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일생을 회고하며

지난 9월 3일 한밤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故人의 생애를 돌이켜 보니 그 年代記는 우리나라가 봉건사회에서 민주사회로 발전하고, 또 식민지배하에서 독립을 맞고 同族相殘의 비극을 치른 후 정치적인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경제개발을 완수한 파란만장한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국제거래 견문기"에 추모사를 싣는 것도 우리 前世代의 전형적인 한국 여인의 일생을 돌아봄으로써 우리나라가 어떻게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발전했는지 생각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의 과실을 따먹고 자란 젊은 세대 특히 젊은 여성들은 감히 우리 어머니의 일생을 운위하기 힘들 것 같다. 어떻게 스물도 되기 전에 결혼을 하고 9남매를 낳아 기르며 쪼들리는 살림에 조카들까지 4-5명씩 거느릴 수 있었을까. 당시에는 보편적인 현상이었지만 오늘날의 核家族 시대에는 이혼사유가 되고도 남을 것 같다.
이러한 세대간의 격차는 비단 우리 경제와 사회가 발달한 때문인 것으로 치부해야만 할 것인가?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과 사고방식이 급격히 西歐化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영결식장에서 故人을 그대로 葬地로 보내기 안타까워, 비록 평범한 가정주부였음에도 故人의 經歷을 낭독하였다. 아울러 10년 전 아버지(朴萊玉)의 八旬 기념문집에 소개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부치신 편지글도 함께 전재한다.

故 殷成德 집사님의 약력

은성덕 님은 1916년 음력 9월 4일 殷致黃 님의 3남 2녀의 장녀로 태어나셔서 1934년 朴萊玉 님과 결혼하신 후 4남 5녀를 훌륭하게 키우셨으며, 1994년에는 회혼례를 올리시고 1996년에 혼자 되셨다가 사흘 전에 양력 기준으로 당신이 태어나신 9월 4일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天壽를 다하고 돌아가신 한 노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근대사를 살고 가신 한국 여인의 인생역정을 되돌아봄으로써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함입니다.

고인은 봉건주의의 잔재와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여자로 태어나신 까닭에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으실 수 없었으나, 당신의 공부에 대한 열성을 아홉 자녀에게 고루 베푸셨습니다.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도 자녀들이 한 번도 수업료를 못내 학교에서 쫓겨온 적이 없었으며 고인은 빚을 내서라도 공납금을 제 때 내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자녀들을 공부하라고 다그치거나 치맛바람을 날리신 게 아니라 스스로 공부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결과 슬하에서 아들 사위 포함하여 박사 교수가 세 사람씩이나 배출된 것입니다.

고인은 6·25 동란과 보릿고개의 어려운 경제사정 속에서도 한 가정의 주부로서 자녀는 물론 고인에게 생활을 의탁해온 일가 친척들이 끼니를 거르게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평생 월급쟁이를 하신 부군의 수입을 탓하지 않으시고 알뜰히 저축도 하시고 필요하면 빚을 내가면서라도 가계를 꾸려나가셨습니다. 자녀 교육을 위해 필요하다고 거의 빈몸으로 상경하여 서울에 터전을 마련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성경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의 항아리'와 같은 기적이 고인의 살림살이 속에서 거의 매일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이 마련하신 재산으로 병원비를 충당하고 자손들에게 골고루 선물을 주신 것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고인은 당신의 이름 그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德을 베푸셨습니다. 물론 자녀들에게는 당신의 健康과 自立정신을 물려주셨거니와 일가 친척과 이웃들에게 재물과 인정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6·25 사변 당시 고인의 집은 일가친척의 피난집결소 같았지만 한 번도 불평을 하신 적이 없었고, 1950년대에는 시골 사는 조카들이 공부를 하러 찾아왔지만 본디 식구가 많은 집에서 모두 품어 안으셨습니다. 말년에도 불우이웃 돕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으며, 언제나 받을 생각을 아니하시고 나누어주기부터 하셨습니다.

우리가 고인처럼 부지런하고 헌신적이며 경제적으로 주모있게, 베푸는 생활을 한다면 어떠한 경제적·사회적 문제도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고인이 떠나신 것을 아쉬워하는 까닭은 오늘날에는 이처럼 훌륭한 덕목과 믿음을 가진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로 떠나시는 고인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자문을 하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무시듯 평온한 모습으로 召天하신 고인은 이미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으리라 확신하오며 삼가 고인의 일생을 소개 말씀드렸습니다.

아내에게 쓰는 便紙

요즘 나는 八旬에 즈음하여 당신이 아니었던들 내 인생이 어찌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고 있소. 소심하고 성미 급한 나와는 달리 당신은 성질이 온유하고 말이 없으며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소. 우리 생애의 고비마다 당신과 힘을 합쳤기에 4남 5녀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이만큼 여유있게 지난 생애를 돌이켜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소.

