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CLA 로스쿨 및 미국 사회 견문기(1)


2007년 3월부터 2008년 2월까지
교수로서 처음 맞는 연구년(Sabbatical)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2001년 가을부터 1년간 미국 보스턴에서 방문교수를 한 인하대 윤진호 교수
미국 대학이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면서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지식의 디즈니랜드"라고 말했다.
나도 UCLA 로스쿨 안팎으로 다니면서 지적 재충전 작업은 물론 미국 사람과 사회를 탐구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
그 결과는 윤진호 교수가 제안한 것처럼 에피소드 별로 A4 용지 1장 정도로 요약하여 40편 이상 이곳에 올릴 작정이다.
내 스스로도 10여년 전 SMU에서 공부하던 때와 여러 모로 비교가 될 것 같다.(2007.3)

목     차
프롤로그
로스쿨 모의재판 경연대회
미국은 현대판 카스트 사회?
세 번만에 붙은 운전면허 시험
미국의 자동차문화
25년만의 재회: 이철수 심포지엄
UCLA 로푸키 교수의 명강의
우수교수 시상식의 주인공은 한국인 교수
Nobless Oblige: 말리부 게티 빌라
세계가 놀라는 한국인의 디아스포라
로푸키 교수와의 인터뷰

의지의 한국인 석세스 스토리
어느 한국인의 비극적인 몰락
지역사회에 기여해야 대학도 산다
익사이팅한 고속도로 자동차 여행
살아 움직이는 미국 사법제도
라스베가스를 석권한 태양의 서커스
동화 같은 성을 쌓은 랜돌프 허스트
통제불능의 헐리웃 연예인들
미국의 REAL ID 논란 [이상 Part I]
로스쿨 졸업생 취업대책 [이하 Part II]
CNN 현장보도의 기린아 앤더슨 쿠퍼

헐리웃 볼에서의 핑크 마티니 공연 관람
캘리포니아에서 활기를 띠는 줄기세포연구
미국에서도 화제인 한국인의 교육열풍
미국 로스쿨 졸업생들, 희망 끝 고생 시작
다양한 산업이 발전하고 있는 LA 지역
변모하는 미국 사회의 인종구성
유태인과 닮은 듯 닮지 않은 한국인
'잊게 해야 한다'는 프라이버시 특강
법학교수와 '학문의 자유' 논란
법학교수들의 지뢰밭 - e메일과 블로그
거침없이 빚을 지는 미국의 법대생들

LA의 또 다른 명물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여성지휘자의 LA 필이 연주한 교향곡 신세계
쉽고 감동적인 조엘 오스틴 설교, 비판도 만만치 않아
UCLA 로스쿨 제리 강 교수와의 대화
미국은 소비자들의 천국
부동산대출 부실로 한인교포 은행들 고전
롬니 전 주지사는 진짜 '경제대통령' 후보
헐리웃을 뒤덮은 작가조합의 스트라이크
미국에서 꼭 가봐야 할 곳
미국의 대통령 경선
에필로그

프롤로그

교수들은 6년 가르치고 한 해 (또는 3년에 6개월) 쉴 수 있는 안식년(Sabbatical)이 있다. 이를테면 지적 재충전을 하라는 것으로 학문이란 가르치기만 하여서는 바닥이 날 수 있으니 쉬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렇다고 안식년에 반드시 해외에 나가서 연구하라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자기가 학위과정을 마친 학교의 은사를 찾아가서 새로운 학문의 경향과 자료를 배워오기도 하지만, 어떤 교수는 타 지역의 학교에 가서 교수연구활동을 하기도 한다.

공항까지 배웅 나온 제자들 나도 교수 7년차에 귀중한 연구년을 얻게 되었다. 우선 연구비 지원을 받기 위해 거창한 연구계획을 세워 LG 연암문화재단에 신청하였으나 나이가 45세를 넘었다고 거절 당했다. 50대의 학자는 연구를 못한다는 것인지... 그 대신 지원금은 많지 않아도(왕복 항공비 플러스 월 3백불. 나 다음 2007년 2학기부터는 월 6백불로 증액) 경희대학교에서 매 학기 2명씩 보내는 해외연구교수로 선정될 수 있었다.
방문교수(visiting scholar)로 갈 학교는 일찌감치 대학 1년생인 둘째의 어학연수를 위해 영어권 대학으로 결정은 하였으나 어느 지역의 학교로 가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일찍이 뉴욕과 댈러스에서 살아보았으니 이번에는 서부지역으로 가고 싶었다.

우선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대학의 제인 윈(Jane Winn) 교수에게 연락을 취하였더니 'SMU에서 사제지간'이었다는 인연으로 반갑게 초청해주겠다고는 하였으나 8천불을 내라는 것이 적잖은 부담이었다. 무엇보다도 내 전공과 관련이 있는 패컬티와 커리큘럼이 있는 로스쿨이어야 했다.
밴쿠버에 있는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UBC)도 괜찮았지만, UCLA로 갈 수 있다면 LA에는 형님과 누님이 살고 계시므로 여러 가지 편의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UCLA 로스쿨의 비지팅 스칼러 피는 5천불이었다. 요즘 미국 대학들은 서로 오려고 하는 방문학자들에게 도서관 등 시설 이용료 명목으로 연간 5천불에서 1만불이 넘는 금액을 요구하고 있다. 워싱턴 대학에 비해 3천불이 적다는 것은 둘째 아이의 한 학기(semester) 학비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4월 하순 UCLA 로스쿨에 학교에서 요구하는 신청서와 연구계획을 제출하고 호주의 그린리프 교수를 포함한 동료교수 세 분의 추천장을 첨부하였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렸다. 6월 중순쯤 되었을까 UCLA 로스쿨의 학장실(Dean's Office)에서 일한 적이 있는 조카(현재 샌디에고 ML&A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박재균)로부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는 전갈이 왔다. 서류를 보내놓고 한참을 기다리고 있다고 답신을 보냈더니 즉각 회신이 왔다. 전에 같이 일했던 교직원들에게 물어보니 "삼촌을 돌봐주겠다(sponsor)는 패컬티가 없어 보류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아뿔싸! 나와 전공분야가 비슷한 복수의 교수에게 스폰서십을 요청하였는데 두 분이 모두 스폰서십을 서주질 않아 공중에 떠있는 모양이었다. 급히 담보법과 정보법을 담당하는 린 로푸키(Lynn LoPucki) 교수에게 부탁을 하여 그 다음날로 초청장을 받을 수 있었다. 6월 22일자였으니 학교가 방학중인 것을 고려하면 거의 기적 같은 일이었다.

연말이 다가오는 2006년 11월 말부터 출국준비를 시작하였다. UCLA 로스쿨로부터 DS-2019 서류를 받아 인터넷으로 J-1 비자를 신청하고, 미국 대사관에서 영사와 짧막한 비자 인터뷰를 한 후 마침내 1월 18일 J-1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UCLA 어학원에 가서 어학연수를 받기로 한 둘째도 순조롭게 F-1 비자를 받았다. 교환교수 가족으로 신청할 수도 있었지만 나보다 더 오래 유학을 할 가능성도 있어 분리하여 신청하였다.
그리고 ACE 교환교수 보험을 구입하고 2월 말에 출국하는 것으로 항공권 예약을 마쳤다.

로스쿨 모의재판 경연대회

UCLA 로스쿨 3월 21일 오후 로스쿨 1층 모의법정에서 모의재판 최종 라운드(56th Roscoe Pound Tournament Finals Round)가 열렸다. 미국의 유명한 법사회학자 로스코 파운드의 이름이 붙은 것은 그가 1949년 UCLA 로스쿨 설립 당시의 패컬티 멤버였기 때문이다. 2006년 가을학기부터 로스쿨의 모의재판(lawyering moot court) 과목에서 소장작성(brief)과 구두변론(oral argument)의 시합을 벌여 점수가 좋은 학생들이 토너먼트로 결승전까지 올라온 것이다.
2-3명은 여학생일 것이 아닐까 하는 내 예상과는 달리 결선 출전자들은 모두 남학생들이었다. 다들 정장 차림으로 앉아 재판부가 입장하기를 기다렸다. 방청석에서는 마침 점심시간인 까닭에 피자와 샌드위치를 들고 와서 먹는 학생들도 있었다.

사안을 살펴보니 그리 복잡한 내용은 아니었다.
첫 번째 사례는 공립고등학교 학생의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에 관한 문제였다. 시골의 공립고등학교 학생들이 방과 후에 화제를 몰고 다니는 호텔재벌 2세 패리스 힐튼이 찾아오기로 한 광장으로 나갔다. 세 학생이 마침 TV 카메라가 비칠 때 재킷을 벗고 마약복용을 부추기는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흔들었다. 학교 당국이 세 학생의 품행을 문제삼아 정학처분을 내리자 그 중 스타크라는 학생이 이는 수정헌법 제1조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소원을 제기한 사건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문제의 스타크 학생이 시내 중심가를 통과할 때 속도위반을 하자 경찰관이 정차를 명하였는데 그가 도주를 한 사건이었다. 8분여 동안 고속도로와 쇼핑몰 주차장에서 경찰의 추격이 벌어졌고 경찰차와 가벼운 접촉사고도 있었다. 그러나 학생이 건설공사장 안으로 과속으로 도주함에 따라 경찰차가 그 앞을 가로막아 겨우 정차시킬 수 있었다. 이 경우에 경찰이 매우 위험한 강제력(deadly force)을 행사하여 그의 도주를 막은 것이 과연 필요가 있었는지, 과잉조치가 아니었는지 하는 것이 문제였다.

UCLA 법학도서관 12시 15분 정각 3인의 법관으로 구성된 재판부가 입정하였다. 모두 일어선 가운데 제6 항소법원의 보그스(Danny J. Boggs) 판사, 제10 항소법원의 맥코넬(Michael W. McConnell) 판사, 중부 캘리포니아 연방지방법원의 프리거슨(Dean D. Pregerson) 판사가 착석하면서 경연이 시작되었다.
변호사가 "May it please the court?"로 진술을 시작하고, 말끝마다 "Your Honor"를 붙이는 것만으로 법관의 권위가 서는 것은 아닐 것이다. 풍부한 법률지식을 가지고 헌법과 법률, 그리고 사회균형자로서의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할 때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는 것이라 생각된다. 원고측 변호사(Petitioner)가 변론을 시작하자마자 법관들이 토론을 하듯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간혹 학생들이 쩔쩔 매는 예리한 질문도 있었다. 보그스 재판장 외에는 농담도 하지 않고 두 배석판사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하고 잇달아 질문을 던졌다. 예컨대 두 번째 이슈에서 "고속도로에서 시속 75마일로 달렸다면 어떻게 되느냐", "공사가 시작되기 전의 건축현장은 공로(public road)가 아니지 않으냐" 는 등의 질문을 하였다.

