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

시간을 뛰어넘는 여행은 상상의 내래를 펼 수 있어서 더욱 좋다. 현장에 가볼 수 있다면, 예컨대 로마의 콜로세움 앞에서는 역사의 무게를 묵직하게 느낄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의 "로마인 이야기"(한길사 刊)는 2000년전의 역사 상황을 오늘 우리의 눈 앞에 재현시키고 있다. 제4권과 5권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난세와 인물'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한다. 부르크하르트는 '세계사에 관한 고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대한 인물의 존재는 세계사의 수수께끼이다. 역사는 이따금 하나의 인물 속에 자신을 응축시키고 그후 세계는 이 인물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런 위대한 인간에게는 보편과 특수, 동작과 정지가 집약되어 나타난다. 그들은 국가 종교 문화 사회의 위기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기존 것과 새로운 것을 뒤섞어 하나로 만든다.

1. 로마 시대의 변호사
2. 一石二鳥
3. 갈리아 전쟁기
4. 자연에의 순응
5. 전투의 승패와 병력의 수
6. 미끼 작전

1. 로마시대의 변호사

카이사르는 23세때 변호사로 출세하려는 생각을 품었다. 로마의 변호사는 변호만 하는 게 아니라 검사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유력자나 저명인사를 고발하여 승소라도 하면 당장 명성이 높아지니까 변호사는 정계 진출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변호사로서 피고를 변론하든 아니면 고발을 하든 오라토르(웅변가)답게 배심원을 설득할 수 있는 변론술이 필요했다. 기원전 1세기 당시의 로마 법정에서는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아시아(소아시아 페르가몬 왕국에서 유래)식의 변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변호사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키케로가 창시한 변론술은 군더더기는 생략하고 핵심만 강조하는 아테네 스타일과 아시아식을 절충한 것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성문을 돌파하여 상대의 급소를 찌르기보다는 우선 성벽 바깥의 해자부터 메우고 마지막에는 듣는 이들의 인정에 호소함으로써 정상참작을 얻어내는 것이 키케로의 법정 전술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기질상 단도직입적으로 문제점을 찌르는 것을 즐겨 하고 정상참작을 호소하는 따위는 죽어도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변호사로서 참담한 실패를 맛보게 되어 호르텐시우스나 키케로처럼 변호사로 성공하여 부자가 되고 정계에 진출한다는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 一石二鳥

카이사르는 어떤 일을 할 때 한 가지 목적만 가지고 추진하지 않았다. 공공의 이익, 타인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개인적인 이익과 결부시켰다. 남을 이롭게 해야만 비로소 개인의 이익을 충분히 추구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40세가 되어서야 출세한 대기만성형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가 처한 시대상황을 꿰뚫어 보았다. 무엇보다도 공화정을 이끌어 온 원로원 계급이 동맥경화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초기 공화정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로마의 통치 영역이 전세계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새 질서 확립이라는 카이사르의 국가 개혁은 기원전 60년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정치실세들의 '정상회담'격인 삼두정치를 수립하였을 때 이미 시작되어 그가 폼페이우스를 제거하였을 때 사실상 완성되었다.

3. 갈리아 전쟁기

카이사르는 동시대의 로마인들에게 자신의 업적을 평가받기 위해 "갈리아 전쟁기"를 썼다.
근대 유럽의 기초를 형성한 갈리아 전쟁을 서술할 때 카이사르의 저서를 참고하지 않고 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만큼 객관성을 인정받는 기본사료라는 뜻이다. 카이사르의 문체는 간결하고 명석하고 세련된 우아함을 지녔다는 점에서 단연 뛰어났다.

