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전문경영인의 죽음

하늘이 열린 날(開天節) 연도에 국가가 게양된 가운데 하늘나라로 가신 李洪九(1938-2003)는 매우 자존심이 강한 경영인이었다.
그의 작고 소식을 전한 2003년 10월 2일자 도하 각 신문의 부음 난에는 '전 (주)동원 대표'로 소개되어 있었다.
그는 1962년 서울대 법대를 16회로 졸업하였으나 사법고시에는 뜻을 못 이루고 자원개발회사인 동원탄좌에 들어갔다. 때는 바야흐로 박정희 군사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고 석탄 증산이 독려되던 때라 우리나라 최대의 민영탄광인 동원탄좌의 사북 광업소에도 활기가 넘쳤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 당시에는 연탄이 가정난방에 혁명을 일으켰고, 무연탄을 생산하는 석탄산업은 대단히 중요한 산업에 속하였다.

발인식 장례행렬 장송행진곡

그는 1966년 초등학교 교사인 朴淑姬와 결혼하여 탄광촌에서 신혼 살림을 차렸다. 석탄 채굴이 중단된 지금은 카지노 호텔 등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사방에 시커먼 탄가루가 날리던 고장이었다. 그는 동원탄좌에서 간부사원으로서, 나중에는 경영진으로서 석탄 증산과 산업합리화 조치에 따른 감산, 해외자원 개발로 사업다각화를 이끌었다.

그 사이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된 1980년 봄 舍北 광업소의 유혈 노사분규 사태를 현장에서 지켜보아야 했고, 1995년 말에는 노태우 비자금 사건과 연루되어 기업주 대신 긴급 구속되기도 했다. 당시 동원 그룹 李 然(1915-2003) 회장(이하 "회장"이라 함)에게 반감을 가진 일부 광업주(德大)의 음해성 제보로 당시 대표이사이던 매형이 죄를 뒤집어 쓴 탓이었다. 나도 법률을 공부한 사람이지만 그때 기업주는 회사의 대표이사 직을 맡지 않는다는 것, 검찰의 기획수사에서 피의자는 구속을 면할 수 없다는 것, 검사가 철저히 수사를 하여 흑백을 가리는 것 못지않게 신속히 기소를 하여 보석허가를 받게 하는 것도 큰 혜택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검찰이 중요 사안에 있어서 죄가 있다고 잡아들이면 순순히 시인 및 타협(plea bargain)을 하고 사법처리되든가, 아니면 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하여 혐의사항을 일일이 반박하는 수밖에 없다. 매형은 결백을 주장하여 어렵지만 후자의 방법을 택했다. 매형은 결국 크리스마스 전전날에야 가까스로 보석으로 석방되었는데 나는 그때 모처럼 처남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법무부의 부장검사이던 친구에게 부탁하여 성동구치소로 특별면회를 갈 수 있었고, 당시 매형을 구속한 검사는 고교 후배, 보석을 허가한 담당판사와 2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부장판사는 대학동창, 변론을 담당한 변호사는 고등학교 및 대학교 선배였기에 그의 구명을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추억
매형은 내가 고3이던 1970년 우리집에게 누님의 둘째 해산구완을 부탁하면서 대학입시 준비를 하는 막내처남이 몹시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집안 형편상 외식이나 영화 구경을 몰랐던 나는 그때 매형이 보여준 영화 "80일간의 세계일주", 영화가 끝나고 사주신 징기스칸 요리를 지금까지도 매우 인상적으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인도 풍습에 따라 순장될 수밖에 없었던 셜리 매클레인을 구출한 데이비드 니븐은 나의 우상이 되었다. 나는 그때 지금은 검사가 된 두 살 배기 조카를 귀여워하고 잘 데리고 놀았음은 물론이다.