15분 동안에 재판부의 질문을 소화하면서 자기 의뢰인에게 필요한 진술을 얼마나 요령있고 설득력 있게 하느냐가 포인트인 것 같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리를 맡은 여학생이 10분, 5분, 2분, 1분이 남았다는 카드를 계속 들어 보였다. 마침내 제한시간 15분이 지난 다음에는 스톱 사인을 보냈다. 피고측 변호사(Respondent)가 같은 요령으로 15분 동안 토론과 진술을 마쳤다. 그리고 원고측 변호사가 다시 나와 3분간 보충 진술을 하였다.
두 번째 케이스까지 모두 마치고 나니 1시 25분이 되었다. 잠시 휴정한 후 선고공판과 시상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나는 로푸키 교수의 강의에 참석하여야 했으므로 결론은 보지 못한 채 다른 학생들과 함께 모의법정을 빠져 나왔다.

미국은 현대판 카스트 사회?

전에도 여러 차례 미국에서 살아본 적이 있지만 요즘은 "이 사회에 적응하고 살려면 무슨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가"하는 관점에서 미국을 관찰하고 있다. 전에 은행 주재원이나 유학생으로 와서 살 때에는 잠시 살다가 갈 곳이라는 생각이 앞섰는데, 지금은 은퇴(retirement)한 후에는 이곳에 와서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래도 나이 탓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헐리웃과 가까운 만큼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무슨 시나리오를 갖고 누구를 캐스팅할 것인가, 제작진과 자본주는 어떻게 구성할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 경우 누구에게 어떤 역할을 맡길지 분명해진다. 내가 맡을 역할도 거의 정해져 있을 것 같다. 일단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배역에 거의 변동이 없게 된다.
이와 같이 미국에서는 여러 인종, 부류의 사람들이 하나의 부품(mechanical parts)처럼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TV에서 보는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은 일찍부터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거나 치열한 선발절차(screening procedure)를 거친 끝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활동하고 있다. 스포츠맨들도 자신의 운동기량을 바탕으로 뛰어난 실적을 올리게 되면 많은 수입과 인기를 얻게 된다. 성공한 스포츠맨들은 특히 흑인의 경우 가족 친지들까지 선수의 매니저로 관여하는 등 잘 살게 된다고 한다.
누구나 자신의 능력으로 공평하게 그러한 기회를 얻을 수 있기에 별 불만이 없다고 한다. 성공을 못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그에 못 미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라브레아 손세차장 이 사회의 밑바닥에서는 멕시코인들이 땀 흘려가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 9.11 사건 후에는 이민요건이 강화되어 불법체류자의 경우 임금착취를 당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마치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미국에 부활한 것 같다.
얼마 전 먼지 때가 묻은 차를 세차하러 라브레아 거리의 한 세차장에 들렀을 때 그곳에서는 수많은 멕시코인 종업원들이 손님들의 차를 손세차(hand wash) 해주고 있었다. 손세차에 특별한 기량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종업원들은 아는 사람의 소개로 들어와 자기에게 할당된 작업을 하고 일당과 손님이 주는 팁으로 생활하는 것 같았다. 이날 나는 세차비 10.99불, 세금 2불, 팁 2불 도합 15불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이미 자동세차가 일반화되었는데 "인건비가 비싸다는 미국에서 손세차를 하다니…" 믿기지 않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저임금의 노동력이 풍부하게 공급되는 한 이에 의존하는 업종도 장사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곳에서 생활할 때 드는 비용은 만만치 않다고 하였다. LA 같은 대도시는 집세가 워낙 비싸고(투 베드룸의 경우 월 15백불 이상)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 자동차 유지관리비도 많이 들어 온 가족이 한두 가지 일자리를 갖지 않으면 생활이 어려울 정도라 한다. 특히 멕시코 사람들은 가족애가 강하여 고향집에 송금도 많이 한다는데, 이처럼 벌어서 그대로 먹고살기만(from hand to mouth) 해서는 향상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비하면 그 동안 내가 만났던 많은 한인 교포들은 우러러 보였다. 물론 제1 세대는 처음 이민 와서 지금의 멕시코 사람들처럼 밑바닥에서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그러나 자녀들을 열심히 가르쳐 그들이 자기 몫을 할 나이가 되어(미국에서는 18세가 되면 성년으로 취급되며,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학자금융자(student loan)를 받아 학비를 조달하는 등 사실상 자립을 한다고 한다) 은퇴를 할 즈음에는 어느 정도 재산도 형성하고 유족하게 사는 모습을 보았다. 근검생활을 통한 저축과 열성적인 자녀교육이야말로 미국 사회에서 수직으로 신분상승은 못 하더라도 건전한 중산층을 구성하는 한국인들의 저력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세 번만에 붙은 운전면허 시험

비벌리힐즈 호텔앞의 산타모니카대로 교차로 미국은 자동차 없이는 살 수 없는 나라이다. LA에서 처음 집을 마련할 때 학교 가까운 곳에서 도보로 다니든가, 버스 같은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장거리 여행은 고사하고 우유와 생수, 과일 등 무거운 먹거리 장을 보는 데에도 차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對民접촉이 제일 많은 관공서는 자동차등록국(Department of Motor Vehicles: DMV)이다. 운전면허를 신청하거나 자동차를 등록·양도하는 것은 물론 사진 붙은 신분증(ID)을 만들 때에도 DMV를 찾는다. 미국에서는 교통사고($500 이상의 재산손해 또는 인명사고)가 나면 경찰서가 아니라 DMV에 신고하여야 한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무슨 차를 몰고 다닐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캘리포니아주의 운전면허를 취득하는 것이 시급하였다. 물론 서울에서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 왔으나 이것은 2개월만 유효하다고 했다. 캘리포니아주에 2개월 이상 체류하는 사람은 국제운전면허증을 가지고도 현지 운전면허증이 없으면 '무면허 운전' 벌칙을 적용받는다고 했다(DMV 담당자의 말).
다행히 필기시험은 예상문제 중에서만 출제가 되고 한국어로 시험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교통규칙과 도로표지에 관한 총 45개 문항 중에서 7개 이내로 틀리면 합격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치른 도로주행시험은 만만치 않았다. 나의 경우 운전경력이 통산 20년 이상이고, 유럽과 뉴욕, 뉴저지, 텍사스에서 각각 운전을 한 경험도 있다. 그럼에도 두 번이나 불합격한 끝에 세 번째 도전에서 합격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시험관(examiner)이 지적한 바와 같이 교통신호등 앞에서 과감하게 운전을 하고, 횡단보도와 주차장에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양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시험에서는 너무 조심스럽게 운전하다가 규정속도에 미달하였다는 이유로 또 떨어졌다.
생각해 보니 근본적인 원인은 서울에서 굳어진 나쁜 운전습관 때문이었다. 서울의 도로에서는 행인보다 차가 우선이고, 운행 중에 차선을 바꾸는 것은 내 멋 대로이고, 내가 먼저 양보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양보를 강요하는 것이 습관화 된 탓이었다.
게다가 명색이 법과대학 교수라는 사람이 미국에서 지켜야 할 운전관행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센투리시티 Fox 빌딩 부근의 신호등 없는 좌회전 차로 첫째는 자동차 문화의 차이이다. 미국의 거리에는 사람은 별로 없고 차만 다닌다. 대부분의 주택이 차고 또는 주차공간을 끼고 있으므로 작은 도로가 많고 신호등 없이도 좌회전을 할 수 있다. 그래서 LA 지역에서는 파란불이 끝나고 노란불이 들어올 때 두 대 정도가 좌회전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물론 큰 교차로에서는 파란 화살표의 좌회전 신호등이 가동된다.
둘째는 철저한 인명존중 사상이다. 특히 횡단보도나 주차장에서는 행인이 절대 우선이다. 내가 첫 번째 주행시험은 제대로 마쳤음에도 마지막 코스인 주차장에서 사람들을 밀치듯이 차를 몬 것이 결정적인 패착(fatal mistake)이었다. 그 후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횡단보도에 사람이 서 있는 한 횡단보도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이네들의 운전관행이었다.
셋째는 매우 투철한 권리의식이었다. 예컨대 우선멈춤(Stop) 사인에서는 3초간 정지하여야 한다. 4곳에 스톱 사인이 있는 교차로(4-way Stop)에서는 정지선에 먼저 접근한 차량이 통행의 우선권(right of way)을 갖는다. 자기의 순서를 지키지 않고 양보하는 것은 사고의 위험을 초래한다.

그러나 고속도로든 시내도로든 끼어 들기 위해 깜박이를 켜면 열 중의 아홉 운전자는 양보를 해주었다. 그 다음에 잠깐 양보했던 시간과 거리를 만회할 수 있기 때문에 양보를 하는 것은 사고위험을 방지할 수도 있고 결코 손해보는 일은 아니었다.

미국의 자동차문화

게티 미술관에서 바라다보이는 LA 다운타운과 Freeway 405 땅덩이가 넓은 미국은 자동차와 철도 위에 건설된 나라라 할 수 있다. 물론 자동차가 발명되기 전에는 말과 마차가 그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자동차 없는 미국 생활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우리 아들 이야기가 UCLA 어학원에서도 차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행동반경이 그렇게 차이가 날 수 없었다고 했다.
미국인들은 자동차를 타고 햄버거를 사 먹고, 영화도 보고 은행거래를 한다.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쇼핑몰(outlets)은 도심지에 있지 않고 자동차로 한두 시간씩 달려가야 하는 한적한 교외에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다.

피터슨 자동차박물관 미국의 도시는 자동차와 깊은 관련이 있다. LA의 경우만 해도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항공·석유산업이 발전하자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이 때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미국의 중산층이 선망하는 차고와 정원이 딸린 주택을 인기리에 건설,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캘리포니아 란초(rancho)" 스타일이라고 불렀는데 그 도로망은 반드시 고속도로 접근성이 좋아야 했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그가 2차 대전 당시 유럽총사령관으로서 가 보았던 독일의 아우토반(Autobahn)을 모방한, 신호등 없이 논스톱으로 달릴 수 있는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Interstate Highway)의 건설에 착수하였다. LA에는 남북으로 5번과 15번, 동서로는 10번 고속도로가 시발하거나 통과하도록 설계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자동차문화를 전에 플로리다 디즈니월드의 에프콧(EPCOT) 센터에서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LA는 그 이상 가는, 전시물이 다채롭고 내용도 알찬 자동차 박물관을 자랑하고 있다. 헐리우드 아래 윌셔와 페어팩스 교차지점에 있는 피터슨 자동차 박물관(Petersen Automotive Museum)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서는 3층에 걸쳐 미국 자동차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온갖 자동차(오토바이 포함)와 주유소, 매점, 정비소를 전시, 재현해 놓고 있었다. 1940년대에 미국 대통령이 탔던 방탄승용차도 볼 수 있었다. 미래의 방에는 하이브리드 카와 새로운 유형의 콘셉카들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피터슨이라는 사람이 평생동안 집념을 갖고 콜렉션해 놓은 것도 대단하였지만, 평일임에도 적잖은 수의 미국인들이 진지하게 전시물을 둘러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미국인들은 자동차를 자기 가족구성원처럼 여기고, 차고 안에서 어지간한 자동차 정비와 수리는 손수 한다고 한다.