그의 전쟁기는 머리말도 도입부도 없이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진실로 귀족적인 정신의 소유자로서 키케로의 말처럼 '적나라하고 순수한 문체'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갈리아의 문제점이나 중요성을 논할 때 사족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당시 레만호 동쪽에 거주하던 헬베티(스위스)족은 계속된 게르만족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서쪽 브르타뉴 지방으로 집단이주를 계획하고 있었다. 헬베티 족장이 30만명이 넘는 부족의 이동을 허가해 줄 것을 로마 속주 총독에게 요청하면서 갈리아 지방에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이 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라인강을 사이에 두고 게르만인과 갈리아인이 다투어 온 세계사를 살펴보면 카이사르의 역사인식은 탁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평정사업이 7년째에 이르렀다. 카이사르가 알프스 너머의 이탈리아 북부에 머무르고 있는 틈을 타 아르베르니아 족장의 아들인 베르킨게토릭스라는 특출한 젊은이가 갈리아의 모든 부족에게 로마에 대해 총궐기할 것을 촉구했다. 카이사르는 즉각 방어체제를 구축하고 기병대만 이끌고 눈 덮인 산맥을 넘는 모험을 감행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의 10개 군단에 대항하여 그 10배나 되는 병력을 갈리아 부족들로부터 차출했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로마에 우호적인 부족을 공격하여 카이사르가 우호 부족을 모른 체했다는 선무공작을 펴는 한편 식량을 무기로 삼아 로마군을 적지에 고립시키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전쟁에서는 계속 주도권을 잡는 쪽이 이기게 마련이다.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의 움직임을 알자마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보다는 나가서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젊은 갈리아 총사령관의 의도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로마의 군사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부르주 공성에 성공한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의 조국 아르베르니아의 수도 게르고비아를 다음 목표로 정했다. 그러나 갈리아의 젊은 지도자가 카이사르를 맞아 싸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까닭에 카이사르는 공략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이사르로 하여금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몰아넣은 것도 분명한 승리였다. 이 소식은 당장 갈리아 전역에 퍼졌다. 도처에서 갈리아 인들이 로마군에 대항했다.

카이사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만약 베르킨게토릭스의 초토화 작전이 완전히 실행되었다면 군량 보급이 여의치 않게 된 로마군은 프로빈키아 속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갈리아의 지도자는 9만명의 보병과 1만 6천기의 기병, 예비병력 30만을 배경으로 퇴각하는 카이사르군을 치기로 하고 평지에서의 회전을 감행했다. 전술의 묘를 다투는 회전에서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의 적수가 못되었다. 사방에서 포위하고 세 방향에서 공격했는데도 또한 우세한 갈리아 기병을 모두 투입했는데도 강 바로 건너편에서 베르킨게토릭스가 빤히 지켜보는 앞에서 카이사르는 세 방향의 적을 모두 무찔러 버렸다.

갈리아 보병은 참전조차 못한 채 고지대에 있는 갈리아인들의 聖地 알레시아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적이 틀어박힌 알레시아를 본 순간 카이사르는 이길 수 있다고 확신을 한 것같다. 외부에서 지원군이 도착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농성군과 구원군을 양면으로 맞아 싸울 수 있는 포위망 겸 방어망의 구축에 착수했다.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은 대번에 공병으로 탈바꿈하여 안쪽 16.5km, 바깥쪽 21km에 이르는 매우 치밀하고 효과적인 진지 방책을 건설했다.(나폴레옹 3세때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확인).

마침내 기원전 52년 9월 20일 25만명의 보병과 8천기의 기병으로 구성된 구원군이 도착했다. 카이사르는 5만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안과 밖을 합쳐 34만명의 적과 싸우게 되었다. 숫적으로는 비교조차 안되었지만 전투는 오케스트라 연주회와 비슷한 게 아닌가 싶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70퍼센트 정도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나머지 30퍼센트는 무대에 올라간 뒤의 성과로 정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전투도 연주와 비슷해서 오랜 준비를 거친 끝에 단 몇 시간으로 승부가 결판난다.

