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철학자 에릭 호퍼의 자서전

Vagabond Philosopher Eric Hoffer 2004년 여름 10년 만에 찾아온 무더위 속에 어디 여행갈 엄두도 못 냈다. 그 대신 책을 읽으며 피서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고른 책이 미국의 "떠돌이 철학자"라고 불렸던 에릭 호퍼(1902-1983)가 쓴 자서전(Truth Imagined, 이다미디어 2003)이었다. 독학으로 성취한 그의 사유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는 것은 어느 명산에 다녀온 것보다도 보람있게 생각되었다.
짤막짤막한 에피소드 중심의 그의 회고담 속에는 진실과 고민이 엿보였다. 그의 간결한 문체도 인상적이었지만, 평범해 보이는 사실을 그처럼 정확한 개념으로 서술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사유하며 집필하는가를 보여주었다.

진즉부터 에릭 호퍼의 짧막한 경구(aphorism)를 대하였을 때마다 그의 책을 한 번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에릭 호퍼는 자유(freedom)란 "어느 사람에게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지만, 대부분에게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그의 글을 읽으면서 떠오른 상념들이다. 제목의 ( )안 숫자는 원저의 에피소드 번호를 가리킨다.

* 실명과 개안(1)
나는 일곱 살 때 시력을 잃었다. 그것은 다섯 살 때 어머니와 내가 계단에서 떨어진 사고 때문이었는데, 어머니는 결국 회복되지 못하고 2년 뒤에 돌아가셨다. 나는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이후 뒤이어 기억마저 잃어버렸다.
열다섯 살 때 나는 시력을 되찾았다. 돌연한 시력의 상실과 회복에 나는 별 어려움 없이 익숙해질 수 있었다. 나는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읽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시력이 돌아오자 거침없이 읽을 수 있었다. 시력의 회복이 일시적인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눈을 혹사시키는 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눈이 멀기 전에 읽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읽고 싶었던 것이다.

⇒ 에릭 호퍼가 어려서 실명한 것은 계단에서 떨어졌을 때 그 충격으로 척추가 뒤틀려 시신경이 억눌렸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다행히 시신경은 손상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신체가 무럭무럭 자라면서 (사진을 보면 그는 아주 거구이다) 열다섯 살 때 기적같이 뒤틀려 있던 척추가 바로잡히자 시신경이 되살아나 시력을 회복한 것이다.
지금 에릭 호퍼의 문제를 의학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방학중에 압구정동에 있는 [한완석 골격교정원]에 다니면서 건강상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0여년 전 나는 디스크로 병원에 입원까지 했는데 그 때의 병명은 퇴행성 요추간판 협착증이었다. 그 후 요통이 나은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요추가 내려앉으면서 신장도 2cm 줄었지만 아랫배가 나오고 흉추 부위에 변행이 생겨 자주 목소리가 변하고 마른기침이 나오는 것이었다. 두 다리의 길이에도 변형이 생겨 왼쪽 발목이 시큰거리는 증세가 나타났다.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신체의 변화는 모두 디스크와 관련이 있었다. 집중적으로 척추교정을 받은 결과 마른기침은 첫날 사라졌고 나머지 증상도 크게 호전되었다.
나보다 더 많은 골격교정의 혜택을 받은 사람은 약사인 대전 동생과 우리 집사람, 큰아이였다. 치료원리는 카이로프랙틱(chiropractic)보다 한 단계 앞섰다고 생각된다. 뼈대가 바로 서고 인대가 제자리에 있어야 혈액순환이 원활해지고 있던 병도 자연히 사라진다는 원리이다. 병명도 확실치 않았던 동생의 경우 이 같은 치료원리에 따라 더 이상 진통제를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증상이 호전되었다.

*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5)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는 음울한 인상을 받았지만 다시 읽었을 때는 음울한 에피소드들에도 환희의 저류가 스며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죄와 벌]을 다시 읽으면서 막연하게나마 놀라운 구성의 예술을 의식하게 되었다. 별개의 수많은 디테일들이 하나의 기념비적인 전체로 고양되는 높은 천장의 대형 건축물 같은 세계와 살아 있는 존재를 창조해 내는 솜씨는 얼마나 놀라운가. 화려한 탐색과 서술은 별로 없다. 인물들은 자신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생명을 얻는다. 몇 마디의 대사들이 나오면 우리 주변의 대다수 사람들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물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등장 인물들이 우리 주변의 친지나 친구보다 더 친숙함을 알 수 있다.
한편 그들이 미국은 물론 러시아를 포함해 어느 곳의 사람과도 달리 기괴하고 터무니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성의 본질이 집약된 존재이며, 상식적인 궤도에서 벗어나 있고, 이국적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가슴과 오성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극단적인 인물들에게는 장엄함이 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인간의 핵심적 실체에서 나오는 파열음을 들려주고, 일상적 실존의 불가사의한 심연과 익숙한 외관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보여준다.

⇒ 에릭호퍼가 시력을 회복한 다음 처음 손에 넣은 책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였다. 실명 상태의 그는 백치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이 소설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아예 외울 정도로 탐독했다고 한다. 그가 떠돌이 생활을 하고 행상, 막노동꾼, 식당 웨이터, 사금채취공, 부두노동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한 것은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처럼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하며 그 스스로 운명지운 감이 있다.

