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타임머신을 타다

2004년 설 연휴에 우리 가족은 패키지 투어로 桑田碧海의 도시 上海와 유서 깊은 古都 杭州, 蘇州로 여행을 다녀왔다. 부모님이 안 계시니 연례행사처럼 설 연휴 여행을 떠나고 있지만 이번에는 중국에서 1천년을 넘나드는 타임머신을 타고 다니다 온 것만 같다. 항주 같은 도시로 남아 있었을 상해가 150년 전에는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로, 10년 전에는 한 지도자의 영단으로 첨단 국제도시로 바뀐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1월 20일 이른 아침 전날 내린 눈으로 구간구간 얼어붙은 신공항고속도로를 달려 가까스로 약속시간에 맞춰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식구 수대로 짐이 많고 새벽에 택시 잡기도 어려워 조심조심 손수 운전을 하고 공항 행을 결행한 것이다.

눈 덮인 인천공항 비행기 안의 영철 창공을 날며

上海에서 받은 충격
인천공항을 이륙한 지 80분만에 서울에서 제주도보다 조금 먼 거리에 있는 샹하이 푸둥(浦東)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상해 도심까지는 여러 개 노선의 고속도로와 초고속 자기부상열차가 달리는 고가철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상해 발전의 한계가 되었던 황포강 위 아래에는 10여 개의 교량과 터널이 건설되어 푸둥지구와 막힘 없이 연결되었고, 상해 도심에는 2-3층의 고가도로가 건설되어 있어 교통체증을 별로 느낄 수 없었다.

상해-푸동간 자기부상열차 황포강 위의 노포대교 상해 도심의 3층 고가차도

상해는 중국 최대의 항구도시이자 공업도시이며 산업, 경제, 무역, 과학, 기술, 문화의 중심도시이다. 6천년 전에는 바다 속에 잠겨 있었고, 아편전쟁 전까지만 해도 양자강 하구의 작은 어촌(호=水+扈)에 불과했다. 그러나 1842년 난징조약에 의해 영국에 의해 항구가 열리고, 歐美日 열강이 치외법권을 가진 租借地를 획득하면서 국제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오늘날의 상해는 1992년 鄧小平의 지시에 따라 황포강 건너편의 푸둥(浦東)지구를 중심으로 개발되었다.

상해 도심 밤에 와이탄에서 동방명주타워를 배경으로 상해 도심 재개발

2000년 5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상해를 방문하고 동방명주탑에 올라가 "천지개벽이 일어났다"고 감탄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인당 소득이 倍로 늘어난 기간으로 따지면 런던과 뉴욕은 50∼100년, 도쿄는 30여년 걸리고 '한강의 기적'으로 불린 서울도 15년이 걸렸지만, 상해를 현대화하는 데는 고작 10년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社會主義 국가인 중국의 지도층은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욱 자본주의적인 경제발전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막대한 내·외자 유입을 촉진하였으며 대다수의 중국인민들이 열심히 노력하여 단시일 내에 압축성장을 이룩한 것이다.

닮은꼴 건물이 없는 상해 도심 인민대극장 주변의 상해 도심 '중국을 사랑하자'는 구호가 붙은 빌딩

그러나 화려한 무대 뒤편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커 보였다.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동네도 매우 허름해 보였는데, 곳곳에서 낡아빠진 건물들을 허물고 새로 건축을 하고 있었다. 겉모습만으로는 식별이 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재벌 오너와 같은 부자가 중국 전역에 5천만명도 넘는다고 했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주민들, 특히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서부지역에서는 연간 천불 미만으로 살고 있다. 고급 외제차를 굴리는 벼락부자도 있는 반면 관광객들을 상대로 1천원, 1천원 하고 외치는 행상들도 많았다.

푸동의 신축 빌딩군 푸동 금융센터 상해에 흔한 VW산타나 옆에서

와이탄(外灘)에서 바라본 푸둥지구의 야경은 매우 화려했는데 東方明珠(Dazzling Pearl of the Orient) 타워는 마치 우주선 같았다. 해발 468m의 세계 세 번째로 높고, 동양에서는 가장 높은 방송 송신탑으로 지상 263m에는 전망대, 지하에는 역사박물관이 있어서 관람객들이 끊이질 않았다. 역사박물관에서는 실크로드(絲綢之路) 전시회를 열고 있어 과거 동서양의 물품이 어떻게 거래되었는지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동방명주 타워는 낮과 밤의 모습이 다르고, 날씨에 따라 조명색깔이 바뀌었다.