우리 동네 윌셔가의 랜드마크 나도 정식으로 운전면허증을 땄겠다 이제 미국 생활의 일부분으로 즐겁게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미국자동차협회(AAA)에 회원으로 가입(연회비 $67)하여 나에게 필요한 상세 지도와 여행 가이드북을 무제한으로 제공받고, 필요하면 상담도 요청하기로 했다. AAA TourBook은 미국생활의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데, 누구나 그 정확하고 상세한 정보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리고 운전할 때에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다른 운전자에게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기로 다짐하였다. 그리고 도로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기로 했다.
또한 늘 다니는 곳에는 랜드마크를 설정해두는 즐거움도 갖기로 했다. 거리이름을 확인하지 않고도 주변의 지형지물이나 가로수 모습을 보고 좌회전 또는 우회전을 하여 자기가 들어갈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높은 건물 위에 삼성 입간판이 서 있고 그 앞에는 윌셔 그레이스 한인교회가 있어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었다.

25년만의 재회: 이철수 심포지엄

4월 7일 부활절 전날인 토요일 오후 UCLA 로스쿨에서는 매우 뜻깊은 심포지엄이 열렸다. 사형수로서 교도소에서 10년간 복역했던 이철수 씨가 한인 교포들을 비롯한 아시아 아메리칸들의 시민운동(Pan Asian American League)에 힘입어 25년 전에 석방된 것을 기념하여 이경원 리더십센터가 UCLA 인종문제연구소(Critical Race Study: CRS)와 공동으로 학술행사(Justice on Trial: The Battle to Free Chol Soo Lee)를 개최한 것이다.
바깥 날씨는 연일 꾸무럭하였지만 주말의 로스쿨 구내는 많은 참석자들로 활기를 띠었다. 당사자인 이철수 씨를 비롯하여 행사의 주관자인 이경원 노기자, 서울에서 온 유재건 의원도 보였다. 미주 중앙일보, KTAN 같은 교포언론도 취재에 열을 올렸다.

UCLA의 '천의 얼굴' 조각상과 이철수 심포지엄 안내판 이날 행사는 TV 프로듀서인 중국계 산드라 긴 여사가 디지털로 새로 제작한 다큐필름을 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973년 6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백주 대로상에서 중국계 갱단 간부가 총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며칠 후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여 아시아계 젊은 남자 여럿이 용의자로 체포되어 서스펙트 라인업에 섰다. 이 때 인상착의가 범인과 비슷하다고 목격자의 지목을 받은 21세의 이철수가 살인범으로 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wrongful conviction) 받았다. 그에 대한 재판은 그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증거들이 검찰에 의하여 묵살된 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데 그가 범인일 수 있다는 정황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철수는 12살 때 국제결혼을 한 홀어머니를 찾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으나 뱁새 눈에 말도 통하지 않고 하는 짓마다 눈 밖에 나는 비행 청소년이 되어 소년원을 안방 드나들 듯하였던 것이다. 자신을 제대로 변호할 수 없으면 충분히 양해가 될 수 있는 상황도 비행을 저지른 것으로 몰리게 마련이다. 그는 주위사람들로부터 충분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악의 길을 달려가는 것으로 오해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니 콧수염까지 기른 불량청년을 아무도 동정하지 않았고, 시 당국이나 재판부에서도 중국 갱단 사건을 조속히 마무리짓고 차이나타운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1977년 10월 교도소 안에서 다른 백인 갱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고 정당방위로 그를 살해한 것까지 유죄로 인정받아 그는 꼼짝없이 사형수가 되었다. 이 때 재판이 벌어진 새크라멘토(캘리포니아의 州都)에서 유니언지의 기자로 활약하던 이경원 기자가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도 처음에는 "불우한 한국 청년이 미국에서 희생되는구나" 생각하고 이미 4년도 넘은 사건을 파헤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경원 기자가 옥중에서 만나 본 이철수는 불우하기는 했지만 선량한 청년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벗겨줘야겠다고 마음먹고 관련인사들을 찾아다니는 한편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을 뒤졌다. 그리고 재판의 허점을 찾아내 1978년 1월 29일 새크라멘토 유니언지의 1면 톱 기사로 "이철수에 대한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의 유죄판결은 잘못되었다"고 보도했다.

서양사람들이 보기에 동양사람들은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키도 작은 이철수가 범인으로 지목된 것은 부당하고, 무엇보다도 중국말도 못하는 그가 갱단의 행동대원이 되었을 리 만무하며 이에 관한 유력한 증거들이 재판 과정에서 일체 묵살되었음을 폭로하였다. 그가 100차례도 넘게 탐사보도를 한 영향으로 한인사회는 물론 아시안 커뮤니티에서도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마침내 1978년 11월 이 사건의 결정적 증인이 "이철수는 범인이 아니다"라고 증언을 번복하면서 그에 대한 재심이 결정되었다. 1982년 9월 샌프란시스코 법원에서 열린 재심판결에서 배심원들은 전원일치로 이철수에게 무죄를 평결했다. 1983년 1월 캘리포니아주 고등법원은 이철수 사형선고 판결을 무효화하였고, 이어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에서도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이철수를 구한 미국의 보통시민 영웅들 이 사건은 여러 가지 면에서 미국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동안 숨죽이며 살던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모처럼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고, 무엇보다도 이경원 기자의 사명감 넘치는 탐사보도(investigative report)가 시민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의 양심들도 불량기 있는 동양청년을 미국 사법제도의 수레바퀴에 제물로 바칠 수 없다며 구명운동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철학교수 자리를 내던지고 사립탐정이 되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주력했던 조시아 "팅크" 톰슨, 그의 1심 변론에 매달렸던 레오나드 웨인글라스 변호사와, 재심 변호사였던 스튜어트 핸론 변호사, 그리고 재심 때 이철수의 무죄를 확신하고 배심원회의에서 그에게 유리한 평결을 이끌어냈던 스콧 존슨 씨는 그를 살린 보통시민 영웅들이었다.

그 모든 사람이 25년이 흐른 후 UCLA의 한 강의실에 모인 것이다. 이 사건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내가 보기에도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다.
세월은 과거의 상처를 아물게도 하고, 그 때 그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어떠한 모습으로 바뀌었는지(다큐에도 등장하였던 더벅머리 핸론 변호사는 머리숱이 거의 없는 중년 아저씨가 되었다) '삶의 여정'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당시 이철수 변호인단의 일원이자 후원회 회장을 맡았던 유재건 변호사는 한국에 돌아와 교수, 방송인, 국회의원이 되었고, 민완 탐정이었던 팅크 톰슨은 지금도 여전히 소수인종의 용의자가 갱단관련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는 사건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한창 이름을 날리던 웨인글라스 변호사와 핸론 변호사도 이미 현직에서 물러난 모습이었다. 스콧 존슨 씨는 그의 겸손하고 너그러운 품성만큼이나 여유있게 나이 들어 보였다.
풍채 좋던 이경원 기자가 바짝 마른 할아버지가 된 것이야 그렇다 쳐도, 이 사건의 주인공은 그 후에 험한 풍파를 잇달아 겪었는지 사진과는 전혀 딴 판인 모습(얼굴과 손에 화상을 입은 흔적)이 되어 있었다.

로푸키 교수의 명강의

요즘 한국의 법대교수가 미국 대학에 교환교수로 가려면 돈을 싸들고 가야 한다. Visiting Scholar Fee는 재정확보에 부심하고 있는 미국 로스쿨들이 도서관 출입증과 캐럴을 마련해 주고 패컬티 콜러퀴엄이나 관심있는 수업을 청강하는 데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동부의 명문교는 1만불이 넘었다고 하며 서부의 유명 대학들도 몇 천불씩 내야 한다. 방문교수가 강의를 하면 할인혜택이 있다. 미국의 장기체류 비자 얻기가 쉽지 않은 마당에 DS-2019 서류를 받아 가족들까지 J1/J2 비자를 얻으려면 그 정도의 대가는 지불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로푸키 교수의 파워포인트 강의 그러니 처음 도서관 출입증과 개인용 좌석(carrel)을 배정받고 나서 어떻게 해서든지 본전을 뽑아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우였다. 내 경우 판례집과 논문집으로 둘러싸인 로 라이브러리에 앉아 책을 보거나, 나를 초청해준 로푸키(Lynn M. LoPucki) 교수의 상법(담보거래법) 강의를 들으면서 본전을 뽑고도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푸키 교수의 강의는 2006년 가을 학기에 하버드 로스쿨에서 강의를 들었던 서울중앙지법의 문유석 판사가 국내에 소개를 한 바 있지만, 로푸키 교수는 학생들보다 먼저 수업시간 시작 5분전에 입실한다. 그의 저서(Aspen출판사 간 Secured Credit)가 교재임에도 파워포인트로 강의를 하므로 이리저리 전선을 연결하고 노트북과 빔 프로젝터를 켠 다음 강의할 대목을 찾는 데 4-5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같은 교수임에도 나는 어쭙잖게 "Academic Fifteen"(과거 독일에서 대학강의를 15분 늦게 시작하던 전통) 운운하며 5분쯤 늦게 수업을 시작하였던 게 부끄러웠다.

로푸키 교수는 강의시간 중에 농담이나 허튼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출석도 따로 부르지 않고 좌석배치도에 각자 출석 표시를 한 후 제출하도록 했다. 수업이 시종 딱딱하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스피디하게 이루어지므로 예습을 하지 않고 들어가면 도저히 강의를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학기초 실러버스에 기재된 대로 거의 정확하게 진도가 나갔다. 이곳 로스쿨은 학비가 비싸기 때문인지 한국에서처럼 종료시간보다 일찍 끝내거나 휴강을 하면 교수가 학생들에게 그만큼 등록금을 돌려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강의시간에 노트북 정리도 하고 카드게임도 하는 학생들 로푸키 교수의 타이틀에는 "시큐리티 퍼시픽 은행"이 붙는다. 그의 전공분야가 도산법, 담보법, 정보법인 만큼 이 은행에서 연구비를 지원하는 석좌교수라는 의미이다. 로푸키 교수는 개인적으로 1980년대 이후 700개가 넘는 도산법 사례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학자는 물론 실무가와 일반인에게 무료로 공개하고 있었다. "그 엄청난 작업을 어떻게 하셨느냐"는 질문에 "늘 이렇게 혼자 하지요"라는 우문현답을 들었을 뿐이다.

