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의 아카디아

우리나라에는 국립공원이 많다. 설악산을 비롯하여, 서울 근교의 북한산과 한라산, 지리산등 전국의 名山이 모두 망라되어 있고 경주의 보문단지와 남해의 한려수도, 다도해까지 거의 20개소에 이른다. 이러한 국립공원은 자연보호나 관광, 휴양에 있어 국가적인 기준을 보여주는 곳이므로 경치 좋은 곳에 울타리나 쳐놓고 입장료를 받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곳을 찾는 관광객들로 하여금 뭔가 보고 배우고 돌아갈 수 있게 해줘야 제 구실을 하는 것이다.

요즘같이 무덥고 짜증나는 무더위에는 그 해 여름 미국 북동부의 아카디아 국립공원(Arcadia National Park)에 갔었다는 추억만으로 청량제가 되는 것 같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설악산 부근의 동해안처럼 경치가 그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 적지 않다. 그러나 아카디아는 돈많은 사람들의 휴양지가 서민들의 관광지로 탈바꿈하였고 살아있는 자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국민관광지의 모델로 생각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後代에 의한 개발의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카디아 국립공원 지도 캐딜락 마운틴(아카디아, 캐딜락 모두 국내외 名車의 이름이다. 그것은 이 곳에 처음 당도한 프랑스인이 디트로이트까지 내륙탐험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정상에서 저 멀리 프렌치 맨 베이로 드나드는 배를 내려다 본다. 또 서쪽으로 몇 걸음 옮기면 햇살을 받아 물비늘로 번뜩이는 이글 레이크가 저 아래 펼쳐져 있다. 짙은 안개, 소슬바람, 갈매기떼, 파도 소리와 함께 저 멀리 등대의 고동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노점에서 사먹었던 버터 물에 찍어먹는 랍스터(lobster; 바다 가재)의 고소한 맛도 잊을 수가 없다.

아카디아 지형 역시 랍스터의 집게발 같은 재미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빙하기에 침식된 지형에 바닷물이 침범하여 형성된 2개의 반도인데 영락없이 남자의 그것처럼 생겼다. 미국에서 아침 해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 곳은 17세기초 프랑스 탐험가 '샹플렝'이 처음 발견할 때까지 인디언들이 살았으며 그후 예수회 선교사를 비롯한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이 번갈아 지배했던 땅이었다. 19세기 초 미국이 차지한 뒤에는 북대서양 어업의 전진기지로 활용되었으며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부자, 저명인사들의 여름 휴양지로 각광을 받았다.

아카디아 휴가여행

미국에서 근무할 때 첫 여름 휴가는 으례 메인주에 있는 국립공원인 아카디아에서 시작하게 된다. 메인주까지 꼬박 하루를 달려야 하는 장거리 코스인데 우리 가족은 1989년 7월 여름 휴가여행을 떠나면서 중간 지점인 보스턴에서 일박함으로써 다소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포트랜드시를 지나 95번 하이웨이에서 페더럴 루트(연방 국도) 1번으로 접어 들었다. 이 길은 50년대에 신호등 없는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할 때까지 미국의 주된 도로망이었다. 바다를 끼고 달리는 1번 국도는 경치는 좋았으나 저녁을 먹고 나니 날이 어두워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목적지 도착시간에 쫒겨 호젓한 밤길을 서둘러 달려야 했다. 초행길이기도 하려니와 왕복 2차선 좁은 길이라 하이 빔을 켜고 달리는 데도 무척 힘이 들었다. 그래서 식구들과 함께 "하나님께 우리 앞길을 인도해주셔서 목적지까지 무사히 데려가 주십시오"(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하고 기도를 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환하게 불을 밝힌 차가 홀연히 나타나지 않는가! 기적같은 일이었다. 바로 긴급구조 연락을 받고 달려가는 견인 트럭이었다. 그 차 뒤를 쫓아 아주 수월하게 아카디아 초입까지 시속 100Km로 주파할 수 있었다. 지나고 보니 아카디아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던 것부터가 마치 기적처럼 여겨진다.

숙소는 미리 예약해둔 모텔에 들었다. 이곳처럼 한여름 3∼4개월만 영업하는 모텔은 종업원이 상주하지 않으므로 밤늦게 도착한다고 미리 연락해두지 않으면 열쇠를 받지도 못한다. 도중에 만난 견인차 덕분에 우리는 시간을 많이 절약하여 9시전에 도착하였으므로 별 어려움은 없었다. 아카디아에서 제일 번화한 바 하버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서 아카디아 탐험 거점으로 삼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국립공원의 인상

캐딜락 마운틴에서 바라본 바하버의 풍경 아카디아를 돌아보려면 우선 국립공원 비지터 센터에서 대강의 정보를 파악한 후 루프 로드(순환도로)를 이용하는 게 순서이다. 우리나라의 국립공원 하면 입장료 받는 매표소가 연상되지만, 미국에서는 국립공원마다 그 입구에 방문객이 그곳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모든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비지터 센터가 설치되어 있다.

