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 관한 오해와 진실

우리나라에 '세계화'의 열풍이 불면서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다니고 있다. 특히 젊은 대학생들은 방학중의 배낭여행을 마치 필수과목의 하나로 여기는 듯하다. 유럽 여행에는 네덜란드의 암스텔담도 반드시 포함된다. 대체로 영국에서 유럽 대륙으로 이동하면서, 아니면 독일에서 프랑스나 영국으로 가면서 잠깐 들르는 도시로 인식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이 암스텔담에 가서 보고 느낀 것을 들어 보면 부정적인 것이 많다. "그림엽서나 투어 가이드북에 있는 것과는 생판 다르다"거나 심지어는 "Crazy city!"라고 고개를 흔드는 서양 청년도 보았다. 그러나 암스텔담에서 1년 살았던 나로서는 그들의 몰이해가 안타까울 때가 많다. 여행자들이 불평하는 소리부터 들어보자.

네덜란드의 평지

	    도시가 무질서하다

	    곳곳에 마리화나, 섹스숍이 넘친다

	    네덜란드에는 풍차가 없다

	    안네의 집에는 볼거리가 없다

	    네덜란드는 당일 관광으로 충분하다

	    화란은 작은 나라이다

	    화란은 '짠' 나라이다

	    화란은 먼 나라이다

	    히딩크 감독은 우리의 희망이다

도시가 무질서하다

기차로 여행하는 관광객이 처음 암스텔담 중앙역(Amsterdam Central Station)에 내리면 역사의 규모가 크고 지하상가와 통로가 너무 혼잡하다는 데 놀란다. 금방 이상한 생김새의 젊은이가 다가와 횡포를 부릴 것만 같다. 암스텔담에도 흑인이 많은 편이지만 아프리카인보다는 사우스 아메리칸이 더 많다. 이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수리남,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의 식민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중앙역을 벗어나 왕궁이 있는 담 광장 쪽으로 걸어갈 때에도 도처에 히피 차림의 젊은이가 어슬렁거린다. 더욱이 네덜란드가 마약을 자유화한 나라인 점을 상기하면 소름이 돋는다. 대로변에 간이 화장실이 있어서 젊은 남자들은 지나가는 행인들을 의식하지 않고 소변을 본다. 그러나 암스텔담은 중세 때부터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는 신화를 이룩하였다. 그러한 수백 년의 전통이 암스텔담을, 네덜란드를 공공연히 마약을 할 수 있는 곳, 섹스 쇼핑이 자유로운 곳, 동성애자가 차별받지 않는 곳, 안락사가 합법적인 곳으로 만들어 놓았다. 많은 나라가 이들을 규제하고 있지만 세계 어느 한 곳에 해방구가 있다는 생각만 하여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지 않은가!

암스텔담은 거리마다 왕복 전차선로가 있고 곳곳에 전차 정류장이 있어 도로가 좁은 편이다. 그러나 세계 어느 도시보다 암스텔담은 행인이 다니는 보도가 넓고 자전거 전용도로까지 있다. 전차는 시내 어느 곳이든 저렴한 요금으로 신속하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해준다. 도심의 운하도 물이 더럽지만 운하를 이용한 물류가 편리하여 17-18세기 세계 무역강국으로 발돋움했던 사실을 기억하면 자연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그들의 지혜가 존경스럽다. 지금도 운하변 건물은 운하 쪽으로 약간 경사져 있는데 도르레를 이용하여 물건을 오르내리기에 매우 편리하게 되어 있다.

곳곳에 마리화나, 섹스숍이 넘친다

암스텔담의 상징 세계 어느 나라나 마약과 매매춘은 단속대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마리화나에 단 한 번만 손을 대도 엄벌에 처해진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살다가 암스텔담에 오면 누구나 다 마약을 하고 자유로운 섹스를 즐기는 것 같다. 중앙역 부근 암스텔 강변의 홍등을 켜 놓은 쇼윈도우 안에서는 비키니 차림의 여자가 지나가는 젊은 남자들에게 윙크를 한다. 시내 곳곳의 마리화나 카페, 섹스숍을 기웃거리다 보면 사람들이 다 헬레레해 보인다. 심지어는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경계봉도 남성의 심볼 모양을 하고 있다. 요상한 모양의 경계봉 위에 청바지를 입고 걸터앉아 있는 젊은 여자의 모습을 그림엽서로 만들어 놓았다.

필자가 오랫동안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런 것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외국 관광객들이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조용히 장사만 할 뿐이다.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때 종교적인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처럼 네덜란드 사람들에게서는 개혁교회(Reformist Church)의 분위기가 풍긴다.

필자가 암스텔담에서 학교에 다닐 때 한 블록만 가도 섹스숍이 즐비하였는데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누가 금지할 때 호기심이 생기는 법이지, 언제든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하면 돈이 아까운 생각부터 드는 것이다.

