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공부를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한다면?

서더랜드가 그린 서머싯 몸의 초상 소설가 이병주, 이문렬, 박완서, 서머싯 몸, 스티븐 킹, 존 그리샴의 공통점은 대단한 스토리텔러라는 것이다. 1970년대 초 대학에 다닐 때 이병주 씨의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은 후 이렇게 재미있는 세계화된(globalized) 소설은 외국의 독자들에게도 읽혀야 한다고 생각하고 영어 번역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이들 작가는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다 보니 소설 속에 또 다른 스토리가 새끼를 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서머싯 몸의 [크리스마스 휴가](Christmas Holiday)를 읽으면서 나 역시 1920년대 파리의 뒷골목을 누비고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이들의 작품은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된 것도 부지기수이다.

법학강의도 법률논문도 스토리텔링 식으로 하면 학생들이 흥미를 갖고 공부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그러자면 플롯이 있어야 하고 재미도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영화 [금발이 너무 해]에도 나오지만 하버드 로스쿨 랭덜 학장의 소크라테스 문답식 강의법(case method)도 [천일야화] 같은 스토리텔링 기법에 바탕을 둔 것이다. 법률지식이나 중요한 개념을 영화 [반지원정대]처럼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학생들과 문답식으로 풀어나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사례연구(case study)를 스토리텔링 식으로 꾸민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그저 단순하게 "이웃사람에게 잔디깎는 기계를 빌려달라고 할 때 뭐라고 할 것인가"라고 하는 것보다 재미있고 학생들로부터 여러 가지 반응을 기대할 수 있다.

2-3주 휴가를 다녀왔다. 돌아와 보니 잔디가 무성하게 자라 있고, 일을 맡겼던 가드너(정원사)는 병원에 입원을 하는 바람에 그동안 잔디에 손을 대지 못하였고 당분간 일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잔디가 너무 억세져서 집에 있는 소형 잔디깎이로는 턱도 없다.
다행히도 이웃집에는 대형 잔디깎는 기계가 있다. 그는 필요하면 갖다 쓰라고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집으로 가는 길에 그 집 애완견이 어기적거리며 다가와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진다. 개가 싫은데, 특히 이놈은 종종 잔디밭을 망가뜨리곤 하여 더 밉다. 울컥 화가 치밀어 그 작은 놈을 은근히 슬쩍 걷어찬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 이웃이 현관 앞에서 팔짱을 끼고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Bill Hybels, Too Busy Not To Pray)

박완서 씨의 경우

다작의 소설가 박완서 씨는 막내를 초등학교에 보내고 난 뒤에 자신에게 스토리텔러의 기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문득 자기만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풀어놓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평범한 가정주부에게 당선작 고료도 커다란 유혹이었다.
작가 본인이 소개하는, 마흔이라는 나이에 처녀작 [裸木](1970)을 발표하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박완서, "나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박완서 문학앨범], 웅진출판사, 1992에서 간추려 인용함) 박완서의 산문집 표지

1. [나목]을 쓰게 된 사연

6.25 때 오빠가 남과 북의 틈바구니에서 억울한 죽음을 하고 난 후 한동안 가족들과 함께 실의에 빠져 지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재미나고 행복하고 보람 있게 살고 싶어서 욱신욱신하는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1951년 겨울 전쟁의 폐허 속에서 무작정 일자리를 구하러 나왔다. 운 좋게도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 있는 미8군 PX의 초상화 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할 일은 매장 쪽으로 난 견본 초상화가 진열된 진열장 앞에 앉아서 지나가는 미군을 붙들고 초상화를 그리도록 유인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들은 다 힘 안 들이고 큰돈을 버는데 나는 월급만 바라고 적성에도 안 맞는 데서 부질없는 노력을 할 신명이 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벙어리인 척 버티기엔 한 달은 너무 길었다. 그림 그리는 분량에 따라 수당을 받는 화가들이 가만히 있질 않았다. 궁하면 통한다고, 조금씩 말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미군들도 제 얼굴을 그려 달라는 이는 거의 없고 대개는 애인이나 아내, 어머니나 누이의 사진을 보이고 초상화를 부탁했다.
사진을 내보이게 하기까지가 문제였다. 차츰 관상도 좀 보게 되어 계급이 낮고, 어수룩한 미군을 속으로 '봉이다!'라고 점 찍으면 거의 실패가 없었다. 처음 수작은 당신은 참 핸섬하고 차밍하다고 시작한다. 대개의 젊은 미군은 벌쭉벌쭉 웃으면서 패스포트(지갑)를 꺼내게 마련이고 그들의 패스포트에서는 미인들의 사진이 나왔다.