갈리아군은 일차 기병전에서 열세에 놓였다. 보병도 방벽 바깥쪽을 몇 겹씩 둘러싸고 있는 장애물 때문에 좀처럼 카이사르군에 접근할 수 없었다. 이틀에 걸친 공격이 성과가 없자 갈리아군은 로마군의 취약점을 간파하고 이 지점에 정예병력 6만명을 모두 투입했다. 카이사르도 "지금까지 치른 그 모든 전투의 성과가 오늘의 이 한판 싸움에 달려 있다"며 장병들을 격려했다. 마지막 순간 카이사르는 기병대로 하여금 배후에서 협공하도록 지시하고 백병전을 벌였다. 로마군 기병대가 갈리아군의 배후에 모습을 나타내는 순간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앞뒤에서 협공 당하게 된 갈리아군에게는 이제 더 이상 6만명의 위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끄는 농성군도 눈앞에서 벌어진 완패에 기가 꺾여 성안으로 돌아가 버렸다. 젊은 갈리아 총사령관은 자진해서 포로의 몸이 되었다.

4. 자연에의 순응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는 그리스로 도주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기 전에 배후의 안전을 도모해야 했다. 카이사르는 우선 폼페이우스 휘하의 세 장수가 지키는 에스파냐의 평정에 나섰다.

마르세유 주민의 저항을 물리친 후 에스파냐로 진격하였으나 6개 군단 2만 7천명의 중무장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린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 진영에서는 5개 군단 3만명의 중무장 보병과 현지 병력 4만 8천명, 합계 7만 8천명의 보병과 기병 5천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사르 군대가 적진 앞에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한 참호 파기 공사를 시작했을 때 때아닌 폭우가 쏟아지고 강에는 탁류가 넘쳐흘렀다. 오히려 카이사르의 보병 부대가 보급이 끊겨 병사들이 굶주리는 판국이 되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폼페이우스 진영에서는 환성을 질렀다.
"카이사르, 출구가 없는 상태. 싸움은 우리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라는 급보를 폼페이우스에게 보냈다. 그때까지 중립을 가장하고 있던 키케로도 이 보고에 고무되어 폼페이우스에게 가기로 결정했다.

카이사르는 탁류가 소용돌이치는 강에 배를 연결한 다리를 놓아 일단 고립상태를 면했다. 그리고 자연에 맞서서 다리를 놓는 고생을 계속하기보다는 자연의 추세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사기가 오른 병사들은 총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새로운 토목공사에 착수했다. 그것은 운하를 파는 공사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개를 파 카이사르 진영을 위기에 빠뜨린 강의 물길을 바꾸고 적진을 고립시키는 효과를 노렸다. 카이사르 진영의 군사행동이 자유로워진 반면 폼페이우스 진영에서는 보급로가 차단되면서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원주민 참가병들의 탈영이 시작되었다. 결국 폼페이우스 군대는 남쪽으로 철군하기로 결정했다. 카이사르 군대는 추격전을 벌이기 위해 도하작전을 감행할 때 일대 묘기를 연출했다. 강물 속에 기병을 두 줄로 늘어 세우고 보병들이 기병 대열 사이를 지나 강을 건너도록 한 것이다. 상류쪽에 서 있는 말은 물살을 누그러뜨리고 하류쪽에 서 있는 말은 보병이 강물에 휩쓸려 가는 것을 막는 울타리 구실을 했다. 이 덕택에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무사히 도강을 끝마쳤다.

5. 전투의 승패와 병력의 수

전투의 승패는 병력의 수에 달려 있지 않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격돌을 앞두고 두 사람의 조건을 정리해 보면 우선 총사령관의 나이는 58세와 52세로 거의 대등하였다. 그러나 양측의 육상 전력은 10 대 3이었고 해상 전력은 10 대 2로 차이가 났다. 자금력도 폼페이우스가 10 대 2 정도로 우세했다.

