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테오티와칸 유적 (테노치티틀란)

멕시코시티는 해발 2,200m로 멕시코 중앙계곡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1994년 봄 이곳을 찾을 때까지만 해도 우리보다 앞서 일찌기 60년대에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공해가 심하다는 것 외에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시내 곳곳에 세워진 각종 기념비와 대로변의 인물 조각상이 우리나라와는 색다른 풍경이었다. 시가지가 사람들과 차들로 몹시 붐비는 것이 서울과 비슷하였다. 그러나 멕시코시티가 500년전까지만 해도 '테노치티틀란'이란 이름으로 불리웠던, 호수 한가운데의 문명도시였다는 것은 진정 놀라운 발견이었다.

멕시코시티 관광은 과달루페 성당에서 시작하는 것이 순서이다. 어느 인디안 젊은이가 성모 마리아의 현현을 목격한 후 그 자리에 성당이 건립되었는데 (중앙제단 뒤에는 판초 위에 갈색의 마리아 모습이 아로새겨진 기적의 '후안 디에고의 외투'가 걸려 있다) 동정녀 마리아의 피부가 갈색인 점이 특이하였다. 멕시코 시민들이 즐겨 찾는 이곳은 바로 스페인 植民文化와 인디안 土着文化의 접점 역할을 해온 성스러운 장소였다. 식민당국으로서는 토착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는 좋은 장치였고, 인디안들에게는 자기네와 같은 갈색 피부에, 인디안 토착어를 말하는 동정녀 마리아가 병을 고쳐주고 마음을 위로해주는 인디안 古來의 수호신이나 다름없었다.

마리아가 현현한 장소에는 멕시코시티에서는 아주 귀한 물이 폭포를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념조각상의 마리아는 인디안 추장의 깃털처럼 後光이 뻗쳐 있는데 갈색 마리아 앞에는 스페인 신부가 서 있고 그 뒤에는 귀족과 백인 시민이 마리아를 쳐다보고 있었으며 아랫도리만 가린 인디오는 그가 맨처음 마리아를 뵈었음에도 뒤에서 머리를 조아린 채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그것은 멕시코의 사회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조각이었다. 식민시대의 멕시코에는 네 가지 계급이 있었다고 한다. 최상층에는 '페닌술라레'라 하여 스페인에서 파견된 왕족과 신부들이 멕시코의 정치 종교권력을 장악하였다. 그 밑의 '크리오요'는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이지만 멕시코에 이주한지 오래되어 정치권에서 배제된 채 경제를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다음은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메소티소'들로 이들은 교육이나 출세에 제한을 받고 크리오요에 고용되어 일했으며, 최하층은 소작농을 하거나 막노동을 제공하는 토착 인디오들이었다.

멕시코인들이 19세기초 유럽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운동을 벌인 것은 크리오요의 페닌술라레에 대한 반란이나 진배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지배계층은 인구비율로는 15%에 불과한 백인들로서 이들은 세습한 부를 배경으로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젊은 나이에 정부요직에 등용되고 있다. 그러나 인구의 과반수를 점하는 메소티소는 여전히 정치, 경제를 지배하는 백인들 밑에서 일하거나 자유업에 종사하고 있고, 인디오들은 도시나 농촌에서 절대 빈곤층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사정이 별로 달라지지 않고 있다. 비슷한 배경의 영화 "영혼의 집"이 백인과 인디오의 和解로 결말 지은 것은 픽션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1994년 신년 벽두에 멕시코 남부 치아파주에서 일어난 사파티스타 반란은 그 주축이 인디안 농민들로서 이들이 토지개혁과 정치개혁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멕시코가 당면한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치아파 叛軍이 내건 구호중의 하나는 "콜럼버스 이전의 전통문화를 회복하겠다"는 것이다. 멕시코의 지배계층은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음에도 멕시코 시민들은 차풀떼펙 공원내의 인류학 박물관에 전시된 콜럼버스 이전의 인디안 문명과 그 유물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박물관을 방문하고 테오티와칸 피라밋, 툴라의 유적을 돌아본 후 멕시코 중앙계곡에서 펼쳐졌던 장엄한 인류의 드라마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스페인 정복자(콩퀴스타도)들이 발달된 총포 화약무기를 가지고 멕시코 원주민들을 무력으로 정복하였지만 그들의 문명은 결코 얕볼 수 없는 위치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테오티와칸 피라밋 앞에서 필자 멕시코시티 북쪽 약 50Km 지점에 있는 테오티와칸은 BC2세기부터 AD7세기까지 존재한 神政 도시국가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AD350-650년에 걸쳐 번영의 절정에 달한 도시문명(그때 이미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을 건설하였다. 그런데 20만명 이상의 주민(당시 이만한 규모의 유럽 도시는 로마 뿐이었다)이 어느날 갑자기 20여기의 거대한 피라밋만 남겨놓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웃 부족의 침입, 내부의 반란, 식량 식수의 부족으로 인한 집단이주등 여러가지 說이 있지만 文字를 사용하지 않은 민족이었기에 그들의 흥망성쇠는 아직도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94년도 미국의 베스트셀러인 "천상의 예언"에 의하면 이들 마야족은 집단적으로 靈의 세계(?)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로부터 5백년후 아즈텍 인디안이 그 폐허를 발견하고 "이곳에서는 신들이 살았음에 틀림없다"고 믿고 해와 달을 주제로 한 神話의 무대로 삼았다.