이것은 당신의 타고난 품성 뿐만 아니라 훌륭하신 부모 밑에서 가정교육을 잘 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하오. 돌아가신 장인 어른(殷致黃씨)은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소! 어려운 시절에 하급 공무원으로 출발하셨지만 각고면려의 노력으로 전북지방 군수가 되어 善政을 베푸셨지요. 1932년 6월 내가 무주 금융조합에 입사했을 때 장인 어른은 유능한 무주군청 재무과장으로 또 청렴결백한 관리로서 이름난 분이셨었소.

당신과 인연이 맺어지려고 1933년 여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에 유학중이던 전주고보 동창 殷成龍군이 내 하숙방에서 같이 뒹굴며 재미있게 지냈나 보오. 우리는 처남의 소개로 만나게 되어 그 이듬해 3월 나는 사모관대를 하고 당신은 원삼 족두리를 쓰고 결혼식을 올렸지요.

세월이 훨씬 지난 다음에야 나는 깨달았소. 당신이 효성 지극한 부모님 슬하에서 가사를 도맡아 하며 동생들을 돌보았기에 나를 만나 고생하면서도 모범적인 가정을 이룰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점 말이오. 公醫 도움을 받아 해산한 첫째 딸 외에는 8남매를 당신 혼자 힘으로 낳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되오. 음력 섣달 그믐에 둘째 딸 낳으면서 변변히 몸조리도 못하여 고질적인 신경통을 얻게 된 것 아니겠소. 9남매나 되는 대식구였지만 나의 박봉 때문에 평생동안 사람을 두고 산 적이 없었지요.

하지만 시부모님께 효성을 다하고 시댁 식구들에게도 두터운 우애로 대했음을 잘 알고 있소. 우리가 남원에 살 때에는 우리집이 여관이나 다름 없었쟎소. 운봉에 사시는 부모님이 종종 다녀가시고, 인근지역에서 국민학교 교장을 하시는 형님들이 회의 참석차 남원에 오시면 으레 우리집에서 묵고 가셨으며 남원 장날에는 큰댁 하인들도 다녀가곤 했지요. 나야 부모님, 형님들의 은혜에 보답함이 당연하다 하겠으나 당신이 자진하여 시댁 식구들을 위하였으니 어떻게 감사함을 말로 이르겠소.

전주에서도 비록 큰 방 2개뿐인 집이었음에도 얼마나 많은 손님들이 들끓었는지 요즘 기준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오. 우리 아이들만 해도 6명이나 되는 터에 전주에서 공부하는 조카들도 3-4명씩 우리집에서 학교를 다녔지요. 6.25 사변 때는 피난온 친인척까지 이에 가세하지 않았소! 해방 전후와 6.25 당시 식량이 얼마나 귀할 때였소. 쌀을 가져오든 말든 우리 식구들과 똑같이 해먹였지요. 당신의 용의주도한 살림살이가 아니었으면 그 많은 식량과 땔감을 어찌 내 힘으로 조달할 수 있었겠소. 지금 돌이켜보아도 참으로 아찔한 생각이 든다오.

당신은 음식 타박 잘하는 내 식성에 맞춰 음식 솜씨도 뛰어났으려니와 바느질 솜씨도 좋았고, 아궁이 고치고 방 도배하는 일까지 모두 일품이었지요. 수많은 식구에 나의 박봉으로는 내집 마련이 턱없이 어려웠음에도 당신의 결단력과 기발한 아이디어 덕분에 집을 키울 수 있었지요. 우리가 전주에서 집 없는 설움을 당할 때 당신이 남문시장에서 듣고 온 정보를 토대로 약품회사 사장의 도움을 받아 비록 미완성이기는 하나 염가로 완산동 집을 마련하였던 일이 생각나오. 그후에도 집을 옮길 때마다 당신의 예지(叡智)와 결단(決斷)이 아니었더라면 나의 배짱만으로는 집을 사서 옮긴다는 것이 매번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솔직히 고백하오.

당신이 사업을 했더라면 탁월한 경영수완을 발휘하는 女事業家가 되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소. 자녀 교육만 해도 그렇지요. 내 월급만 가지고는 많은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하였으나 당신이 나서서 아이들의 재능을 뒷받침해주지 않았소! 당신은 생활비보다도 아이들 학비부터 떼어놓고 나서 살림을 꾸렸지요. 결국 아이들을 최고 학부까지 마치도록 교육시킨 덕분에 지금 제 몫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라 믿소.

당신은 여자답지 않게 도량이 넓고 분수에 맞게 살며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과단성 있게 실천하는 사람이었소. 9남매를 키우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짝지워 혼인시키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소. 그럼에도 당신은 혼수를 미리미리 준비해두었다가 빚을 얻지 않고도 결혼이란 대사를 치뤘으니 만 입을 가지고도 당신한테 치하를 할 수 없을 것이라 믿소.

다만 나와 함께 살며 고생을 도맡아 한 덕분에 지금은 80 노구에 신경통과 편두통, 위장병, 담석증 없는 병 없이 병고에 시달린다 싶으니 미안하기도 하도 안타깝기 그지 없소. 우리는 다행히 교회에도 같이 나가면서 하나님께 끊임없이 찬송드리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부디 마지막날까지 우리 함께 지내온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편안한 여생 보내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하고 있소.
(199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