내무부 산하의 국립공원 관리청은 의회에서 법률로 지정한 국립공원, 기념물, 역사.군사공원, 공원도로(파크웨이), 보존해안을 보살피는 기관이다. 많은 시설이 유료이긴 하지만 이용자들이 불편이 없도록 파크 레인저들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아카디아에서는 그곳에 서식하는 야생 동식물을 관찰하는 프로그램을 파크 레인저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미국의 국립공원은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역사적 유물이 상업적인 개발과정에서 손상되지 않고 거의 원형 그대로 후손에게 전수되도록 하는 게 그 목적이다.

국가에서 공원을 관리하는 국립공원 제도는 유럽에서 도입한 게 아니라 순전히 미국에서 시작된 제도라 하였다. 지금부터 100여년전 남북전쟁이 끝나고 국력이 서부개척에 집중되던 1870년 무렵 와이오밍주를 조사하던 일단의 탐험대는 울창한 숲과 계곡, 폭포, 간헐천, 야생동물을 자연상태 그대로 보존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정 구역내에서는 개인 재산권을 일체 제한하고 이를 국가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러한 주장은 각계로부터 광범한 호응을 얻었고 미 의회는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국립공원을 지정하는 법률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1872년 3월 '옐로우 스톤'이 그랜트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제1호 국립공원이 탄생하였다.

1916년에 제정된 국립공원 관리법은 국립공원의 목적을 "아름다운 경관과 천연 및 역사적 물건, 야생동물을 보존하고 미래의 세대가 이들을 감상하고 즐기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로부터 76년이 지난 오늘날 국립공원은 계속 추가되어 역사적 보존지역등을 포함, 357개소, 8천만 에이커에 이르고 있다.

아카디아의 루프 로드 진입로에서 우리는 1년간 유효한 1주일치 통행권을 끊었다. 이 길은 관광객들로 하여금 자연의 아름다움을 편히 구경하게 하는 한편 더 이상 자연의 원형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한다는 배려하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도로로 편입되는 공원 면적을 최소화하기 위해 일정 구간은 일방통행 도로였다. 아카디아 야생식물을 한 곳에 모아놓은 식물원(네이쳐 센터), 조수가 드나드는 바다 동굴 속에서 천둥소리가 난다는 썬더 홀, 안개 낀 호수가에서 커피 한 잔 마시기 딱 좋은 조르단 폰드 하우스, 460m 고지까지 차를 탄 채로 올라갈 수 있는 캐딜락 마운틴등 모두 루프 로드를 통하여 갈 수 있었다.

부자의 사회적 책임

그런데 곳곳에 마차가 다니는 길이 눈에 띄었다. 록펠러 2세가 자동차 없이도 아카디아의 자연경관을 잘 구경할 수 있도록 아치형 돌다리까지 세워가며 닦아놓은 길이라 하였다. 뿐만 아니었다. 국립공원에 사유지를 기증한 사람들의 편액이 공원 곳곳에 걸려 있었다.

그 내력을 읽다가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카디아가 19세기말까지만 해도 밴더빌트, 록펠러, 카네기, 모건, 포드등 내노라 하는 미국 부자들의 하계 휴양지였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 인근의 케네벙크포트는 부시 전 대통령의 하계 별장지이다.) 그 당시에는 뉴욕, 보스턴 등지에서 부자들이 타고 온 멋있는 요트들이 바 하버 항구에 즐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아카디아가 더이상 부자들에 의해 맹목적으로 개발되어서는 안된다는 시민운동이 일어났다. '죠지 도르'라는 지방 인사가 하버드 대학 총장을 역임한 '찰스 엘리어트'와 함께 아카디아에 많은 땅을 소유한 부자들을 찾아다니며 설득작업을 벌인 것이다. 몇 사람만 즐기는 것에 그칠 게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의 선물을 온국민이 함께 나누자는 취지였다.

이러한 캠페인은 록펠러가 그의 사유지를 흔쾌히 내놓으면서 급진전을 보았다. 록펠러의 땅은 국립공원의 1/3에 해당하는 1.1만 에이커나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손질도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인접 토지 소유자들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땅을 기부하고 나서자 연방정부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 의해 1919년 미 역사상 처음으로 민간 주도의 국립공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아카디아는 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많은 부자들이 몰락하고 특히 1947년의 대화재로 바 하버 일대의 별장지대가 잿더미가 된 후 과거의 화려했던 휴양도시라는 이미지를 떨쳐버리고 건전한 국민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 그렇기에 아카디아는 미국에서 옐로우 스톤 다음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국립공원이 되어 우리 같은 외국인들도 적은 비용으로 아카디아의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카디아 국립공원을 떠나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던 것은 이국적인 아름다운 경치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미국 부자들이 자신의 富를 당대에 그치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키는 그 정신이 특이하게 느껴졌다. 같은 국립공원이라 해도 우리나라와 미국의 운영방식이 다른 것처럼, 겉으로 비슷해 보이는 '자본주의'도 富의 세습이 보장되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모양이었다.

그해 여름 아카디아에서 미국의 부자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땅주인이 쳐놓은 철조망 앞에서 부자들을 욕하게 마련이지만, 미국에서는 사회적 기풍 탓인지(미국은 상속세가 엄청나게 무겁다) 피땀 흘려 이룩한 富를 기꺼이 사회에 되돌리는 그네들을 칭송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미국은 '자본주의의 典型'을 이루는 나라가 아니라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는, 사회주의 국가보다 더 한 나라라는 생각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