내가 UCLA 로스쿨에 올 때 로푸키 교수의 초청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와 논문을 토대로 나의 관심사항을 깊이있게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은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동산담보를 전자등기하는 문제라든가, 우리나라 도산법제의 개선방안을 모색함에 있어 그 이상 가는 전문가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주장하는 팀 프로덕션으로서의 도산절차는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이론(Creditors' Bargain Theory v. Team Production Theory)이었음에도 하이닉스, 외환은행과 같은 우리나라의 구조조정 대상기업들의 생존전략을 세우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이론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바로 연구년을 보내는 교수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논문을 한 편 쓸 수 있는 귀중한 자료와 아이디어를 구한 것이 몹시 기뻤다.
In the English version

우수교수 시상식의 주인공은 한국인 교수

우수교수 표창식에서 인사말을 하는 UCLA Law 학장 학기도 중반을 넘어선 4월 19일 로스쿨에서는 이색적인 행사가 열렸다. 단순히 상을 주고받고 기념사진을 찍고 끝내는 게 아니라 우수교수법 수상자가 직접 자신의 교수법을 공개한다고 했다.
금년도 수상자는 바로 한국계인 제리 강(
Jerry Kang) 교수였다. 방문교수들(visiting scholars)에게는 미처 통보가 없었지만, LL.M. 과정에 유학 중인 한국 변호사가 알려주어 대구지검의 여환섭 부부장검사와 함께 참석하였다.
UCLA 패컬티는 대부분 하버드, 예일 출신인데, 제리 강 교수는 그 중에서도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수재급 교수로 꼽힌다. 재학 중에는 우등생들만 할 수 있다는 하버드 로 저널의 선임편집자(supervising editor)를 했고 제9지구 고등법원 판사의 재판연구원(clerk)을 역임하였다. UCLA 로스쿨에서는 민사소송법과 아시아-아메리칸법, 통신법을 담당하고, 사이버법(cyberlaw), 소수민족인권법(Critical Race Study)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통신법과 정책(Communications Law & Policy): 케이스 교재](2005)가 있다.

로스쿨 입구에 게시된 제리 강 교수의 우수교수 수상 포스터 1430 강의실에는 강 교수의 부인과 어린 딸, 학장을 비롯한 많은 동료교수들과 교직원, 학생들이 강 교수를 축하하러 나와 있었으며, 강 교수와 함께 무예를 단련하는 화랑도의 이태준 사범도 앞자리를 빛내주었다.
이날 시상식은 UCLA 로스쿨 쉴 학장(Dean Michael Schill)의 소개말로 시작되었다. 강 교수는 지적이고 나무와 숲을 함께 보는 우리의 모델이 되는 교수(model professor)로서 항상 미소짓는 얼굴, 열정에 넘치는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부상은 법학도들이 늘 참고하는 길벗 아웃라인과 웨스트로 데이터베이스를 경영하는 러터(William Rutter) 씨가 제공하므로 이를 모른 척 할 수 없을 것이라며 참석자들을 웃겼다.
교수법이 탁월(excellence in teaching)하다고 강 교수를 표창하는 이유는 그의 강의방법(teaching manner)이 정력적(energetic)이고 변덕스러운 유머(quirky humor)로 가득차 있으며 열정(enthusiasm)이 넘치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그의 강의내용이 매우 잘 조직화(very well organized)되어 있으며 교수와 학생들이 지적이고(very intelligent) 스마트(friggin' smart)한 수업분위기를 만든다고 말했다.

러터 상(Rutter Award)을 받은 후에 등단한 강 교수는 자신의 교수법(pedagogic method)의 요체와 실제 사례를 직접 시연해 보였다. 그는 멀티미디어, 도표를 이용한 강의안을 마련하고,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쉴 새 없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져 원하는 답변을 이끌어낸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시각적인 강의기법(visual presentation)을 즐겨 쓰지만 이러한 기술을 만병통치약(panacea)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왕년의 인기 드라마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Paper Chaser)에 나오는 한 장면을 보여주고, 킹스필드 교수처럼 질문을 하고 답변을 듣고 또 질문을 하는 문답식 수업을 하지만, 이상한 질문으로 학생들을 괴롭히거나(curry favor, harass students) 교수가 더 스마트하다는 것을 과시하지는 않는다 했다. 강 교수는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공부하고 로여로서의 자질을 연마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데, 변호사란 생각이 기민해야 하고(think fast) 의사소통이 원활해야 하며(communicating clearly) 핵심사항을 잘 설명하여야(answering objects)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리 강 교수의 멀티미디어 강의 강 교수는 화랑도 수련자로서 법학공부와 무예단련의 공통점(analogy)을 설명하기도 했다. 예컨대 전투(combat)하듯이 한다는 것, 능동적으로 공부(active learning)하는 것이 중요하고 자아의 문제(problem of ego), 기술과 덕목(technique and virtue)을 중시하는 것도 비슷하다고 했다. 실제로 민사소송절차는 기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수업 중에 학생들과 교감(empathy)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며, 지적인(intellectual) 것뿐만 아니라 감정적(emotional)인 교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적절한 유머를 구사하며 재미있게(make fun) 수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학생들과 그들의 말을 존중함(taking you and your words seriously)으로써 학생들로부터 정직하게 존경(respect and honesty)을 받을 수 있음을 지적했다.

강 교수는 교수와 학생 사이의 간극(chasm)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학생이 원하는 것은 그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What you want is not what you need.)는 말도 했다. 배움이라는 것은 투쟁을 요하지만(Learning requires struggle) 교수를 먼저 탓하여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버지니아테크 총격사고 때 제자들을 보호하려고 애쓰다 유명을 달리한, 홀로코스트의 생존자 리비우 리브레스쿠(Liviu Librescu) 노교수의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의 인생이 여기에 달려 있는 것처럼 공부하고, 교직이 성스러운 책임인 것처럼 가르치자"(Learn as if your life depends on it. Teach as if it is a sacred responsibility.)며 끝을 맺었다.

나도 같은 법학교수이지만 머리를 써서 이렇게 강의안을 준비하고 학생들과 교감을 나누는 강의를 하였던가 자문하게 되었다. 법전을 펼쳐보라고만 하였지, 찾는 데 몇 분, 읽는 데 몇 분씩 시간을 허비하는지 개의치 않았었다. 앞으로는 강의안도 멀티미디어 교재로 새로 준비하고 학생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야 함을 제리 강 교수는 몸소 보여주었다.

Nobless Oblige: 말리부의 게티 빌라

게티 빌라 바깥 정원 4월 27일 2주 전에 예약을 하고 산타모니카에서 태평양해변도로(PCH: Pacific Coast Highway)를 거쳐 찾아간 게티 빌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미국 도처에 있는 옛날 부자들의 맨션, 미술관하고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뉴포트의 맨션은 규모나 장식 면에서 이를 능가하고, 어느 박물관에 가든지 고대 로마의 조각과 유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람객들을 안내하는 할머니 자원봉사자로부터 가이드북에도 없는 설명을 듣고 나서는 뚜렷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게티 빌라는 1997년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쳤는데 게티뮤지엄과 마찬가지로 입장료는 무료인 대신 주차료만 8달러를 받는 점이 이색적이다. 빌라는 뮤지엄과 달리 인터넷 예약을 요하는데 날짜와 시간대를 지정함으로써 적절한 관람인원을 통제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2시에 예약을 하고 1시 20분에 찾아가도 입장을 시켜주었다.]

첫째는 그가 예술품을 수집하고 빌라를 짓게 된 경위였다.
게티의 아버지(George F. Getty)는 미네소타의 보험전문 변호사였는데 그의 고객이 1,500불의 변호사비용을 내지 않고 남부의 인디안구역으로 도망가자 그를 쫓아갔다. 결국 그곳(1907년에 46번째 주인 오클라호마로 승격)의 황무지를 대신 넘겨받았는데 그 땅에서 석유가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영화 "자이언트"의 줄거리와 비슷하지만 "하늘이 낸 부자는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게 아니라 돈을 줍는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1904년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오클라호마로 이주하였다. 첫딸을 장티푸스로 잃은 후 1892년 뒤늦게 얻은 아들 쟝 폴 게티(J. Paul Getty)는 애지중지 키우는 대신 아버지 석유회사에서 일당을 받고 밑바닥부터 일하도록 단련을 시켰다. 게티는 21살 때 아버지로부터 자금을 빌려 유정을 사들였는데 2년만에 1백만달러를 벌었다. 그러나 부친은 게티가 여자나 밝히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며(실제로 다섯 번 결혼) 가업을 물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게티는 그 특유의 기업가정신(Millionaire Mentality)으로 부친의 몇 배 가는 부를 축적하였으며, 노년에도 아랍산유국 왕족들과 친해지기 위해 친히 아랍어를 배웠다고 한다.

게티가 아끼던 헤라클라스 조각상 1930년대에 시작한 예술품 콜렉션도 아버지의 예상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전성기에 "석유왕", "세계 최대의 부자" 소리를 들었던 만큼 안목이나 규모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게티는 말년에 미국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 Oblige)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1976년 그의 사후에 유산을 신탁하여 재단을 설립하였다.
현재 게티재단은 말리부의 랜치 옆에 로마풍의 빌라를 건축하였고, LA에는 미술관인 게티 센터를 새로 건립하여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말리부 해안절벽(Malibu Palisades) 위의 랜치에 세워진 게티 빌라는 고대 로마 유물의 전시와 로마양식의 조경으로, UCLA의 프리웨이405 건너편 언덕 위에 새로 건축된 게티 센터는 동서고금의 미술품 전시 및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정원으로 유명하다.
젊어서 옥스퍼드에 유학을 하였던 게티는 유럽 각지로 여행을 다니면서 안목을 넓히고 예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게티 빌라는 게티가 이태리를 여행하던 도중 나폴리 부근의 베수비우스 화산으로 폐허가 된 헤라큘레니엄(Heraculaneum) 도시의 빌라(Villa dei Papiri 본래 카에사르 장인의 소유였다고 함)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게티 빌라 회랑의 깨진 계란그림장식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는 열주회랑(Peristyle)에 그려져 있는 계란에 얽힌 에피소드이다. 게티는 옛날 로마인들이 살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고 로마 사람들은 회랑을 거닐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상상하기를 즐겨 했다고 한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계란을 생명의 상징으로 여겨 벽 등에 장식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므로 게티 빌라에도 총 6만1천개의 계란을 그려 넣어야 했다. 이 작업을 화가의 젊은 조수가 맡아 하였는데, 그는 벽에 금이 간 곳에는 깨진 계란 틈으로 노른자가 흘러나온 모습을 그려 넣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 작품(?) 하나로 그는 단순하고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는 작업을 살아있는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놀라는 한국인의 디아스포라(Diaspora)

LA의 코리아타운 거리풍경 LA의 코리아타운(Korea Town)에 들어가 보면 거리에 즐비한 한글 간판들이 이곳이 서울 한복판이 아닌가 착각하게 한다. 그래서 이곳을 통과하는 대로인 윌셔가는 "을지로", 올림픽가는 "월곡로", 웨스턴가는 "서부로", 버몬트가는 "보문로"라고 불리울 정도이다. 15년 전 4.29 흑인폭동이 일어났을 때 LA 도심의 한인업소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지금은 이곳 코리아타운이 전세계와 커넥션을 갖는 상권으로 부상하고 있다.
4월 16일 버지니아 공대에서 교포청년 조승희가 벌인 총기사고는 너무 끔찍한 일이었지만, 역설적으로 한국인을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난다(?)는 것을 미국 사람들에게 가르쳐줬다고 말하는 교포를 보았다. 과시할 일이 따로 있지 . . .
LPGA를 석권하다시피 한 한국의 여성골퍼들, 반기로 유엔 사무총장, 작년 12월 CBS TV의 리얼리티 쇼 "Survivor, Cook Islands"에서 우승한 권율 씨(예일법대 졸, 매킨지 컨설턴트 변호사), 27세 약관에 UCLA 로스쿨의 교수가 된 하버드 출신의 제리 강 교수 모두 자랑스런 한국인이 아니던가.
* 필자는 2007년 5월 제리 강 교수의 한국 방문기간 중에
국민일보 인터뷰를 주선하였다.