동방명주타워 전망대에서 영진 실크로드 전시회 전망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상해와 푸둥지구를 가로지르는 황포강 유역은 개발이 한창이었는데 대형 항만과 조선소, 공장들로 활기찬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항만과 물류 시설은 같은 황해권인 부산을 크게 앞지르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중국은 더 이상 뒤처진 나라가 아니었다. 연간 5백억불이 넘는 외자의 유입, 7-9%의 경제성장율, WTO가입과 2008년의 베이징 올림픽, 2010년의 상하이 엑스포로 중국은 이미 우리를 따라잡기 시작했고, 앞으로 십여년 후에는 일본과 미국을 능히 추월할 것으로 보였다.

상해 동방명주타워에서 내려다 본 황보강 상해 황포강2 상해 황보강3

대한독립의 상징, 臨政청사와 홍구공원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상해에 설치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갔다. 韓中修交 이후 한국정부의 지원 및 독지가와 기업들의 헌금으로 개축되어 역사유물과 함께 공개되고 있었다. 한국 관광객들은 입구에서 비디오를 관람하고 비닐로 된 덧신을 신고 내부로 들어갔다(전시관 내부는 사진촬영 금지).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 일제의 공격을 피해 중국 내륙지방으로 옮겨다녀야 했다.

이웃집 빨래걸이가 보이는 임시정부청사 입구 상해 임시정부청사 앞에서 父子 상해의 식당 태가촌 앞에서 母子

1932년 4월 29일 상해 虹口공원에서 일본군 사령부가 일왕탄신 기념행사를 열고 있을 때 윤봉길 청년(당시 25세)은 도시락에 담긴 폭탄을 단상에 투척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쟝제스는 "중국의 10억 인구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현장에는 돌로 된 기념비와 전통 한국식 정자(梅亭)가 서 있었는데 열병식이 거행되었던 큰마당은 연못으로, 공원 이름도 魯迅공원으로 바뀌었으며, 중국 노인들이 빙 둘러서서 태극권 체조를 하고 있었다.

눈 내린 홍구공원에서 태극권을 하는 시민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 魯迅 묘소 앞에서

상해와 항주는 왕복 4차선의 호杭고속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다. 春節을 하루 앞두고 있음에도 중국인들은 기차 여행을 많이 하는 탓으로 운행 차량은 많지 않았다. 고속도로 연변의 논밭에는 벼를 이모작하고 식용작물인 유채를 재배하고 있는데 상당히 잘 사는 농촌으로 보였다. 농가가 무슨 러브호텔같이 생겼는데 2, 3층집에 한 가족이 살면서 습기가 찬 1층은 창고와 주방, 화장실 등으로 쓰고, 2, 3층에서 생활을 하며 3층의 옥탑방에는 조상의 유골을 모셔두거나 불상을 안치하고 있다고 했다.

호항 고속도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중국의 부유한 농촌

옛모습을 잘 간직한 杭州와 西湖
杭州에서는 현지 가이드(중국에서는 그 고장의 현지 가이드로부터 관광안내를 받도록 되어 있음)의 안내를 받아 錢塘江의 역류 방지를 기원하며 건립된 六和塔을 돌아본 후 宋城 민속촌을 구경하였다. 용정차 마을에서 중국 차 맛을 음미한 후 항주 체육공원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송성마을에서 매우 화려한 가무쇼를 관람하였다.
우리 가족은 4성급 성도호텔에 투숙하였는데 자정이 가까워오자 사방에서 새해맞이 폭죽 터뜨리는 소리로 잠 들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가까이서 폭죽을 터뜨리는 것을 보았는데 상자 모양으로 폭죽통을 붙여 놓은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폭죽이 연달아 4-50m 상공으로 치솟으며 아름다운 불꽃을 하늘에 수놓았다.

역류가 일어나는 전단강변 송성 민속촌 가무쇼의 한 장면 새해맞이 불꽃놀이

정월 초하룻날 6시에 기상하여 아침식사를 한 후 우리 가족은 이른 시각 西湖에서 선유를 즐겼다. 北宋 때 항주 지사로 부임한 소동파(蘇軾: 1036∼1101)는 서호 주변을 거닐며 계절별로 많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송강 정 철도 '관동별곡'에서 서호의 仙境을 선망하는 등 우리나라의 문인들은 일생에 한 번 소주를 가보고 싶어했다. 우리는 서호 주변의 공원을 산책한 후 백합호텔 식당에서 이 곳의 별미음식인 東坡肉(술을 넣고 찐 돼지 삼겹살)과 거지닭(진흙으로 싸서 구운 통닭)을 먹었다.