장의차 행렬 마지막 갈길 유택

매형은 오랜 술, 담배로 인하여 말년에는 기관지염과 폐암으로 고생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다분히 회장과의 갈등구조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로 심화되었다. 매형의 친척 어른이 되는 회장은 강원도 탄광을 기반으로 왕성하게 사업을 확장하여 호텔, 골프장을 여러 개 소유하였는데 한결같이 법적 분쟁 소지를 안고 있는 것들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의 불똥이 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한 문제의 해결은 사내 법률전문가인 매형의 골치 아픈 과제가 되었으며, 회장의 무리한 지시와 요구는 그대로 따를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법률문제를 처리하는 단순한 도구(mere instrument)이기를 거부한 매형은 여러 차례 회장과의 심한 충돌 끝에 뛰쳐나와 개인 사업을 벌이기도 했고, 그때마다 얼마 후에는 회장의 부름을 받고 다시 복직하여 동원 일을 돌봐야 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만 회장과의 갈등 구조는 매형이 동원 그룹에서 은퇴할 때까지 별로 개선되지 못하였다.

매형의 특기할 만한 업적은 동원의 해외자원개발 사업을 진두지휘한 일이다. 1990년대에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에서의 석유개발에 매달려 상당한 진전을 보았고, 아르헨티나 석유광구의 상업성이 국내 알려지면서 동원 주가는 여러 차례 상한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현지 사업이 다각적으로 전개되면서 나도 매형에서 자문을 하기 위해 1998년 4월 신체검사를 받고 아르헨티나 비자를 받아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매형으로서는 남미에 한 번 출장을 가려면 이틀 사흘씩 비행기를 타고 가야 했으므로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인생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라고 할까, 매형이 2003년 2월 건강에 이상을 느끼고 급거 귀국한 것이 남미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잠시 거쳐가기만 했을 뿐인 로스앤젤레스를 관광할 때였고, 매형이 폐암 치료를 받은 병원과 영안실은 바로 그가 사랑하며 미워했던(love to hate) 회장이 불과 몇 달 전에 거쳐간 서울대 병원이었기 때문이다.

전문경영인의 고달픔
매형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전문경영인이 경영수완을 발휘하여 회사의 주가를 높이고 자신도 보너스와 스톡옵션을 챙길 수 있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봉건주의 시대 때처럼 기업주를 위하여 신명을 다 바쳐야 하는 모순이 느껴졌다. 바로 이 날 우리나라의 대표적 재벌인 SK의 전문경영인이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인 손길승 회장이 사법처리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가을의 풍요로운 들녁 장풍득수의 풍경 마지막 이별

매형은 전문경영인으로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고시패스 숙원을 풀고 민완검사가 된 장남을 비롯하여 남부럽지 않게 장성한 3남 1녀를 둔 다복한 가장이었다. 또한 매니아 수준의 오디오, 비디오 시설과 렉서스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여유를 즐겼고, 아들딸을 모두 시집 장가 보내고 난 후 누님의 회갑을 맞아 카리브해로 크루즈 여행을 다녀온 멋쟁이이기도 했다. 매형은 같은 법률공부를 한 내가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일상적인 법률용어의 구사가 자연스러웠으며 말솜씨가 매우 논리적이었다. 일필휘지의 글씨 또한 달필이었다.

장례식 날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장의차가 충북 음성의 장지(대지공원묘지)로 가는 동안 고속도로는 이 세상에서 단풍놀이를 가는 행락객들의 차량으로 메워졌다. 이날 정오에 거행된 하관식 때 매형에게 마지막 이별을 고하면서 애석하게 느껴진 점은 비단 아들 손자 지켜보며 인생의 황혼기를 즐기지도 못하고 일찍 가신 것 뿐만은 아니었다.
身言書判이 출중한 분이었음에도 장·차관을 할 만한 時運을 타지 못했다는 것(빈소를 찾아온 장관 친구도 임인택씨, 김두희씨 등 여러 분이었다)과, 마지막 몇 달 동안 자신의 병세가 깊어진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종교에 귀의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부디 永眠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