현재 통계상으로 보면 인구당 이민자의 비율이 제일 높은 민족은 유대인 다음에 한국인이라고 한다. 인구비율로 따지면 5천만명이 해외에 나가 살고 있는 중국보다도 높다. 이민역사가 1백여년 밖에 되지 않는 폐쇄적이고 은둔자적인 나라(hermit country)로서는 기적과 같은 일이다.
한인의 대량 해외이주는 일제의 강제침탈로 나라를 등지고 떠나는 일이 보편화되면서 시작되었다. 대하소설 "토지"에도 나오지만 한인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 하와이 등지로 떠났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일제시대에는 약 3백만명의 인구가 해외로 이주하였다.

LA 도심에 위치한 동양선교교회(당회장 강준민 목사) 두 번째 이민이 급증한 사건은 6.25 사변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종전 후 미국 군인들과 결혼한 한국 여인들이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갔다. 먼저 이민을 간 여인들이 남은 가족을 초청하여 대대적인 가족이민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가족이민이 연쇄적으로 일어나 하나의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이 이민문호를 개방하면서 사업이민이 급증하고, 한국의 경제발전으로 미국과의 교역량이 늘어나자 대기업의 지.상사 요원들이 미국 등지로 대거 이주하였다. 80년대에는 방문 케이스로 미국에 왔다가 불법체류자로 남아 미국에서 생활터전을 일군 사람들이 많았고 신분이 적법하게 바뀌면서 가족을 초청하는 케이스가 늘어났다. 1990년대부터는 한국 정부가 세계화를 부르짖고 조기유학이 성행하면서 유학생과 학부형의 동반진출이 크게 늘고 있다.
이리 하여 현재 미국과 중국에 각각 2백만명의 한국 교포들이 살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일본에 70만명, 구 소련 땅 중앙아시아에 50만명이 살고 있다. 미국에는 한국 유학생만 현재 10만명에 육박한다. 2004년의 제3차 세계한인선교대회의 공식발표에 의하면 172개국에 7백만명의 해외동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반도가 비좁기는 하지만 한국인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왜 세계로 떠나는가?
일제치하에서는 일본의 침탈에 못 이겨, 한국전쟁 후에는 먹고살기가 힘들어 떠났지만 지금은 자녀들에게 국제감각을 익히고 좋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또는 한국의 국력신장을 배경으로 한국과 관련된 사업을 하기 위해 조국을 떠나고 있다. 특히 어학연수나 조기유학은 한국의 젊은이들을 저 멀리 아프리카 남단의 남아공까지 내보내고 있다.

UCLA 로스쿨의 제리 강 교수와 함께 그런데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일은 한국인들은 이민을 가면 제일 먼저 교회를 찾거나 교회부터 개척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200여만명이 살고 있는 미국에 이민교회가 약 3500여개나 세워졌다. 이는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후 교회부터 세운 것이나, 유대인들이 고국을 떠나 가는 곳마다 유대회당(Synagogue)을 짓고 이곳을 중심으로 생활했던 것과 유사하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약 2백만명의 조선족이 중국에 살고 있는데, 중국의 개방 이후 한국인들이 맨먼저 복음을 전해준 사람들이 바로 조선족이며, 이들은 현재 중국 복음화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재 상당수의 교회가 세계선교전략의 일환으로 세워졌고 세계선교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와 같이 한인이민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고 한민족을 통하여 세계복음화를 이룩하려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주권과 아무도 모르는 당신만의 계획(Serendipity) 속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전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분산 Diaspora)를 통해 기독교를 전파하고, 신약시대에 그곳을 거점으로 사도 바울과 함께 매우 효과적인 선교를 감당했다는 점에서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혹자는 우리나라가 "휴대폰과 자동차를 수출해서 번 돈을 유학생 학비와 해외여행경비로 모조리 쓴다"고 한탄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한국인의 디아스포라"로 이해하는 한 한민족에게는 비전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해외에서 성장한 1.5세, 2세 한인들이 이중언어 구사능력과 이중문화 적응능력을 기반으로 세계경영, 세계선교에도 앞장서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희망적이다.
(참고자료: 오운철 목사, "하나님 왼손으로 행하신 선교", LA OMC신문, 2007. 4월호)

로푸키 교수와의 인터뷰   (편의상 경칭은 생략함)

5월 8일 12시 패컬티 스폰서인 로푸키 교수가 초대하여 UCLA 교수회관(Faculty Center)에서 같이 점심식사를 했다.
교수회관은 교수뿐만 아니라 함께 온 일반인도 출입이 가능하였는데(교직원은 사번만 대면 POS 결제가 됨), 홀이 널찍하고 자기가 원하는 음식을 접시에 담아 사 먹게 되어 있었다. 나도 로푸키 교수와 똑같이 이미 만들어 놓은 연어와 야채 파스타를 골랐는데 그는 심장질환이 있어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정말로 연어만 조금 먹는 둥 마는 둥 소식을 하면서 자기에게 맞는 음식은 일본 음식과 일부 이태리 음식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매일같이 직접 만들어 먹으므로 음식 한 가지 한 가지가 귀중하다며 열심히 먹었다. 그러나 기말시험 채점을 하고 있던 로푸키 교수는 1시가 넘자 일어나자고 했다. 결국 1시 15분까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UCLA 로스쿨은 4.30-5.14 기말시험 기간 * 이번에 발표한 "Bankruptcy Fire Sales" 논문은 도산기업을 곧바로 매각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재건을 하는 것이 기업가치를 곱절은 더 받을 수 있어 채권자와 주주들한테도 이익이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언론에도 크게 보도된 이번 실증적 연구결과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어떠한가?
- 내가 논문에서 공격한 변호사나 판사들로부터 아직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 미국에서는 정말로 파산법원을 선택할 수 있는가?
- 그렇다. 회사를 등록한 델라웨어주와 실제 영업활동을 하거나 자회사를 둔 예컨대 뉴욕, 캘리포니아주 중에서 원하는 판결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선택한다. 한국은 어떠한가? 미국에서는 담당판사를 제비뽑기식으로 정하는데 파산사건의 담당 재판부를 누가 정하는가?
* 확실히는 모르지만 사건접수 순서에 따라 일정 기준에 따라서 배정될 것이다. 어느 재판부에 사건이 많이 밀려 있으면 다른 재판부로 넘어가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은 새 도산법을 시행한 지 얼마 안되었음에도 한미 FTA 체결을 계기로 미국식 도산법과의 비교하여 한국 기업에 도움이 될 미국 제도를 과감히 도입할 방침이라고 한다.
- UCLA 로스쿨에 연방파산법 제정작업에 관여하였던 교수가 있다. 원한다면 소개해주겠다.
* 이번 프로젝트를 수임한 한국의 변호사들도 미국에서 공부를 많이 하였기 때문에 이미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연구에 있어서 귀하가 직접 만든 도산사건 데이터베이스(BRD)가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는가?
- 물론이다. 한국에도 그와 비슷한 파산사건 DB가 있는가? 그런 내용의 DB가 있다면 국제비교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 한국에서는 도산법이 인기강좌가 아니어서 이 분야의 전문 연구자가 별로 없다. 그런 DB를 만들기는 힘들겠지만 만들어 놓으면 크게 유익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지금 미국식 로스쿨을 도입하려고 많은 학교가 준비하고 있다.
- 우리가 보기에 미국 로스쿨이 좋은 법률가를 양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 일본도 미국 비슷한 로스쿨을 도입했지만 실패했다는 의견이 많다.
- 법률제도와 마찬가지로 법학교육도 그 나라의 특성에 맞게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정보기술이 발달한 한국에서 RFID를 이용하여 담보관리를 한다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아이디어다. 어떠한 진전이 있었는가.
* 현재 정부에서 동산담보제도 입법작업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기업동산의 전자등기에 RFID를 채택할지는 미지수이다. 그것은 마치 컬럼버스의 달걀과 비슷하다. 현재 유통업체에서는 RFID를 많이 사용하고 있음에도 이를 전자등기에 활용하는 것은 정부관료나 입법자들이 그 기능에 의심이 많은 까닭에 별 진전이 없는 것 같다.

시험기간 중 학장은 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과자와 케익, 음료수를 차려 놓는다 - 이곳에 온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정력적으로 많은 논문을 쓰는 데 놀랐다.
* 귀하의 귀중한 논문을 한국에 번역 소개하는 것이므로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을 한국에 수입하는 것과 같다. 나는 귀하의 팀 프로덕션 이론이 도산법제를 개정하는 데 좋은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보고 한국의 학술지에 기고하면서 도산절차에서는 이사회 중심의 정보공유 스킴이 중요하다는 내 의견을 추가했다.
- 그런데 KEB 사건에서 왜 행장이 BIS 수치를 조작하는 위험한 일을 벌였을까? 일반적으로 값을 많이 받으려고 회사 실적을 좋게 꾸미지 않는가?
* 첫째는 정부가 외환위기 이후에 외자유치에 매달렸는데 미국의 펀드 말고는 시티은행 같은 정통 금융기관은 매입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사겠다는 사람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검찰 수사결과에 의하면 당시의 행장은 개인적으로 행장 자리를 보장받으려 했다고 한다. KEB 사건에서는 오히려 국세청이 강력히 론스타의 처벌을 요구했다. 룩셈부르크를 거점으로 KEB에 투자를 한 것이라 양도차익에 대해 세금을 한 푼도 안내려 했기 때문이다.
- 그런 일은 미국에서는 다반사이다. 미국에서는 버뮤다, 케이만 제도가 많이 이용된다.

* 나도 존 그리샴 소설과 영화에서는 케이만 제도가 예외 없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어떤 곳인가 호기심을 느꼈다. 한국 기업들은 말레이시아 라부안을 조세피난처로 많이 이용한다.
- 나도 그리샴처럼 남부의 소도시(Gainesville)에서 8년간 변호사를 했다. 플로리다 대학 경영학부에서 상법을 가르쳤는데 나의 경력에는 별 도움이 안되었다. 존 그리샴의 "레인 메이커"에 나오는 젊은 변호사처럼 비슷한 일을 하다가 교수가 되었다.

* 린(Lynn)이란 이름이 여자 이름 같은데 무슨 숨은 이야기가 있는가.
- 부모님이 지어주신 것이어서 만족할 만한 답변은 못하겠다.
* 성은 뭐라고 발음하는가?
- 로--키라고 한다. 폴란드 성씨이다. 할아버지가 1914년 1차 대전 직전에 폴란드에서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 오셨다. 미국은 자유스러운 나라여서 아버지도 나도 군대에 안 갔다.

* 가을 학기에 센트루이스 워싱턴대학에서 방문교수로서 강의를 하기로 했는데 언제 떠날 예정인가.
- 8월 초에 연구조교의 임기가 끝나므로 그때까지 학교 연구실에 나올 예정이다. 센트루이스는 덥고 폭풍우도 잦고 날씨가 별로 안 좋다. 집사람이 워싱턴 대학 교수인데 방학 때면 살기 좋은 LA(Century City에 거주)로 온다.
* 매일 학교에만 나오면 가족들이 싫어하지 않는가?
- 집사람도 자기 연구하느라 바쁘다.