일부 네덜란드 청소년들이 축구 경기장에서 종종 난동을 부리는 등 과격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1998년 마르세이유에서 열렸던 월드컵 축구 한국-화란 전을 앞두고 한국의 응원단은 프랑스 경찰에 보호를 요청하기까지 했다), 유럽이고 중남미고 스포츠 매니아 중에는 훌리건이 있게 마련이다. 네덜란드 청소년들만이 마약에 취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네덜란드에는 풍차가 없다

풍차마을 널리 알려진 것처럼 네덜란드는 국토의 3분의 1이 해수면 아래라서 물막이와 물퍼내기가 생존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네덜란드에는 편서풍이 불기 때문에 풍차를 만들어 그 힘으로 배수를 하고 방아를 찧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기모터가 훨씬 효율적이므로 풍차는 관광단지에 일부 남겨놓고 있을 뿐이다.

암스텔담 북쪽 교외 잔담 부근 잔세스칸스에도 관광객들을 위한 풍차가 몇 기 전시되어 있다. 네덜란드 지명에 '담'이 붙은 곳을 가보면 댐을 쌓아 국토를 넓혔던 네덜란드 사람들의 피와 땀이 얼룩져 있기에 숙연해진다. 조상들이 고생한 보람이 있어 후세 사람들이 편안히 먹고산다면 그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안네의 집에는 볼거리가 없다

암스텔담 관광에서 '안네의 집' 방문은 유람선 선유(canal cruise)만큼 필견의 코스이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장사진 속에서 참을성 있게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 유태인 단체에서 걷는 입장료도 적지 않다. 그러고 나서 앞사람을 따라가 미로와 같은 계단을 몇 번 오르내리다 보면 디지탈 동영상 감상실, 그리고 나가는 문이 나온다. 그러니 볼거리가 없다고 불평할 수밖에.
그러나 창고 같은 외양의 이 집 다락방에서 십대의 안네가 불안에 떨며 사춘기의 꿈을 펼쳤던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곳은 현장체험을 하기에는 수많은 관광객을 위하여 너무나 개조가 되어 있기에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필자는 안네의 집 바로 옆에 웨스트처치가 있는 것을 보고 더욱 놀랍고 부끄러웠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지만 안네의 가족에게는 결코 구원의 종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네덜란드는 당일 관광으로 충분하다

네덜란드를 찾는 관광객들은 암스텔담 몇 곳을 둘러보는 것으로 관광을 마치고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돌린다. 그러나 암스텔담과 네덜란드의 참 모습을 보려면 다음 몇 곳은 반드시 여정에 포함시켜야 한다.

Van Goch Museum
고흐는 일생을 불우하게 살았다. 그러나 세계의 어느 화가도 사후에 고흐만큼 새롭게 평가를 받은 사람도 드물다. 그가 남긴 대부분의 그림과 편지가 미술관에 체계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그의 작품이 생전에 거의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보존된 작품을 네덜란드 정부가 그의 유족으로부터 영구 임대를 받아 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흐의 작품을 바라볼 때마다 그의 생전의 고뇌와 고통과 이를 극복하려는 젊은 예술가의 투혼이 느껴진다.

Rotterdam
유럽의 제일가는 물류기지로서 유럽에서 팔리는 한국 상품들이 이 항구에 양륙되고 보관된다. 유로마스트 타워에도 올라가볼 만하다.
Den Haag
네덜란드의 수도이자 행정중심지이다. 이 준 열사의 기념관, 문제의 평화회담이 열렸던 평화궁이 있고, 교외에는 미니어처 도시인 마두로담이 있다.

Maastricht
일찍이 로마 군대가 개척한 벨기에 접경 도시로 얕으막한 구릉지대에 있다. 1991년 12월 유럽 공동체(EC) 정상이 모여 경제적으로는 통화동맹(EMS), 정치적으로는 연합국(European Union)을 구성하기로 하는 조약을 체결한 곳으로 유명하다.
Keukenhof
꽃을 사랑한 공작 부인의 정원에서 유래하였다는데,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튤립꽃들로 가꾸어진 옥외 정원이다. 주변에 대단위 화훼단지가 있으며 해마다 4월 하순, 5월초에 걸쳐 튤립 축제가 열린다.

압슬라우트다이크 기념비 Alkmaar
화란의 명물 둥근 코티지 치즈 시장이 여름철 매주 금요일 아침 10시부터 정오까지 경연대회 비슷하게 열린다.
Afsluitdijk(대제방)
화란 사람들이 어떻게 바다를 막고 땅을 넓혔는지 견학할 수 있는 곳이다. 제방 중앙공원의 기념상을 보면 아줌마가 돌을 쌓고 있는 모습이다. 화란의 여성들은 지금도 산파를 불러다 집에서 아기를 낳을 정도로 강인하다.

