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절한 법정지'의 새로운 이슈

국제소송에 있어서 '불편한 법정지' 또는 '부적절한 법정지'(forum non conveniens)라 하면 1984년의 보팔 유니언 카바이드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인도 보팔(Bhopal)에 소재한 미국기업 유니언 카바이드(다우 케미컬의 자회사) 공장에서 유독가스(methyl isocyanate)가 누출되어 2만명에 달하는 인도 주민이 죽거나 다치는 대형참사가 일어났다. 그때 피해자들은 유니언 카바이드 본사가 소재한 뉴욕주에서 손해배상 소송을 벌이고자 했으나, 뉴욕주 남부지구 연방지방법원은 'Forum Non Conveniens'를 이유로 인도 현지에서 재판을 받도록 했다. In re Union Carbide Corp. Gas Plant Disaster, 634 F.Supp. 842 (S.D.N.Y. 1986), 809 F.2d 195 (2nd Cir. 1987).
그 이유는 인도 현지에 가서 실시해야 하는 증거조사, 미국 법정으로 불러와야 하는 증인신문의 번잡함과 과도한 소송비용, 보팔 공장의 경영이 거의 전적으로 현지에서 이루어지고, 인도에서도 대체로 영국법의 전통과 관행이 시행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맨해튼 연방법원의 키넌(Keenan) 판사는 그의 재량(discretion)으로 이 사건을 인도에서 심리하는 것이 옳다고 결정했다. 이 때 유니언 카바이드 측에서도 언론에 크게 노출되는 뉴욕보다는 인도의 시골에서 조용히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2007년 5월 27일자 LA Times는 중앙아메리카의 바나나 농장에서 일했던 근로자들이 돌식품(Dole Food)과 살충제 메이커인 다우 케미컬을 상대로 미국 LA에서 소송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Plantation workers look for justice in the North" A1). 지금까지 부적절한 법정지라는 이유로 미국에서는 재판이 이루어진 적이 없었으나 이번 사건은 사정이 다르다고 했다. 이미 30년도 더 된 사건이고 증거조사와 증인신문 모두 현지에서 이루어져야 할 참인데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일까?

바나나 농장 근로자들의 집단소송

30여년 전에 나카라과 등 중앙아메리카의 바나나 농장에서는 DBCP(dibromochloropropane)라는 살충제를 살포한 적이 있다. 그런데 1977년 DBCP를 생산하던 옥시덴털석유 화학공장에서 일하던 근로자들이 생식능력을 상실하는 등 건강에 유해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미국 환경청(EPA)은 DBCP 사용 중지 명령을 내렸다. 당시의 청문회에서는 다우 케미칼과 셸화학은 그 유해성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83년 6명의 옥시덴털 근로자가 490만불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였고, EPA는 1985년 DBCP를 영구적으로 사용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 로펌들은 DBCP 제조사 및 식품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처음에는 옥시덴털 근로자들과 외국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하는 5만여 노동자들로부터 사건을 수임하여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출하였으나 거의 대부분 부적절한 법정지라는 이유로 현지 법원으로 사건이 이송되었다. 그러나 현지 사법시스템이 불충분하고, 원고측 로펌들이 외국에서 소송을 수행하기에는 자금이 딸렸다.
결국 상당수의 사건은 쌍방 합의(settlement: 화해)로 끝났다. 1992년에는 1천명의 코스타리카 근로자들에게 2천만달러의 배상을 하기로 합의하였고, 다우사는 1997년 2만6천 근로자들에게 4천150만달러를 지급하기로 하고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그러나 변호사비용을 지불하면 원고 1인당 돌아가는 돈은 수백달러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기에 변호사들은 미국에서 피고회사의 잘못을 밝히고 재판을 벌여야 배상금이 많아질 것이라 믿고 미국에서의 소송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내 사정의 변화

그러던 것이 최근 들어 사정이 달라졌다.
첫째는 LA에서 상해(personal injury)사건 전문변호사로 유명한 후안 도밍게(Huan J. Dominguez) 변호사가 니카라과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정액검사 결과 생식능력이 없는 수천명의 주민들로부터 사건을 수임하여 2004년 LA에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도밍게 변호사는 시험삼아 원고를 일단 13명으로 하여 시작하고, 만일 화해(settlement)로 결말이 나더라도 종전보다 훨씬 많은 피해보상을 받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2002년에 니카라과 법원이 450명의 현지근로자에게 4억9천만 달러 배상하도록 명하는 등 손해배상 판결이 잇따르자 돌과 다우는 미국내 강제집행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또 돌식품은 온두라스에서 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바나나농장 근로자들에게 1인당 5800달러를 지급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둘째로 이와 관련하여 니카라과 정부가 2000년 자국민에게 유리하게끔 살충제(DBCP)는 생식능력을 해친다고 규정한 DBCP소송촉진법을 시행하고, 피고회사가 니카라과 법정에 서기 위해서는 10만달러를 공탁하도록 했다. 이로 인하여 니카라과는 미국민에게 적대적인 법정지(hostile jurisdiction)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 법원은 더 이상 현지 법원에 소송을 미룰 수 없게 되었고, 이 점을 노려 도밍게 변호사가 현지인들에게는 마치 구세주처럼 미국에서 소송을 벌이도록 부추겼던 것이다.

지난 5월 초 LA 지방법원(Superior Court)의 빅토리아 체니(Victoria Chaney) 판사는 니카라과 외에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과테말라, 파나마 사건도 병합하여 일괄 심리하기로 하고, 도밍게 변호사에 대하여 피고회사에 델몬트, 치키타 브랜드, 셸 석유회사를 추가하도록 하여 올 여름에 벌어질 소송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피고회사들이 문제의 살충제가 유해함을 알고 사용했다 할지라도 현지주민들이 건강을 해치게 된 데에는 30년 전에 DBCP 말고도 DDT 같은 유독성 살충제, 오염된 식수원 등 여러 가지가 있어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형편이다. 부적절한 법정지가 비록 틀린 논거는 아니지만, 이번 사건은 국제적으로 물건의 이동이 빨라지고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사법제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