의지의 한국인 석세스 스토리: WTCA 수석부총재

5월 중순 LA 동양선교교회(OMC)에서 세계무역센터협회(WTCA) 수석부총재인 이희돈 박사(Dr. David Hee-Don Lee)의 간증집회가 열렸다. 한국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분이고 9.11 사태 때 기적적으로 살았다는 간증기를 전에 어디서 본 것 같아 집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5월 20일 OMC 설교 시간에 이 박사의 신앙간증을 듣고 난 후 이 분이야말로 "의지의 한국인"의 표상이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 박사의 석세스 스토리는 이민 1세대로서 미국 주류사회(main stream)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신앙고백은 크리스천들에게 많은 도전을 안겨주는데 관련 기사동영상을 통해 볼 수 있다.

이 박사는 아주 동안(童顔)이지만 1959년생으로 1982년 외국어대 서반아어학과를 졸업하고 석사과정까지 마친 후 스페인 유학 길에 올랐다. 5대째 기독신앙가정에서 자란 이 박사는 "조상의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며 달랑 편도 항공권만 사주신 부모님 덕분(?)에 처음부터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학력을 보면 매우 화려하다. 스페인 국립 마드리드 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영국 옥스퍼드 해리스 맨체스터 칼리지에서도 수학하였다. 미국 LA 풀러턴 소재 웨스턴 스테이트 유니버시티 로스쿨에서 JD 과정을 마쳤고, 경제학 교수로서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UC San Diego)과 일본 교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박사의 간증을 들어보면 결정적인 시기에 그의 부인(이순성 여사)이 그의 인생진로를 바꿔놓은 것을 알 수 있다. 스페인에서 학위과정을 마치지도 않고 무작정 대서양을 건너 온 것이나(재정보증서도 없이 "내가 미국에 가야 할 10가지 이유"서만 제출하고 미국 영사로부터 3시간만에 미국 비자를 받았다고 한다), 교토대학 초빙교수를 마치고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멕시코 오지의 선교사역에 뛰어든 것도 부인 때문이었다.

OMC에서 간증하는 이희돈 박사 그러나 '무역확대를 통한 지역개발'을 주제로 한 그의 논문이 WTC의 주목을 받아 1993년 WTC에 영입되고, 1997년에는 최연소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2002년에는 Vice Chairman으로 직위가 수직상승하였다. 지금은 연임에 성공한 수석부총재로서 고령인 현 총재가 사임하면 총재직을 승계할 수 있는 유력한 지위에 있다고 한다.
이 박사는 WTCA 총재가 자기를 보고 "당신은 다 좋은데 능력의 일부밖에는 WTCA를 위해 쓰질 않아"라고 말한다고 전했다. 그가 주일날 교회 출석을 위해 사회활동도 자제하는 등 헌신적인 신앙생활(fully committed to God)을 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자기의 능력(capacity)은 솔직히 Chairman의 30%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WTCA 사무실에 출근할 때마다 하나님께 "100% 인물의 20% 헌신을 받으시는 것보다 30% 짜리인 자신의 100% 헌신을 원하시지 않습니까?" 하고 기도를 올린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무역협회 회장은 부총리나 산자부장관 또는 재벌기업의 총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자리이기에 세계 92개 회원국에 320개 센터를 총괄하고 있는 그의 역량이 더욱 돋보인다.

그렇다면 이 박사의 성공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그는 유학에 떠날 때 "세계를 그의 품안에"(World in His Arms)라는 꿈과 비전을 품었다고 한다. 그는 복음전도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시간만 나면 유럽 전역으로 전도여행을 다녔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영어, 불어, 이태리어를 마스터할 수 있었다(그는 새벽기도를 두 시간 이상 하는데 각 나라 말로 기도를 하다보면 2시간도 부족하다고 한다). 여러 나라 사람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설득력과 협상력이 저절로 길러졌다.
처음 미국에 갈 때에는 비행기 표를 살 수가 없어 원양선원들이 타는 스판덱스라는 좌석도 없는 비행기를 얻어 탔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누구나 벌벌 떠는 문신 투성이의 왕고참에게 대담하게 전도를 하여 그의 회심을 가져오기도 했다.

두 번째 비법은 글로벌화 전략이다. 그는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스페인과 영국, 미국에서 각각 공부를 하였다. 학위논문의 주제는 "무역증진을 통한 지역개발과 세계평화"였다. 그도 자신의 주장이 나중에 WTC나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의 이론적 토대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이 박사는 미국으로 이주한 후 바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지만, 태생이 한국인이기에 '서구를 가장 잘 이해하는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인정받는다고 말했다. 그가 옥스퍼드 대학의 리전트(이사회) 멤버가 된 것이나, 풀브라이트위원회, 노벨상위원회의 부위장직을 맡고 있는 것도 그의 글로벌한 배경이 큰 힘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그의 성공비결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신앙의 담대함과 신념에 찬 열정이라 하겠다. 그는 어떠한 자리에서도 신앙인으로서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었다. 스스로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자인하고 하나님께 함께 해주시기를 간구하기에 대담함이 생긴다고 말했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성공하면 자신의 능력으로 성취한 것이라고 자부하겠지만, 자신은 워낙 부족한 사람이기에 자기가 이룩한 것은 모두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이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재정관은 너무나 뚜렷하다. 수입을 예상하고 미리 십일조를 드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빚을 지움으로써 "이래도 축복해 주지 않으시렵니까"하는 기도를 한다고 한다. 그는 마음속으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회가 있을 때면 1백만불, 2백만불씩 선교헌금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스스로는 선교 능력이 부족하지만 전세계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일은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희돈 박사가 바로 밑에서 목격한 테러 항공기 이 박사는 이럴 때마다 그의 부인이 자신을 이끌었다고 고백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OMC에서의 마지막 집회시간에는 반려자가 "World in Her Arms"가 될 수 있어야 자신도 성공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내가 보기에도 이 박사보다 그의 부인이 참으로 놀라운 분이었다. 이 박사의 간증을 통해 들은 것만 해도 그와의 결혼을 피해 미국으로 먼저 떠나 온 것, 일본에서 초빙교수를 마치고 미국에 도착하자 곧바로 멕시코 오지 선교를 강권하다시피 한 것, LA에서 워싱턴으로 옮겨갈 때 집 판 돈을 선교헌금으로 바치자고 한 것 등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결과는 매번 전혀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으로 이어졌다. 특히 9.11 사건 전날 밤 경련을 일으키며 밤새 잠을 못 이룬 것도, 영화 "Minority Report"에서 보듯이, 남편이 끔찍한 사고를 당해서는 아니되겠다는 예지(precognition)능력의 소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이 박사의 사무실이 테러리스트의 항공기가 충돌한 바로 그 층에 있어 NYT는 당연히 이 박사를 사망자 명단에 올려놓았다). 간증 가운데 이 박사는 위의 사건들을 이야기하면서 결혼한 것을 후회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반어법(反語法)적인 애정고백처럼 들렸다.

나는 그의 간증을 처음 듣고 인터넷에서 간증녹음과 동영상을 여러 편 들어보았는데 그는 신앙간증을 하는 것만으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가 행한 것은 누가 보더라도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미국식 이름인 다윗이 물매돌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렸듯이, 실제로 바위가 깨지는 놀라운 광경을 우리 모두 그를 통하여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In the English version

어느 한국인의 비극적인 몰락

미국에는 불법체류자와 유학생을 포함하여 200만명에 육박하는 한국인들이 살고 있다(2000년 미국 인구센서스 통계에 의하면 아시아계로는 인도, 중국, 필리핀, 베트남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많은 1,076,872명이다).
그러니 이희돈 박사같이 "American Dream"을 이룬 사람도 있지만 그 문턱에서, 아니 문간에 가보지도 못하고 쓰러진 사람들도 많다. 5월 24일 LA의 교포신문에는 안타까운 기사가 실렸다.

하나는 경찰특공대(SWAT)까지 동원되었던 어느 교포의 치정극에 의한 총기 살인사건의 속보였고, 다른 하나는 아이비리그 출신의 엘리트 청년이 허위 세금환급(tax return) 신청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기사였다.

LA 코리아타운에서의 총격사고 LATimes 뉴스화면 22일 오후 LA 한인타운의 갈비냉면전문 서라벌 식당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던 중년 남자(나세균 47세)가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하는 것처럼 뭐라뭐라 하다가 업주(임효진 51세)를 총으로 쏘아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나도 마침 한인타운에 이발을 하러 갔다가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들이 몰려 가길래 무슨 큰 사건이 터졌나 보다 생각했는데 버지니아텍 사고가 벌어진 지 한 달만에 또 한인에 의한 총기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LA경찰국(LAPD)은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범행동기는 범인과 그의 아내, 피살자가 얽힌 삼각관계라면서 다른 한인들이 불안해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신문기사는 나 씨가 한국의 명문 K대를 졸업하고 가족과 함께 이민 와서 한 때 잘 살다가 부동산중개업이 불황을 타면서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서라벌 식당에서 웨이트레스를 하는 부인과 불화가 잦아졌다고 전했다.
신문기사는 또 한인들이 정신적인 여유가 없는 이민생활 속에서 속내를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나 친척이 없다 보니 고민과 갈등이 누적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신문은 한 달 전에 한인 여성이 심야에 남편을 총격 살해한 후 자살한 사건을 예로 들고 극한 분노를 여과없이 분출하는 한인 교포들의 비극이 잇따르는 것에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또 다른 기사는 컬럼비아대학에서 응용수학을 전공한 캐나다 시민권자인 선위진(24세) 씨가 허위로 뉴욕 주정보에 30여 건의 세금환급을 신청한 혐의로 5월 22일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된 사실(보석금은 50만달러로 책정)을 보도했다.
선 씨는 2005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모건스탠리 런던지사, 시티그룹 글로벌, 뉴욕 바클레이은행 등에서 투자전문가로 근무하였는데(이렇게 세계 유수의 은행들이 스카웃할 정도라면 아마도 천재급인 모양이다) 그의 비상한 머리를 불법으로 세금을 환급받는 일에 쓴 것이다.

