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초 스위스 제네바로 출장을 갈 때 구한말 신식 문물을 배우러 구미로 떠났던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 연상되었다. 공식적으로 정부대표로 등록하고 떠나는 외교회의(Diplomatic Conference)임에도 빠듯한 여비지원을 받아(換率상승 영향으로 숙박비에도 미달) 출장을 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랜 만에 스위스에 간 기회에 이곳 저곳 견문을 넓히려고 유레일 패스까지 만들어 가지고 떠났다. 2006년 EU의 개인정보감독기구 총회가 열린 몽트뢰와 20여년 전 눈보라 때문에 알프스 준령을 보지 못하고 하산하였던 필라투스 산을 꼭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독일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고 있는 제자를 만나 격려해줄 생각이었다.
주중에는 국제회의(Unidroit Convention) 참석 때문에 여유가 없었으나, 주말의 하루는 몽트뢰(Montreux)를 방문하고, 또 하루는 루체른(Luzern)을 거쳐 필라투스산(Mt. Pilatus)에 올라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국제회의 종료 즈음에는 협약조문을 정리하는 동안 나머지 참석자들은 하루 정도 휴식을 즐기게 될 터였다.
몽트뢰는 레만(Lake Lehman) 호반의 관광휴양도시로 여름이면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고 2005년 9월에는 세계개인정보감독기구회의에서 개인정보보호의 새 원칙을 선언(Montreux Declaration)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인근에는 중세 때 호수 통행세를 거두는 곳으로 쓰였던 호반의 시용성(Chateau de Chillon)이 자리잡고 있다.
9월 6일 가랑비가 내리다 그치다 하는 가운데 IR열차 편으로 로잔느를 거쳐 몽트뢰로 갔다. 제네바 역의 안내창구(Information Counter)에서 서울에서 가지고 간 유레일 패스를 사용개시(activation)한 후 따로 좌석을 예약할 필요 없이 1등칸에 타기만 하면 되었다.
제네바를 출발하여 70여분 동안 레만 호반을 끼고 달리는 차창 밖으로는 산과 호수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비가 거의 그친 가운데 몽트뢰 역에서 호숫가로 내려가 보니 산책로 주변의 호반공원이 온갖 꽃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한복판의 호반 광장에서는 바로 두 달전에 섬머 재즈 페스티벌이 열렸다고 했다. 마침 이곳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는 그룹 퀸(Queen)의 프레디 머큐리(F. Mercury 1946-1991) 생일이라고 그의 동상 앞에는 꽃다발이 많이 놓여 있었다.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유명 인사의 상징물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부터도 멀리 한국에서 이것을 보러 찾아온 셈이었으니까.
일요일에 찾아간 필라투스 산은 오래 전부터 예수를 처형한 빌라도(Pontius Pilatus)의 영혼이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용(Dragon)이 되어 험준한 산골짜기에 배회한다는 알프스 산으로 유명했다.
산악지형이 너무 험준하여 한때 입산이 금지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축제로 유명한 루체른 시와 한 세트로 즐기는 관광코스(Golden Roundtrip)가 개발되어 있다. 루체른에서 유람선을 타고 산기슭(Alpnachstad)까지 간 후 산정(Pilatus Kulm)까지 48도의 경사로 계속 올라가는 등산철도와 곤돌라(소형 케이블카)로 일주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9월 7일 잔뜩 기대를 품고 해발 2132m의 산정에 올라갔는데 비구름으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22년 전 겨울 암스텔담 유학 당시 찾아왔을 때에도 함박눈이 내려 아무것도 보질 못했는데 다음에 또 언제 와서 알프스의 준령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을까.
9월 9일 국제회의 제2독회가 끝나고 사무국에서 협약안을 정리하는 동안 회의 참석자들과 함께 방문한 그뤼에르(Gruyeres)는 중세의 성채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관광지였다.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스위스 주최 측이 행선지를 비밀로 부쳐 궁금증을 더했으나 그뤼에르 성(Chateau de Gruyeres)의 미술관과 바깥 전원풍경, 그리고 성 아래 식당의 스위스 치즈(Gruyere Cheese) 요리로 참가자 일행은 모두 만족감을 표시했다.
연일 갑론을박으로 다투던 회의 참석자들이 사교적인 대화를 나누며 포도주와 스위스 퐁듀(Fondue) 요리를 즐겼다.
2009년을 기약하고 국제회의를 마친 후 9월 13일 독일 킬 대학(Kiel University)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제자 장원규 군을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에서 ICE 고속열차를 타고 함부르크를 거쳐 킬(Kiel)로 갔다. 추석연휴가 있어 귀국 전에 주말을 독일에서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보다도 경제적으로 훨씬 부강한 독일 곳곳에서 태양열 난방과 풍력발전기를 돌리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독일 기숙사에서도 태양열 난방을 하므로 전력을 절감한 만큼 기숙사비를 환급해준다고 했다.
북해의 항구도시인 킬은 2차대전 당시 잠수함 기지가 있어서 집중적으로 연합군의 폭격을 당한 결과 잿더미가 되었으나 지금은 도시 전체가 말끔하게 재건되어 있었다.
이번 유럽 출장여행은 처음 떠날 때 기대한 것 이상으로 배우는 것이 많았다.
정작 국제협약의 제정을 위한 제네바 외교회의에서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나, 짬짬이 방문하였던 지역마다 특별히 느끼는 바가 적지 않았다.
몽트뢰에서는 관광객을 유치하려면 무엇부터 할 것인지, 지역 이미지를 대표할 수 있는 상징물로는 무엇을 선정할지, 필라투스 산에서는 험준한 산악과 용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환상적인 이야기(fairy tale)로 꾸미는 방법은 없겠는지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그뤼에르 성에서는 오감(五感)을 통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고, 킬에서는 진정으로 푸른 별 지구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유럽 출장으로 미루었던 그린홈(태양열 주택) 설비관리 방안을 하루 속히 BM특허를 출원할 수 있도록 구체화해야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여행은 독서만큼 Travelling is as good 우리의 심신을 튼튼하게 하는 To our body and soul 정신의 양식 As reading a 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