화가들은 대개 40대여서 나에겐 아버지뻘은 되었는데 나는 그들을 꼬박꼬박 되바라진 소리로 김씨, 이씨라고 마치 집에서 부리는 하인 부르듯 했다. 내 잘난 척도 알고 보면 실은 내 자포자기의 한 방법일 뿐이었다.
어느 날, 박씨라는 덩치만 크고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화가가 술이 두꺼운 화집을 한 권 끼고 나왔다. 박씨는 붓도 공용의 허드레 붓을 안 쓰고 자기 것을 꼬박꼬박 챙겨 가지고 출퇴근을 해서 속으로 꼴값한다고 비웃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박씨는 구태여 가지고 온 화집을 나한테 들이대며 보길 권했다. 일제 시대 때 선전에 입선한 그림들을 모은 묵은 화집이었다. 그가 그 중의 한 그림을 짚으면서 자기의 그림이라고 했다. 시골 여자 둘이서 절구질을 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박씨가 왜 그 화집을 내게 보여 주었는지 그 까닭은 지금까지도 확실하지 않다. 제 자랑을 하고 싶은 티는 조금도 없었고, 나의 구박을 다소나마 면할 수 있길 바라고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전시에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짓으로 생계를 이어 나가는 게 나뿐이 아니고 또 그게 결코 자포자기할 만큼 부끄러운 일도 아니란 걸 슬며시 일깨워 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박씨가 화가라는 걸 알고부터 나의 PX 생활이 한결 견디기가 쉬워진 것만은 사실이다. 가끔 서로의 가족 이야기도 하고 퇴근길에 차를 마시면서 전쟁 걱정도 하는 정도의 사귐이 큰 위안이 되었다. 특별히 친하게 지내지 않고도 동병상련 같은 연민의 교류는 나의 사람됨을 더 이상 각박해지지 않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박수근 화백의 그림

그 박씨가 바로 고 박수근(朴壽根) 화백이다. 그러나 그가 훗날 그렇게 유명한 화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약 나에게 그만한 안목이 있었다면 그의 그림 몇 점쯤 소장할 수도 있었으련만, 하다 못해 반품 들어온 미국여자의 초상화라도 거두어 두었더라면 한 화가의 불우했던 한 시절의 생생한 증거품이 될 수도 있었으련만.
그러나 내가 그걸 어떻게 감히 억울해할 수 있으랴. 그 자신도 그가 지금처럼 유명해지는 걸 보지 못했고,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높은 그림값도 생전의 그가 누린 바 없는데 말이다.
8호 정도의 초상화를 단돈 4달러(그에게 실제 돌아간 액수는 1달러나 1달러 50센트 정도 됐으리라) 받고 그려서 겨우겨우 연명하면서 남긴 그의 그림은 그의 사후에야 비로소 평가를 받았고, 그의 그림값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치솟았다. 나는 그런 사실을 그가 작고한 지 몇 년만에 열린 유작전을 보고야 알고 깜짝 놀랐지만, 왠지 맥빠진 소리로 제기랄 하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제대로 평가받는 데 대한 기쁨과 놀라움이 클수록 그의 생전의 가난이 억울했고, 한 예술가의 운명에 대해 비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걸 증언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평가에 보탬이 되고 아울러 그의 그림을 거래함으로써 수지를 맞추기에 급급한 화상들의 장삿속에 충격이 되었으면 싶었다.