그것보다도 테노치티틀란의 멸망사는 더욱 처절하였다. 1200년경 멕시코 중앙 계곡에 도착한 아즈텍족은 호수 위의 한 섬에서 神이 계시("독수리가 선인장 위에 앉아 있는 [멕시코 국기에 들어있는 문양] 곳에 도시를 세우면 세상을 다스리는 왕국이 될 것이다")한 땅을 발견하고 1345년 그 선인장이 서있던 자리에 神殿을 세우고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후 아즈텍인들은 호수 위의 섬을 중심으로 간척사업을 벌이는 한편 이웃 부족을 정복하여 공물을 거두고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다. 아즈텍 문명의 절정기에 그들의 석조건축과 정원조경은 같은 시대의 서구 문명을 훨씬 앞질러 있었다.

1519년 11월 스페인 코르테스 원정대가 멕시코에 상륙했을 때 아즈텍 조정에서는 항전론과 화친론이 팽팽히 맞섰다. 神政一致의 사회에서 절대적 권위를 가진 목테수마 황제 역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금은보화로 매수하여 스페인 군대를 돌려보낼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스페인 사람들의 '엘 도라도'(黃金의 나라) 환상을 더욱 부추길 뿐이었다.

결국 목테수마는 거대한 혜성을 목격한 터라 이상한 짐승(당시 멕시코에는 말이 없었다)을 타고 온 하얀 피부에 수염을 기른 코르테스를 '켓살코아틀'(아즈텍 전설에서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한 知識의 神)로 떠받들고자 했다. 탁월한 전략가인 목테수마는 수백 명에 불과한 코르테스 일행을 처치한다 해도 머지 않아 그 몇 배되는 군대가 쳐들어올 것으로 내다보았던 것이다.

테오티와칸 태양의 피라밋 그러나 숫적으로 열세인 스페인 군대가 궁정에 들어와 황제를 인질로 삼고 목테수마가 급사한 뒤 아즈텍 조정에서는 항전론이 우세하여 1521년 7월 1일 스페인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심야에 도성을 탈출할 수 밖에 없었다. 코르테스는 무력정복을 결심하고 아즈텍에 반감을 품은 주변의 인디안 부족을 규합하여 배를 건조하고 대포를 동원하여 테노치티틀란을 포위공격하였다.

당시 코르테스는 '도냐 마리나'라고 하는 인디안 공주를 통역으로 데리고 다녔는데, 코르테스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이 여자 덕분에 스페인 정복자들은 정보수집 판단에 있어 아즈텍인들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훗날 코르테스의 아들까지 낳은 이 여인 앞에서 아즈텍인들의 어림수가 통할 수 없었던 것이다.

1521년 8월 13일 아즈텍 전사들은 스페인 군대와 함께 건너온 천연두의 창궐, 식수·식량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젊은 황제(콰테목) 이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역부족인 아즈텍 군대는 마침내 패망하고 말았다. 테노치티틀란의 최후는 말 그대로 屍山血海를 방불케 하였다고 한다.

그후 스페인 정복자들은 산 사람의 심장을 제물로 바쳤던 아즈텍 신전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쓸만한 돌은 교회의 건축자재로 남겨놓고 부스러기는 호수를 메우는 데 쏟아부었다. 신전 벽면을 장식하였던, 한가운데 태양이 새겨진 솔라 칼렌다 스톤도 지하에 파묻히고 말았다. 이것은 2백년후에야 발굴되어 지금 인류학 박물관에서 지름 3.6m나 되는 웅자를 뽐내고 있다.

아즈텍 전사들의 결사항전에도 불구하고 찬란했던 아즈텍 문명은 마침내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지금도 공사를 하다 옛날 유적을 발견하고 발굴작업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소칼로(헌법) 광장 한 구석에서도 유적발굴 현장이 공개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