사 덕분이었다고 말씀하신다. 당신 인생의 고비마다 크고 적은 도움을 준 사람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감사를 표하시는 것은 오늘날 세태에서 보기드문 덕목이 아닐 수 없다.

다섯째, 아버지는 신앙 생활에도 모범이 되신다.
느즈막에 교회를 다시 찾으셨지만 主日을 거르시는 일이 없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지키고 계신다. 자녀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시는 모습을 볼 때 천금만금의 유산보다도 소중하다고 생각되며, 우리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고 있다.

이제 八旬을 맞으신 어버지께서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한다.
우리 자녀들은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이 앞으로도 오래 사셔서 평생토록 우리를 위해 고생하신 것이 만분의 일이라도 보상받으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출처: 아버지 朴萊玉의 八十平生, 1992  in 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