* 창조적 환경(10)
산디에고 부근 엘센트로의 감옥 비슷한 임시수용소에 머물게 된 것이 나의 모든 사고를 물들이게 된 계기가 되고, 다음 50년 동안 내가 쓰게 될 모든 글의 씨앗을 키우게 하는 계기가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개체가 자신의 재능을 인식하고 그것을 키워낼 수 있었던 창조적 환경에 관할 글은 수없이 많다. 예루살렘과 아테네, 르네상스의 플로렌스, 암스테르담, 파리, 런던 같은 도시는 위대한 작가와 예술가, 과학자, 철학자들의 온상이었다. 몇몇 큰 대학은 창조적 작업의 중심이었다.
차르 치하의 러시아는 위대한 소설가와 과학자를 배출했지만, 레닌 치하의 러시아는 지적으로는 불모지였다. 독일은 위대한 저작과 음악을 산출한 온상으로, 독일 제국의 시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동양은 수천 년 동안 정체되어 있었지만 서양은 중세 말 이후에 보기 드문 창조성의 경이적인 분출을 눈앞에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 위에 세운 어떤 법칙이나 일반적인 정의로도 엘센트로의 떠돌이 노동자 수용소가 사상가와 저술가로서의 나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이 된다는 것을 설명해 줄 수가 없을 것이다.

⇒ 그러므로 인간은 수수께끼의 존재이다. 인간의 위대성은 수학적인 계산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데서 종종 발견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자기 주변에 실험실과 같은 환경을 만들어놓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분개한다. 그러나 에릭호퍼의 사유와 저작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속에 소나무의 옹이 같은 게 여기저기 박혀 있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존재일까. 곰곰 생각해보니 내가 뭔가 내세울 만한 게 있다면 그것은 우리나라 최고의 일류대학에서 싹튼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잇따른 고시 실패로 좌절감 속에 들어간 첫 직장에서 나의 모든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고 무엇이든 할 용기를 얻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 장애인, 적응 불능자들(10)
엘센트로 부랑자 수용소에는 20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가 떠돌이 노동자가 된 이후에 함께 일하고 떠돈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 . 어느 날 어느 온화해 보이는 나이 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가 체커 게임을 하자고 했다. 그 때 체커 판 위에 말들을 정렬하다가 나는 불구가 된 그의 오른손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길이로 잘려져 뿔 모양의 세 손가락만 남은 모습이 마치 닭발 같아 보였다. 내 눈앞에 그가 잘린 손을 내보일 때까지 내가 그걸 알아채지 못한 것에 대해 부아가 치밀었다.
그때부터 나는 주변 사람들의 손을 주의 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하나 걸러 한 명씩 어느 부분이건 상하지 않은 이가 없는 것 같았다. 팔이 하나뿐인 사람도 있었다. 다리를 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젊은 친구는 목발을 하고 있었다. 다리를 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젊은 친구는 목발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의 일부를 떼어주고 기계의 날카로운 이빨로부터 간신히 벗어난 것 같았다. 이런 표현이 과장된 것임은 나도 안다. 그래서 나는 식사 시간에 사람들이 운동장에 모여 줄어 서 있을 때 장애인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나는 곧 숫자를 헤아리는 것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감지했다. 200명 중 70명만이 겉보기에 멀쩡하였다. 나의 결론은 통계적 추론을 뛰어넘었다. 수용소의 우리는 곧 인간 쓰레깃더미였던 것이다.

⇒ 병원 대기실에 가면 세상에는 병든 사람들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병원이나 수용소나 노숙자들이 우글거리는 서울역 앞 지하도나 인생살이의 축소판이라면 어디 육신이든 정신이든 장애가 없고 아픈 데 없는 사람이 어찌 있으랴!

* 개척자로서의 떠돌이?(10)
개척자들이 누구던가? 집을 떠나 황야로 들어간 이들이 누구이던가? 안락한 곳을 떠나 일부러 고난을 찾아가는 인간은 드물다. 성공을 거둔 사람은 제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보통이다. 능력은 있지만 너무 충동적이어서 일상의 고된 노동을 견디어내지 못하는 사람들, 술이나 도박, 여자 등 주색잡기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들, 법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와 전과자 등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험을 찾아가며 즐기는 청년과 중년이 드물게 있을 것이다. 지름 떠돌이 노동자와 부랑자 대열에 합류해 줄을 설 것 같은 타입의 사람들이 이전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개척자의 대다수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나라를 세울 때에도 거의 예외 없이 그랬을 것이다. 전과자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착 과정에서 선도적 역할을 했다. 러시아의 유배자와 죄수들은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미국에서도 개척 시대 초기와 그 이후에 정착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수가 실패자나 도망자, 흉악범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종교적 열정에 자극받은 개척자들뿐이었다.
떠돌이와 개척자 사이에 그런 친족적인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떠돌이나 개척자를 서로 연관짓지 않고 표면적으로 관찰해 왔던 내용과 그런 사실이 내 머리 속에 뒤엉켜 있었다. 그로 인해 나는 그 때까지는 아무 관심도 갖지 않았던 주제들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 텍사스주 샌앤토니오 부근의 리오브라보 요새를 찾아갔을 때 나는 존 웨인의 영화 장면을 연상하였다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요새라는 게 다 쓰러져 가는(보존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당시 멕시코 군대의 집중포격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흙집이고, 이 곳에서 수십명의 영웅들이 모두 산화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애국자(Patriots)라고 칭송을 받는 사람들은 미국과 유럽 각처에서 텍사스주 남단까지 흘러 온 떠돌이 불한당들이었다. 그네들에게도 멕시코 산타나 장군의 군대의 침공에 죽음으로 맞서는 애국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5·18 광주사태 때 일사불란하게 시민군을 지휘했던 사람들이 트럭운전기사, 중국집 배달부였다는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