신문기사에 의하면 선 씨는 지난 3-4월 홈리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이용해 이들이 연봉 7-9백만 달러를 받는 고소득 금융종사자로 둔갑시켰다고 한다. 이들의 신용정보를 도용해 허위로 520만달러의 세금환급을 신청한 선 씨는 이미 572,500달러를 환급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타인 계좌에 입금된 세금환급금 189,671달러를 인출하려는 그를 의심스럽게 여긴 은행원의 신고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미국에서 몇 해 살지 않은 나도 미국에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이 "탈세와 마약"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선 씨가 '눈먼 돈'이라 생각하고 세금에 손을 댔다가 최고 30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선 씨는 왜 그의 비상한 수학적 두뇌를 좀 더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일에 활용하지 않았을까? 이는 그의 유전적 성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후천적인 교육이나 환경 탓이었을까?
그가 미국의 명문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지도자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의무(noblesse oblige)만 자각을 하였어도 이렇게 파렴치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미국의 명문대학들은 공부 잘하는 학생만 뽑지 않고 커뮤니티의 리더가 될 만한 학생들을 일찌감치 발굴하여 훈련시키는 것을 제1의 사명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에 기여해야 대학도 산다

UCLA 교정을 분주히 오가는 학생들 5월 25일자 UCLA 대학신문(Daily Bruin) 1면의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UCLA의 LA시와 캘리포니아주에 대한 경제적 기여도가 연간 90억달러가 넘는다는 한 연구기관의 보고서 내용이 실려 있었다. LA경제개발공사(Los Angeles Economic Development Corporation)라는 곳에서 조사해 보니 UCLA가 LA 지역에 미치는 경제적 효과(economic impact)는 연간 93.4억달러, 캘리포니아 주 전체적으로는 98.9억달러에 달한다는 것이다.

연구보고서는 그 이유로 UCLA가 양적으로 팽창하고 있어 건설공사 발주 및 각종 물자 구매, 고용실적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것을 들었다. 사실 UCLA 및 부속기관은 LA 지역에서 일곱 번째로 많은 2만7천명(교수진 포함)을 고용하고 있다. 연구보고서는 또 UCLA의 왕성한 소비활동으로 주변지역에 대략 4만2천8백명의 고용유발효과가 생긴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UCLA 의과대학에서는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고 있으며, 공학, 사회과학, 예술 분야에서도 학문과 기술, 예술의 발전을 촉진하고 지역사회 주민들의 삶의 질(quality of life) 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UCLA가 미국에서도 손꼽는 일류 대학으로서 교육에 미치는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많은 학생들이 UCLA에 들어오려고 노력하는 만큼 신입생들의 수준이 높고(GPA 평균이 전년의 4.14에서 4.18로 상승) 그 결과 UCLA가 LA의 교육과 문화, 경제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심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신문(Daily Bruin)의 5월 14일자 기사에서 읽었지만, 이러한 학교의 역할은 입학사정(admission) 절차에도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예컨대 입학허가의 일정비율을 소수인종(minority)이나 저소득층(연수입 3만달러 이하의 가정)에 배정하여 자기가 속한 커뮤니티의 리더로서 양성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2007-2008학년도에 입학허가를 받고 등록예정서(statement of intent to register: SIR)를 제출한 총 4,636명의 예비 신입생 중 흑인학생이 203명(전년도에는 96명)으로 크게 늘었다는 것이 빅 뉴스였다. 학교는 이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식으로 대학을 다니며 자신과 가족의 삶의 질을 높이도록 권장할 방침이라고 했다. 그런데 저소득층이나 소년소녀 가장(first generation)인 학생의 수는 작년의 1,691명에서 1,260명으로 크게 줄었다고 하여 이들에게 장학금 등 혜택을 늘리는 등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흥미로운 사실은 UCLA 신입생 중에서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계 학생들은 1500명에 육박하여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히스패닉(Chicano and Latino), 흑인(Black), 인디언(Native American)을 인구 수에 비해 적게 입학하는 소수인종(underrepresented races)으로 특별관리하고 있다.

UCLA 캠퍼스의 조각공원 안에서 명상 수련을 하는 학생들 나는 UCLA가 왜 돈을 대줘 가면서 이런 조사연구를 시키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지 궁금하였다.
현재 UCLA는 연방정부 및 지방정부에 도합 12억달러를 세금으로 납부하고 있는데 동시에 주립대학으로서 주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다. 2005-2006년에는 경상운영비의 17%를 주 정부로부터 지원받았다. 이상의 경제적 효과를 고려하면 주민들이 내는 세금 1달러가 UCLA에 투입됨으로써 이 대학교는 지역사회에 15달러를 창출하여 돌려주고 있으므로 이는 매우 효과적인 투자이고 이러한 경제적 효과는 미국 대학 전체적으로도 손꼽을 정도라고 자랑했다.
그 반대급부로서 주 의회가 주립대학에 대한 재정지원을 재개하여 학생과 학부모들의 교육비 부담을 줄여주어야 한다는 게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어찌 보면 뻔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를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하여 설득력을 높이고 학교 관계자들이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놀라웠다.

경희대의 경우 금년도 등록금 인상률을 놓고 총학생회는 학교측의 인상안에 반대하고 있으며 일차로 교.직원들의 급여 인상폭을 등록금 인상률 이내로 못박았다고 한다.
우리 학교에서도 이러한 연구결과가 나와 있는지는 모르지만, 경희대가 지역사회에 경제적으로나 삶의 질 향상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경희대에 다님으로써 어떠한 혜택을 받게 되는지 구체적인 수치와 사례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가 지역사회와 학생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많다면 협상을 해가며 구차스럽게 등록금을 올려받을 게 아니라 당당하게 인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내 자신 연구년 중임에도 강의할 때와 큰 차이 없는 연봉을 받으면서 소속 학교와 우리 학생들에게 얼마나 경제적, 경제외적인 기여를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익사이팅한 고속도로 자동차 여행

인터스테이트 5번 고속도로를 달리는 그레이하운드 미국은 땅이 넓기 때문에 장거리 여행은 비행기를 이용하거나 자동차로 해야 한다.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버스인 그레이하운드가 있지만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역시 자동차가 필요하므로 급한 일정이 아니면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게 된다. LA 시내에서도 뉴욕주나 플로리다주 번호판을 달고 있는 차를 흔히 볼 수 있다.

미국은 사통팔달로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 망이 깔려 있고 도로표지나 지도(요즘은 네비게이션)가 잘 되어 있어 황량한 도로를 몇 시간씩 달리는 것만 제외하면 자동차 여행에 큰 어려움은 없다. 다만 휴게소가 우리나라처럼 고속도로 연변에 있는 게 아니고, 프리웨이에서 나들목(exit)으로 나가 높은 폴대 표시가 있는 식당이나 주유소를 찾아가야 한다. 대부분 큰 쇼핑몰과 함께 자리잡고 있는 곳이 많다.

문제는 액셀을 조금만 밟아도 시속 70-80마일(110-130km)로 달리게 되므로 55-65마일 구간에서 속도위반으로 고속도로 경찰(Highway Patrol)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앞뒤 차량의 흐름을 타고 달리면 큰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고속도로 곳곳에는 경찰 오토바이나 순찰차가 단속을 하고 있고 또 한적한 곳에서는 항공단속을 한다는 경고판도 눈에 띈다. 실제로 규정속도보다 15마일 이상 초과해서 달리면 난폭운전자(reckless driver)라 해서 딱지를 떼는 것은 물론 수갑을 차고 연행될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물론 보험료도 껑충 뛰게 된다.

미국의 고속도로는 트럭, 트레일러가 많이 달린다 최근 미국의 많은 주(26개 주와 워싱턴DC)에서는 경찰 단속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운전자들이 음주운전이나 난폭운전, 어린아이에게 안전벨트를 하지 않은 차량을 발견하면 경찰에 신고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미주리, 루이지애나, 캘리포니아주가 대표적인데 휴대폰이나 인터넷으로 신고를 받으면 즉각 고속도로 경찰이 출동하여 조사를 하거나, 문제의 차량 소유자에게 경고장을 보낸다고 한다(USA Today 2007.6.11자 1면). 우리나라의 '카파라치'처럼 사진을 찍어 보내면 보험회사에서 돈을 주는 그런 식은 물론 아니다.

나도 조카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6월 중순 산호세와 샌프란시스코에 자동차로 다녀왔다. 뻥 뚫린 고속도로에서 단속하는 경찰을 전혀 못 본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 이런 길을 또 달릴 수 있으랴 싶어 시속 70-80마일로 달렸던 것 같다.
도중에 아무 문제도 없었지만 여행을 끝내고 몇 주일이 지날 때까지는 혹시 무슨 고지서가 날아올지 몰라 안심할 수 없었다. 속도위반 딱지 말고도 유료도로 구간을 요금을 안 내고 달렸다는 고지서도 올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주의 고속도로는 대부분 통행료가 없는 프리웨이이지만 일부 구간에서는 1개 차선을 유료로 운영하고 있다.

살아 움직이는 미국의 사법제도

미국의 사법 시스템은, 외국의 법학자가 보기에 예측가능성이 없다 할 정도로 다양하고 역동적이다. 심지어는 교통사고, 소액 채권채무사건을 시민법정의 형태로 열어 TV 중계 하에 재판을 벌이기도 한다. 다음 세 가지 케이스는 2007년 초여름 신문지면을 뜨겁게 달군 사건들이다.

하나는 우리 교포 세탁업자가 소송을 당한 이른바 "5백억원 바지" 소송이다. 바지수선을 의뢰한 손님이 바지를 잃어버린 세탁소 주인에게 5400만달러 손해배상을 요구한 사건이다. 피해액이 1천불이 넘지 않았음에도 워싱턴DC 행정법원 판사인 원고는 일반공중에 대한 '고객만족' 서비스 약속을 어겼다 하여 천문학적인 금액의 손해배상을 요구했다(청구액 중에는 앞으로 10년간 다른 세탁소에 가는 데 사용할 렌트카 비용 1만5천달러도 포함돼 있다).
워싱턴DC의 바트노프(Judith Bartnoff) 판사는 6월 25일 "이성적인 소비자라면 고객만족보장(Satisfaction Guaranteed) 서비스가 고객의 불합리한 요구까지 만족시킬 의무가 있다거나 합리적인 법적 다툼까지 포기하라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원고 패소를 판결했다.

6.26 심야에 Lynwood Detention에서 석방되는 조신한 모습의 Paris Hilton 둘째는 항상 화제를 뿌리고 다니는 힐튼가의 상속녀(heiress socialite) 패리스 힐튼(Paris Hilton)을 재수감하도록 한 LA카운티 고등법원의 결정이다. 패리스 힐튼은 난폭운전(reckless driving)으로 면허가 정지된 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45일 구류형을 받았는데 LA 다운타운의 구치소는 패리스가 형기의 10%를 채우자 석방했다. 그러나 '有錢無罪'라는 여론의 반발에 밀려 재수감되었다가 3주를 더 감옥에서 보낸 뒤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수감자들로 넘쳐나는 LA카운티의 셰리프는 경범의 경우 형기의 10%를 채우면 전자족쇄를 차고 집안에만 있는 조건으로 석방할 수 있는데 법원이 이를 뒤집은 것이다.
패리스 힐튼은 6월 26일 0시가 지나자마자 구치소를 걸어나왔다. TV방송에서는 헬리콥터까지 동원하여 귀가하는 장면을 생중계하는 등 야단법석이었다.

