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UNCITRAL 회의 참관기 (2002.12.)

Vienna International Centre 2002년 12월 중순 비엔나에서 열리는 유엔 국제거래법위원회(UNCITRAL)에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법무부 국제거래법연구단의 일원으로서 평소 담보법(secured transactions law) 분야에 관심을 가져온 터라 학교 기말시험도 끝났기에 상당한 기대를 품고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비엔나로 갔다.
회의장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도심에서 다뉴브 강 건너편에 자리잡은 비엔나 국제센터(Vienna International Centre) 컨퍼런스 홀이었는데, 숙소인 카프리 호텔이 회의장에서 지하철(U1)로 네 정거장밖에 되지 않아 매우 편리하였다.

회의의 주제

현재 UNCITRAL은 私法의 국제적인 조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우리나라가 1999년에 제정한 전자거래기본법도 UNCITRAL의 모델법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번 회의의 주제는 기업들이 양질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담보권(security interest)이었다.
UNCITRAL의 실무작업반(Working Group) 6개중에서 도산법제를 검토하는 제5 작업반과 담보권을 검토하는 제6 작업반이 12월 16-17일 이틀 동안 도산절차에 있어서의 담보권의 취급에 관하여 공동회의를 갖고 17일부터 3-4일은 제6 작업반 단독으로 각국이 담보법제를 개선 또는 현대화함에 있어 모델로 삼을 수 있는 담보거래법의 입법지침(legislative guide)을 마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북한의 개혁·개방을 위하여는 담보법제부터 정비하여야 한다고 보고 우선 우리나라(南韓)에서 실시할 수 있는 담보제도를 모색하는 데 연구를 집중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는 동산, 기업 재고자산, 매출채권 등을 담보화할 수 있는 방안을 법제화해야 한다고 학회발표, 논문기고 등을 통해 일관된 주장을 펴 왔다. 법인등기부의 전산화, 기업자산양도의 전자공시 등 제도적 인프라는 진즉 갖추어져 있으므로 일부 법률을 손질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회의의 진행

UNCITRAL Working Group Meeting UNCITRAL 실무작업반 회의는 각 회원국 및 옵서버국의 대표와 회의 주제와 관련이 있는 국제기구·단체의 대표들이 참석하여 사무국(Secretariat)에서 미리 작성한 심의자료를 놓고 열띤 토의를 벌이게 된다. 회의 첫날에는 사무국장의 주재로 의장(Chairman)과 보고자(Rapporteur)를 선출하고, 의장의 사회에 따라 발언권(floor)을 얻어 심의자료의 항목별로 의견(comment, remark)을 말하거나 찬성·반대의견(observation, intervention)을 발표하는 것이다.

UNCITRAL의 모든 회의는 유엔에서의 회의가 그러하듯이 영어, 불어, 스페인어, 중국어, 러시아어로 동시 통역이 되고 있다. 독일어와 일본어는 2차 대전의 침략국이므로 회의 공용어에서 제외되어 있다. 이번 회의에서도 중국 대표는 기탄없이 자기 나라 말로 발표를 하는 반면 일본 대표는 할 말이 많음에도 답답해 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심의자료는 사무국에서 회의를 개최하기 10주전에 참가국들에 배포되며 인터넷 상에도 게시되어 있다.
See http://www.uncitral.org/en-index.htm → Working Groups

그러므로 회의참가자들은 심의할 내용을 자체적으로 검토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회의자료는 사무국에서 주제와 관련이 있는 각계의 전문가에게 위촉하여 초안을 작성하고 이를 취합·정리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러한 작업에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할 수 있는 미국과 주요 국제기구·단체가 초안작성(drafting)을 통하여 회의의 내용과 방향을 좌우하는 셈이었다. 이번 담보권 회의에서도 필자가 아는 미국 SMU 로스쿨의 피터 윈십 교수를 비롯한 미국과 캐나다의 전문 교수들이 몇 章씩 초안을 작성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 2002년 12월 비엔나에서 열린 UNCITRAL "담보권" 실무작업반 제3차 회의의 심의자료 원문은 위의 UNCITRAL Working Group 웹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필자가 정리한 토의 내용은 별도로 소개할 예정임.

회의의 대책

따라서 우리나라가 실무작업반 회의에서부터 우리의 사정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주제별로 책임자가 회의자료를 면밀하게 검토·분석하고 관계전문가의 자문을 얻어 만반의 준비를 갖출 필요가 있다. 실제로 회의에 참석해 보니 36개 회원국들을 지리적으로 안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크게 영미법계(common law)에 속하는 나라의 법률가들과 대륙법계(civil law)에 속하는 나라의 법률가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는 세계 굴지의 대국에 속함에도 아직 옵서버로 참석하는 데 그치고 있다. 아시아 지역의 대표들은 언어상의 문제로 인하여 약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서는 한국 대표(윤성근 부천지원 부장판사, 한찬식 법무부 국제법무과 검사)의 활약이 돋보였다. 전직 국제거래 전문변호사로서, 현직 판사로서 윤 부장판사는 우리나라 가등기담보법 및 양도담보제도의 운용에 관하여 유창한 영어로 설명하여 각국 참석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필자도 외국의 법제를 국내 소개하는 것 못지 않게 우리의 법제를 외국에 소개할 게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이번 담보권 회에서 토론이 전개되는 모습을 보아도 사무국의 제안 설명에 이어 독일, 프랑스 등의 대표가 이의를 제기하고 다른 나라들이 이에 찬반 의견을 제시하면 미국 대표 및 이들과 뜻을 같이 하는 국제기구 대표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결론을 주도하는 양상을 띠었다. 각국의 대표들이 자국의 사정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반면 맨 뒷줄의 국제기구·단체에서는 실무(practical effects) 차원에서 타협·조정안을 내놓는 게 보통이었다.

결국 회의 참석자의 수로 보나 토의에 참가하는 면면에 비추어 볼 때 미국의 영향력이 지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중국세가 약진을 보이는 가운데 일본의 비중은 경제력에 비해 미미한 편이었으며, 그밖에 동구권과 중남미 대표들이 일부 의견을 개진하는 정도였다.
우리나라도 최근 들어 이러한 국제회의에 적극적으로 대표단을 파견하고 있는 등 한국 법제의 현황을 대외적으로 소개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국제회의의 궁극적인 목표인 새로운 법제를 국내에 도입할 것인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 생각된다. UNCITRAL에서 1980년에 제정한 [국제물품매매 협약](일명 유엔 매매협약)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거니와 민·상법 등 국내법과 저촉이 되지는 않는지, 거래계의 실무에 비추어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학계와 정부, 국회 등의 다각적이고도 종합적인 검토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국제적으로 새로운 법률제도에 관한 논의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무역대국인 데다 외국인들이 기업하기에 좋은 나라를 만든다고 PR하고 있는 만큼 우리의 거래상대방들이 안심하고 따를 수 있는 법제를 갖추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나라의 회의참석자들은 성실하게 심의자료를 분석·검토함으로써 국내의 법제운용 경험을 외국에 소개하는 한편 생산적인 회의진행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선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외국 전문가들의 관심을 끌고 국제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과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어두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나라의 국가이익에도 보탬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