화란은 작은 나라이다

네덜란드는 국토면적도 좁고 인구도 적은 나라이다. 그러나 이웃 벨기에, 룩셈부르그와 함께 유럽 통합(European integration) 운동을 벌이는 등 국제정치의 풍향을 좌우해온 나라이다. 암스텔담도 도심만 관광객들로 북적일 뿐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거리가 매우 한산하다. 집들도 좁은 화단이지만 예쁘게 가꿔놓았고 유리창문도 내부를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로 크다. 커튼은 차광이나 외부사람의 시선차단용이라기보다 거의 다 장식용이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인구밀도 세계 1위의 나라이다. 국토에 산지가 없고 대부분 평지라서 여유롭게 사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리고 네덜란드 사람들은 세계를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한다. 거리의 간판을 보아도 그만큼 역동적이다. 튤립 한 송이를 키울 때에도 세계에 내다 팔 생각부터 한다. 네덜란드는 비록 인구는 적어도 우리나라에 외국인투자를 많이 하는 나라로 손꼽힌다. 그 때문에 네덜란드 사람들은 영어를 화란어 못지 않게 잘 구사한다.

화란은 '짠' 나라이다

영어 사전을 보면 네덜란드를 뜻하는 'Dutch'에는 좋지 않은 표현이 많다. 각자 부담으로 회식을 하는 'Dutch treatment'만 해도 그렇지만, 잔소리 심한 사람을 일컫는 'Dutch Uncle',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위로하는 'Dutch condolence', 술김에 내는 용기라는 뜻의 'Dutch courage' 모두 한결같이 화란사람들이 까다롭고 째째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필자가 암스텔담에서 1년 가까이 생활하는 동안 이러한 선입견은 모두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관광객들 말고는 일상에서 접하는 화란 사람들은 매우 친절했고 자상했다. 오래 사귀고 보니 콧수염을 기른 화란 남자들은 한결 같이 재미있고 싱거운 사람들이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까다롭고 째째하다면 대외거래에서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위에서 소개한 영어 어휘는 모두 영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또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서는 독일(Deutch)을 '더치'라 부르기도 한다. 영국이 17세기까지 네덜란드와 해상권을 놓고 다투었던 것을 생각하면 영국 사람들이 얼마나 이웃 나라 화란 사람을 욕하였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화란은 먼 나라이다

지리적으로 네덜란드는 먼 곳에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눈이 파란 외국인으로서 친근하게 다가온 것은 화란의 뱃사람들이었다. 박연으로 이름을 바꾼 벨테브레, 동료들과 제주도에 표착하였다가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하여 표류기를 남긴 하멜 모두 화란사람들이었다. 그때 화란 선원 십여 명은 탈출에 가담하지 않고 이 땅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뼈를 묻었다.
[하멜 표류기]를 장편소설로 만든 강준식, "내가 사랑한 됴션", 웅진출판, 1994 참조.

구한말에 이준 열사가 평화회의에 참석했다가 분사한 곳도 네덜란드요, 6·25 동란 때 제일 먼저 군대를 보내온 나라도 네덜란드였다. 전쟁이 끝나고 버려진 고아들을 많이 입양시켜 데려간 나라도 네덜란드였다. 서울 거리 곳곳에 필립스, 하이네켄, KLM, ABN-AMRO, ING 등 네덜란드 기업의 간판과 상표가 눈에 많이 띈다. 월드컵 축구대표팀의 히딩크 감독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화란 사람이었다.

히딩크 감독 히딩크 전략은 우리의 희망이다

이것은 지금도 여진히 맞는 말이다.
2002년 월드컵에 대비하여 한국 축구대표팀이 특별 초빙한 외국 전문가가 네덜란드 출신 거스 히딩크 감독이었다. 그의 작전이 성공을 거두어 한국 축구팀이 월드컵 4강에 진출하였다. 히딩크가 이끄는 한국팀은 폴란드, 포르투갈, 이태리 등 유럽의 강호를 차례로 물리치고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2002년 6월 한국은 물론 교민들이 많이 사는 세계 주요 도시에서는 온통 '붉은 악마'(Be the Reds!)의 붉은 유니폼으로 물결쳤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네덜란드는 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히딩크는 우리 국민들에게 큰 교훈을 안겨줬다. 무슨 일이나 열정을 갖고 과학적인 훈련을 통하여 기초실력(fundamental)을 다지면서 연고(혈연, 지연, 학연)를 배제한 채 실력만으로 인재를 기용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월드컵 대회가 끝난 후 히딩크를 강제 귀화(?)시켜서라도 한국 축구의 장래를 맡겨야 한다는 팬들의 주장이 잇따랐다.

* 사진 출처 및 더 찾아볼 곳: 암스테르담 여행안내 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