다만 병사들의 숙련도는 2 대 8로 전투 경험이 많은 카이사르 군대가 크게 앞섰다. 귀족 자제들인 상급 지휘관은 8 대 2로 폼페이우스가 우세했지만 백인대장인 중하급 지휘관은 2 대 10으로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활용하는 총사령관의 역량의 차가 결국 그리스 파르살로스에서 벌어진 대회전의 승부를 결정지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술의 요체는 적의 배후로 우회하여 포위 공격하는 것 한 가지이다. 기원전 333년 이수스 평원에서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그리스 연합군(중무장 보병 3만 1천, 기병 5천기)과 다리우스 왕이 이끄는 페르시아군(기병 1만 포함 15만 대군)이 회전을 벌였다. 나이 23세의 알렉산드로스 왕은 우익에 배치한 기병 5천기의 선두에 서서 적진 좌익을 지키는 기병을 먼저 격파하고 곧이어 다리우스 왕이 지휘하는 적진 중앙을 배후에서 공격했다. 그리고 적의 본대가 무너지자마자 쉴 사이도 없이 우익의 배후로 우회하여 포위 공격하는 전법으로 완승을 거두었다.

기원전 216년 이탈리아 남부의 칸나 평원에서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보병 4만, 기병 1만)은 최정예 로마군(보병 8만, 기병 7천 2백기)을 맞아 기병을 좌우익으로 분산 배치하고 기병이 로마군의 본대 뒤로 우회할 때까지 그와 함께 알프스 산맥을 넘은 심복 부대와 함께 로마군의 본대에 맞섰다. 결과는 로마군이 전사자 6만에 포로 8천의 피해를 입은 반면 한니발이 치른 희생은 5천 5백명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14년후인 202년 튀니지 중부에 있는 자마 평원에서는 로마의 젊은 장군 스키피오가 한니발에 도전했다. 한니발의 전력은 보병 4만 6천, 기병 4천기에 코끼리 부대 80마리가 가세했고, 스키피오의 로마군은 보병 3만 4천에 기병 6천기로 다소 열세였다. 스키피오는 코끼리의 공격을 교묘히 피한 다음 우세한 기병을 둘로 나누어 카르타고군의 배후로 우회 공격하게 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파르살로스에서 맞붙은 폼페이우스군(보병 4만 7천, 기병 7천기)과 카이사르군(보병 2만 2천, 기병 1천기)은 외형 면에서 비교도 되지 않았다. 폼페이우스는 작전회의 석상에서 전면전에 들어가기 전에 카이사르군을 궤멸시키겠다고 호언했다. 이수스 평원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용한 전술을 그대로 쓰면 기병대의 지휘를 카이사르 휘하의 맹장이었던 라비에누스가 맡고 있는 만큼 승리는 보장된 거나 다름없다고 보았다. 카이사르는 숫적으로 열세인 아군을 적진 가까이 접근시켜 패배의식을 없애 주는 한편 적의 진용을 직접 관찰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의 속셈을 간파했다.

카이사르의 전투 카이사르는 역전의 용사들인 중무장 보병을 신뢰하여 적군 보병을 좌우와 정면의 세 방향에서 포위 공격하는 임무를 맡겼다. 숫적으로 열세인 1천기의 기병은 적군 기병에 대항하는 수단으로만 투입하되 경무장 보병 4백명을 함께 편성하여 기병 뒤에 올라타거나 말에서 뛰어내리면서 기병과 행동을 같이하는 훈련을 시켰다. 또 전쟁경험이 풍부한 40대 전반의 노련한 병사들로 1개 군단의 별동대를 편성하여 적군 기병의 앞을 가로막게 했다.

즉 7천기의 맹공을 우선 1천기의 기병과 4백명의 경무장 보병 혼성부대가 상대하는 척하면서 피한다. 그러면 7천기의 기병은 카이사르군의 배후로 쉽게 우회할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2천명의 별동대 고참병이 적군 기병 앞을 가로막는다. 그것을 보자마자 1천 4백명의 혼성부대가 적군 기병 뒤로 돌아가 울타리 속으로 몰아넣는다. 카이사르는 이렇게 작전 지시를 내린 뒤 "승패는 오로지 별동대의 용기에 달려 있다"고 격려했다.