나는 그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마침 [신동아]지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실시하는 논픽션 모집 마감일이 임박하여 나의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했다. 그러나 막상 시작을 하고 보니 붓이란 게 그렇게 뜻대로 나가는 게 아니었다. 하도 오래간만에 글이라는 걸 써 보니 그럴 만도 했다. 마냥 지지부진하다가 느닷없이 쾌속으로 나갈 때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쾌속으로 나갈 뿐 아니라 쓰는 데 쾌감까지 느꼈다. 그러나 그렇게 잘 써진 부분일수록 다음날 읽어보면 실화가 아니고 내가 멋대로 꾸민 거짓말이었다. 전기를 쓴답시고 근거 없는 거짓말을 꾸며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별수 없이 그 부분을 파기하고 나면 다시 지지부진 안 써져서 끙끙거리는 상태로 돌아왔다.
그의 전기를 쓰는 데는 거짓말과의 싸움말고도 또 난관이 있었다. 자꾸만 내 얘기가 하고 싶은 거였다. 도처에 투사된 내 모습도 그의 전기를 순수치 못하게 했다. 자꾸만 끼여들려는 자신의 모습과 거짓말을 배제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그걸 완전히 배제하면 도무지 쓰고 싶은 신명이 나지 않았다.
쾌감이든 고통이든 신명 없이 글을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전기쓰기를 단념했다. 그러나 섣불리 전기를 쓴답시고 고전하면서 덤으로 맛본 거짓말시키는 -- 약간 고상한 말로 바꾸면 상상력을 마음껏 구사하는 -- 쾌감과 자기표현 욕구까지 단념할 수는 없었다. 특히 그때까지 내 속에 짓눌려 있던 나의 이야기들은 돌파구를 만난 것처럼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나는 논픽션을 단념하는 대신 픽션을 쓰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나의 처녀작인 [나목]이다. 전기를 소설로 바꿈으로써 상상력이 제한을 안 받게 되자 도리어 있었던 사실만을 모아 그를 구성할 때보다 내가 이해한 그의 진실에 훨씬 흡사한 그를 창조할 수가 있었고, 그와 내가 함께 호흡한 한 시대를 보다 생생하게 재현할 수가 있었다.
전기를 소설로 바꾸고 나서 두 달 후가 마감인 [여성동아] 장편소설 모집에 응모했는데 당선이 되었다. [여성동아 기자들이 당선소식을 갖고 온 날 나는 "여자들끼리 경쟁인데 당선될 줄 알았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1970년 당시에는 꽤나 큰돈인 50만원의 고료를 받아 남편과 막내를 데리고 속리산으로 기념여행을 다녀왔다. 등단한 후에도 내 생활에 큰 변화는 없었다. [나목]도 집안 식구들이나 이웃들에게는 언제 썼는지 모르게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신문, 잡지에 난 소식을 접한 동네 사람들은 "원태 엄마가 주부 백일장에 뽑혔다면서요?" 하고 감탄했다.
(호원숙,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 어머니 박완서, 45-46면)]

그 후로 [부처님 근처], [카메라와 워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저녁의 해후], [아저씨의 훈장], [엄마의 말뚝]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나는 나의 비통한 가족사를 줄기차게 반복해 왔다. 이런 작품들의 결정적인 힘은 6.25 때의 체험을 너무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데서 비롯됨을 알고 있다. 알고 있건만도, 모든 기억들은 시간과 함께 저절로 멀어져 가 원경이 되는데 유독 6.25 때의 기억만은 마냥 내 발뒤꿈치를 따라다니는 게 이젠 지겹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나의 동어반복은 당분간 아니 내가 소설가인 한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내 개인적인 상처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무참히 토막난 상처이기 때문이다.
아물었으되 피 흘리고 있음을, 딱지 앉았으되 곪고 있음을, 잘 차려입었으되 헐벗었음을, 춤추고 있으되 몸부림치고 있음을 보고 느끼고 말하는 것도 문학이 숙명처럼 걸머진 형별이자 자존심이라면 나도 잠시 한낱 비통한 가족사를 폭로한 것 같은 부끄러움에서 벗어나 늠름해지고자 한다. (130-141면)

2. 이야기꾼의 본분

내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는 참으로 뛰어난 이야기꾼이셨다. 무작정 상경한 세 식구가 차린 최초의 서울 살림은 필시 곤궁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이었을 텐데도 지극히 행복하고 충만한 시절로 회상된다.
어머니는 밤늦도록 바느질품을 파시고 나는 그 옆 반닫이 위에 오도카니 올라앉아 이야기를 졸랐었다. 어머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을 뿐더러 이야기의 효능까지도 무궁무진한 걸로 믿으셨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심심해할 때뿐 아니라, 주전부리를 하고 싶어할 때도, 남과 같이 고운 잎을 입고 싶어할 때도, 약아빠진 서울 아이들한테 놀림받아 자존심이 다쳤을 때도, 고향 친구가 그리워 외로움을 탈 때도, 시험점수를 못 받아 기가 죽었을 때도, 어머니는 잠깐만 어쩔 줄을 모르고 우두망찰하셨을 뿐, 곧 달덩이처럼 환하고도 슬픈 얼굴이 되시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나의 아픔을 달래려 드셨다.

어머니가 당신 이야기의 효능에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기보다는 이야기밖엔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딸의 모든 상처에 그것을 만병통치약처럼 들이댈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도 어머니는 때때로 낮은 한숨을 쉬시면서 이렇게 조바심하셨다. "이야기를 너무 바치면 가난하게 산다는데." 그건 이야기를 즐겨 만드는 사람, 즐겨 듣는 사람, 쌍방에 다 적용될 수 있는 얼마나 그럴싸한 예언인가.
내가 아직도 소설을 위한 권위 있고 엄숙한 정의를 못 얻어 가진 것도 "소설은 이야기다"라는 단순하고 소박한 생각이 뿌리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 남이야 소설에도 효능이 있다는 걸 의심하건 비웃건 나는 나의 이야기에 옛날 우리 어머니가 당신의 이야기에 거셨던 것 같은 다양한 효능의 꿈을 걸겠다. (143-14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