아침 안개 낀 서호 서호에서 필자 서호의 정경

우리 일행은 중국 10대 고찰의 하나인 靈隱寺를 찾아갔다. 새해를 맞아 복을 비는 사람들로 저 멀리 입구에서부터 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우리는 절에 들어서자마자 엄청난 사찰 규모와 대웅전 大佛의 크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56년에 불상을 복원하였다는데 귀의 길이만 1.3m에 이르고 연화대 위의 부처님 앉은키는 25m나 되었다. 수많은 보살과 500 나한상도 볼 만했으나 향에 불을 피우는 사람들의 진지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人山人海의 영은사 입구 향묶음을 태우는 신도들 절에서 복을 비는 심정

체제가 바뀌어도 새해를 맞아 폭죽을 터뜨리고 향초를 태우며 복을 비는 보통사람들의 풍속은 변함이 없어 보였다. 중국 인구의 70% 이상이 불교신자라고 하는데 나라가 개방된 후에는 기독교, 도교, 민간신앙이 교세를 늘리고 있다 한다. 중국은 공산국가임에도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고 있는데, 다만 18세 이전에는 종교를 가질 수 없고 성인이 된 후에만 믿을 수 있으며, 포교나 전도활동이 금지되어 있고, 단전호흡 비슷한 파룬궁(法輪功)이 불법화되어 있는 점이 특이했다.

엄청난 크기의 영은사 대불 영은사의 12지신 사천왕 기독교 전도를 꿈꾸며 십자가 목걸이는 내미는 영진

우리가 구경한 관광지 가운데 항주에 있는 胡雪巖의 古居(별장)와 소주에 있는 拙庭園이 이색적이었다.
청나라 말기의 巨商 호설암(1823∼19 ?)의 별장은 미로처럼 되어 있어 이리저리 방을 옮겨다니며 차를 마시고 놀 수 있게 해 놓았으나 사람 키의 몇 배는 됨직한 높은 담장으로 매우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반면 明代에 만들어진 졸정원은 주인인 왕헌신의 심미안과 야심을 엿볼 수 있게 툭 터진 정원과 용머리 모양의 서재, 별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拙정원은 각종 초목과 대나무, 연못, 연꽃 등으로 매우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門窓은 실크로드를 거쳐 이태리에서 수입했다는 파란 색유리로 치장되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정원은 그의 자손이 노름을 하다 하루 아침에 날렸다고 한다.

답답해 보이는 호설암의 고거 拙정원에서의 가족사진 용 머리를 한 拙정원의 서재

하늘에는 천당, 지상에는 同里와 蘇州
항주에서 상해로 이동하는 도중에 동리라는 곳에 들렀다. 인력거를 타고 운하에서 나룻배를 타는 코스였으나 영은사에서 많은 시간을 지체한 탓으로 우리 일행은 어두워진 다음에 동리에 도착했다. 나로서는 미국 유학 시절에 가보았던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River Walk와 비교되었는데, 낮에 보았더라면 지저분했을 주변 가옥들이 어둠 속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오히려 동리의 운하보다는 동리 일대에 새로 건설된 대규모 산업단지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동리에서 운하로 가는 인력거를 탄 우리 부부 동리 운하의 야경 동리 부근의 산업단지

蘇州의 볼거리는 寒山寺와 합려의 무덤이 있는 虎丘塔(동양의 피사의 사탑), 拙庭園이라 할 수 있다.
한산사의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당나라 시인 장계의 '楓橋夜泊'이라는 시로 유명해진 사찰이다. "달은 지고 까마귀 울며 하늘 가득 서리가 내린다/ 단풍다리 밑 고깃배 등불을 보며 잠을 청하는데/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한밤중의 종소리가 손님 탄 배까지 들리누나."
춘추시대의 오나라 왕 闔閭의 무덤이 있는 虎丘塔에는 이곳에 놀러온 인근 군부대의 군인들이 눈에 띄었다.
도중에 명주 실크공장과 발맛사지 팔러에 들른 것도 괜찮았다. 실크공장에서는 누에고치에서 명주솜을 만드는 것을 구경하고 비단솜이불을 한 채 구입했다. 그리고 발맛사지를 받으니(입장료는 단체여행비에 포함, 팁 2천원) 여러 날 강행군에 따른 피로가 풀리는 듯 했다.

詩구절이 연상되는 한산사 앞 운하 호구탑 후원에서 중국의 젊은 군인들과 발맛사지를 받으며

상해에서는 상해역 부근의 홀리데이인(暇日) 호텔에 투숙했다. 아열대 기후인 상해에서는 호텔도 난방을 하지 않아 밤을 춥게 보냈다.
상해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러시아, 북한의 곡예단과 자웅을 겨룬다는 서커스 공연 관람이다. 저녁 7:30부터 1시간 반의 공연에서는 인체의 屈伸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 그 극한(extreme)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남자 곡예사들이 장대에 매달려서 쇼를 하는데 원숭이 해를 맞아 사람이 아닌 원숭이 쇼를 보는 듯했다. 서커스의 대미는 네 사람이 둥근 원통에 들어가 체바퀴 돌 듯 오토바이를 모는 것이었다.
같은 일행 중의 한 분이 高3 올라가는 우리 아이에게 타일렀다. "봐라. 공부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어디 있니."
In the English version

우리가 4일간 타고 다닌 버스 동파육을 내놓은 레스토랑에서 샹하이 서커스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