기원전 48년 8월 9일의 전투는 카이사르군의 돌격으로 시작되었다. 숫적 우세를 믿은 폼페이우스군은 전열을 무너뜨리지 않고 응전했다. 그와 동시에 라비에누스의 기병 7천기가 총공격을 감행했다. 작전대로 카이사르 군대는 적군 기병을 인간 울타리에 몰아넣어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어 폼페이우스군의 좌익을 협공했다.

폼페이우스군의 중앙과 우익은 카이사르의 노련한 병사들이 교대로 공격에 가담하여 무너뜨렸다. 그리스 한낮의 태양 아래 폼페이우스 군대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말을 채찍질하여 라리사로 달아나는 폼페이우스를 따른 것은 몇 기의 기병뿐이었다. 카이사르쪽 전사자는 200명에 불과했으나, 폼페이우스군의 전사자는 6천, 포로는 무려 2만 4천명에 달했다.

6. 미끼 작전

폼페이우스는 사라졌지만 그의 잔당은 북아프리카에 건재하여 언제 카이사르의 배후를 공격해 올지 몰랐다. 더욱이 그들은 기원전 49년 8월 카이사르의 대리인이었던 쿠리오 휘하의 2만 장병을 몰살시킨 장본인들이었다.

카이사르는 부하들의 집결을 기다리지 않고 1만8천명의 보병과 2천기의 기병만 거느리고 보병 6만, 기병 1만 5천, 코끼리 120마리가 기다리고 있는 북아프리카로 떠났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군과 동맹관계에 있는 누미디아의 이웃 나라인 마우리타니아를 회유하여 누미디아 영토를 침공케 하여 누미디아왕 유바의 행동을 견제했다. 그리고 코끼리를 조달하여 코끼리를 상대로 싸우는 훈련을 시켰다. 남은 것은 폼페이우스군을 유인하여 결전을 치르는 일이었다.

군대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군의 전략적 요충인 탑수스를 점찍었다. 기원전 46년 4월 6일 카이사르는 탑수스성을 공격하는 체 하면서 적군이 병력을 양분하여 교범대로 두 개밖에 없는 통로를 봉쇄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카이사르군이 탑수스를 공격하는 것은 조그만 성을 차지하려는 게 아니고 말하자면 미끼를 던진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누미디아 군대가 응원하러 오기 전에 탑수스를 지키러 오는 스키피오 군대와 승부를 결정지어야 했다. 그래서 정석을 어기고 중앙에 기병을 배치하여 보병으로 편성된 적진 중앙을 돌파 양분한 다음 적의 우익과 좌익의 배후로 돌아가게 하였다. 적의 좌우익에 대한 정면공격은 고참병들이 맡고 코끼리는 전담부대가 처리하도록 했다.

그 결과 상처를 입은 코끼리 떼가 아군 병사를 짓밟으며 달아나 버리고 라비에누스가 지휘하는 기병대도 앞쪽은 카이사르의 고참병, 뒤쪽은 기병에 포위되고 말았다.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3만 보병은 1만 전사자를 남기고 사방팔방으로 뿔뿔이 패주했다. 한나절도 지나기 전에 회전이 결판나자 카이사르는 진영지에도 들어가지 않고 탑수스 공격을 재개할 생각도 안하고 곧장 누미디아 왕 유바의 진영으로 향했다.

누미디아군은 아무도 카이사르군을 맞아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줄행랑을 쳤다. 누미디아 왕 유바는 자마에서 카이사르와 싸울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자마 주민들이 성문을 닫아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유바는 동행한 폼페이우스파 장수와 동시에 칼을 휘둘러 동반 자살했다. 폼페이우스군의 북아프리카 본거지였던 우티카를 지키고 있던 小카토는 4월 12일 항전을 포기하고 가족은 카이사르에게 보낸 후 자결하고 말았다.

가족을 카이사르에게 부탁하면서 스스로는 용서받기를 거부한 처사는 분명히 모순이지만 후대에 이르러 카토의 자결은 권력에 대한 자유의 저항으로 미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