셋째는 2007년 5월 27일자 LA 타임스가 탐사보도한 사건으로 나카라과 등 중앙아메리카의 바나나 농장의 근로자들이 현지는 물론 미국에서도 손해배상 집단소송을 제기하였다는 내용이다. 30여년 전에 바나나 농장에 DBCP(dibromochloropropane)라는 살충제가 살포되었는데 그로 인해 생식능력을 상실한 현지주민들이 농장에서 살충제를 사용한 돌식품(Dole Food)과 살충제 메이커인 다우 화학을 상대로 LA에 소송을 제기해 놓은 상태라 한다.
DBCP가 인체에 유해하여 미국 식품의약청(FDA)가 그 사용을 금지한 것을 알게 된 미국 로펌들이 이들 대기업을 상대로 잇따라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미국 법원은
부적절한 법정지(forum non conveniens)라는 이유로 심리를 거부하였다. 그러던 것을 LA에서 상해(personal injury)사건 전문변호사 버스광고로 유명한 후안 도밍게(Huan J. Dominguez) 변호사가 니카라과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정액검사 결과 정자가 일정 수 이하인 수천명의 주민들로부터 사건을 수임하여 LA 카운티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도밍게 변호사는 원고를 일단 13명으로 하여 시작하였지만 만일 화해(settlement)로 결말이 나더라도 종전보다 훨씬 많은 피해보상을 받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2002년에 니카라과 법원이 450명의 현지근로자에게 4억9천만 달러 배상하도록 명하는 등 손해배상 판결이 잇따르자 돌과 다우는 미국내 강제집행을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또 돌식품은 온두라스에서 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바나나농장 근로자들에게 1인당 5800달러를 지급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니카라과 정부는 2000년 자국민에게 유리하게끔 살충제(DBCP)는 생식능력을 해친다고 규정한 DBCP소송촉진법을 시행하고 피고회사가 니카라과 법정에 서기 위해서는 10만달러를 공탁하도록 했기 때문에 니카라과는 미국민에 적대적인 법정지(hostile jurisdiction)가 되었다. 따라서 미국 법원이 더 이상 현지 법원에 소송을 미룰 수 없게 되었고 이번에는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재판이 열릴 공산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피고회사들이 문제의 살충제가 유해함을 알고 사용했다 할지라도 현지주민들이 건강을 해치게 된 데는 30년 전에 DBCP 말고도 DDT 같은 유독성 살충제, 오염된 식수원 등 여러 가지가 있어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형편이다.
5월 초 LA 카운티 지방법원(LAC Superior Court)의 빅토리아 체니(Victoria Chaney) 판사는 도밍게 변호사에 대해 니카라과 외에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과테말라, 파나마 사건도 병합하여 일괄 심리하기로 하고, 피고에 델몬티, 치키타 브랜드, 셸 석유회사를 추가하도록 하여 올 여름에 벌어질 소송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일견 영화세트장처럼 보이는 라스베가스 스트립 시가지 라스베가스를 석권한 태양의 서커스와 블루오션 전략

사람들은 라스베가스에 뭐 하러 가는가?
그곳은 도박이 합법화된 곳이기에 카지노에 가서 슬랏 머신이나 포커나 룰렛을 하려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니면 Comdex 같은 첨단산업 전시회나 컨퍼런스에 참석하러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도 LA에서 자동차로 5시간 이상 걸리는(464km) 곳에 있는 라스베가스를 찾아갈 때까지는 갬블링이나 컨퍼런스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LA 도심에서 프리웨이 10번과 15번을 타고 바스토우(Barstow)를 거쳐가는 코스는 비교적 단조롭지만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을 통과해야 하는 자못 지루한 여정이다. 베이커(Baker)에서 내륙 쪽으로 좀더 들어가면 데쓰벨리(Death Valley)가 나오고, 직진하여 네바다주로 접어들면(Primm) 상당히 큰 아웃렛 몰이 나타난다.

멀리서 바라다 본 라스베가스는 마치 사막 위의 신기루(mirage)와 같았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사막 한 복판에 어찌하여 수많은 대형 카지노 호텔이 즐비하고 밤이면 휘황찬란한 야경이 펼쳐지는지, 그 많은 관광객들과 도박꾼들이 뭐 하러 몰려드는지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라스베가스에 머물면서 호텔마다 벌어지는 각종 쇼와 진기한 볼거리를 보고서 자연히 알게 되었다. 관광객이나 방문객들은 다른 곳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는 것을 라스베가스에 와서 보고들을 수 있었다. 그 목적이 가족여행이든 컨퍼런스 참석이든 라스베가스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 쇼 호텔마다 특징이 있는 쇼를 보여주는데, 벨라지오 호텔의 경우 바깥 호수의 분수 쇼와 함께 "O"쇼(프랑스어로 '물'[l'eau]이란 뜻)가 자랑이었다.
몇 주 전에 예약을 하고 제일 좋은 오케스트라 석에서 관람한 "O"쇼는 기대 이상이었다. 20m 높이에서 다이빙할 수 있을 정도의 수심이 있는 수조 안과 위에서 온갖 진기한 율동의 싱크로나이즈(synchronized swimming)와 수영, 곡예, 다이빙을 보여주었다.

김위찬-르네 마보안 교수는 [블루 오션 전략]에서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는 전통적인 서커스 공연과는 컨셉이 전혀 다르다고 설명했다.
시르크 뒤 솔레유는 사자, 코끼리 같은 동물이나 조련사를 빼고 대신 곡예와 무용, 음악에 서로 연결된 스토리를 집어넣었으며, 타깃을 어린이가 아닌 성인을 대상으로 세련된 라이브 뮤직과 조명을 추가하여 어른들에게 꿈과 환상, 고급문화와 서정성을 선사하였다고 말했다. 그리 함으로써 비싼 입장료를 받으면서도 경쟁이 없는 무한 시장을 개척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시르크 뒤 솔레유는 라스베가스의 여러 대형 카지노 호텔에서 동시에 KA(MGM), Mystere(Treasure Islands), Zumanity(New York-New York), Beatles Love/Revolution(Mirage) 등의 공연을 벌이고 있었다. 적어도 이들에 관한 한 서커스가 사양화되었다는 말은 틀려 보였다.

Cirque du Soleil 'O' Show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인기있게 만들었을까?
나는 "O"쇼를 보면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는 서커스가 아니라 뮤지컬을 보는 것 같게 만든 발상의 전환이었다. 소재는 서커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곡예와 공중그네, 불(fire)쇼 같은 것이었지만 여기에 물 속에서 할 수 있는 수영과 다이빙, 싱크로나이즈를 추가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곁들여 관객들을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였다. 한쪽 발코니에 서 있던 가수가 공연 도중에 배우들과 같은 의상을 입고 무대에 등장하여 노래를 부름으로써 긴박감을 더하기도 했다.

Bateau: 돛단배의 파선 둘째는 많은 시설투자를 하여 각종 기계장치가 돌아가면서 쉼없이 새로운 무대가 펼쳐지도록 꾸몄다.
"O"쇼의 경우 싱크로나이즈를 하다가 물 없는 무대로 바뀌고 이내 깊은 물 속으로 고공 다이빙을 하는 순서로 이어졌다. 그때마다 천정과 무대 위에서는 각종 장치와 조명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예를 들어 배(Bateau)라는 순서에서는 공중에 돛 단 배가 미끄러지듯 나타난다. 배의 용골과 늑골에서는 8-9명의 서커스 단원이 온갖 묘기를 보이다가 마지막에는 차례로 점프하여 밑으로 떨어진다. 이 배를 움직이는 장치가 천정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지만 그 자체도 드라마 속의 순서로 보인다. 관객들은 아름다운 항해를 준비하고 출항에 나섰으나 거센 풍랑에 휩쓸려 배가 부서지고 모든 선원이 바다로 떨어지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었다.

셋째는 놀라운 입소문이었다. 우리도 라스베가스에 가서 "O"쇼나 KA를 꼭 보아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도 블루 오션 전략의 실제 사례를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객석에 물 냄새와 클로르칼키 냄새가 풍겼으나 이 같이 다채로운 공연은 고액의 입장료($99, $125, $150의 3종 +10% tax)가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 태양의 서커스에 관한 더 많은 사진을 보려면 좌측 [국제거래 견문기]의
라스베가스 참조

동화 같은 성을 쌓고 주민들에게 돌려준 랜돌프 허스트

16세기 스페인 성당 양식의 허스트 캐슬의 본관 큰 꿈을 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 1863-1951)도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은광 개발로 큰 재산을 모은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방학 때면 아버지의 드넓은 목장(ranch) 곳곳에 텐트를 치며 탐험하듯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십대 초반에는 역사교사를 한 모친과 함께 유럽의 여러 문화유적을 찾아다니는 호사를 누렸다(아이맥스 영화 허스트 전기 "Dream"의 장면). 여기까지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에 유학하였던 미국 부유층 자제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허스트는 좀 독특했다.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24만 에이커의 목장 언덕 위에 유럽에서 인상적으로 보았던 스페인 성당과 같은 집(castle)을 짓고 싶었다. 그는 꿈을 이룰 만한 재산이 있었고 꿈을 구체화해줄 수 있는 건축가(Julia Morgan)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안젤레스의 정확히 중간 지점인 캘리포니아 해변가 샌시먼(San Simeon)의 광대한 목장 언덕 위에 그의 캐슬(Hearst Castle)이 자리잡고 지금도 으리으리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주위 조망이 탁월한 허스트 캐슬의 본관 앞의 풀장 그는 생전에 언론왕국을 이루었고, 그가 가진 재산을 쏟아 부어 그가 꿈꾸었던 캐슬을 건설하였다. 1919년부터 1947년까지 건물을 지었다가 맘에 들지 않으면 부수고 새로 짓기를 반복했다. 실제로 허스트가 자신만의 캐슬을 꾸미기 위해 들인 노력은 매우 변덕스러웠다고 한다. 그는 엄청난 부를 가졌기에 줄리아 모건으로 하여금 새로 바뀐 아이디어를 다시 설계하게 하고 즉각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이 돈이 있었으면 지었을 저택"이라고 하였을까. 우리가 전에 구경하였던 밴더빌트 맨션이나 뉴포트 맨션보다 디테일한 면에서 앞서는 것 같았다.
허스트 캐슬 앞에 있는 넵튠 풀장은 주변 풍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 나중에는 로마풍 열주를 세워 마치 고대 로마와 같은 분위기를 살렸다. 주정부 공무원인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영화 로케이션 제의가 많았지만 오직 로렌스 올리비에,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스파르타카스(Spartacus 1960년)의 한 장면(25초)에만 허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목장에는 사설 동물원을 만들어 마치 아프리카 사파리를 온 것처럼 얼룩말, 사슴, 기린 등을 방목했다.

허스트는 1920년 대통령의 꿈이 멀어지자 아들 다섯을 낳아준 부인을 멀리 뉴욕으로 내치고 34년 연하의 영화배우(Marion Davies)를 정부로 맞아 그의 캐슬에서 거의 매주 파티를 열고 지냈다. 그의 캐슬에는 캐리 그란트, 찰리 채플린과 같은 영화배우와, 캘빈 쿨리지 대통령, 윈스턴 처칠 같은 정치가들이 자주 초청을 받았는데, 주말에 누가 허스트 캐슬의 초대장을 받을지 화제가 될 정도였다. 1920-30년대 그의 행적은 매우 유별나 헐리우드의 오손 웰즈는 1941년 그를 모델로 한 [시민 케인](Citizen Kane)이란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해변 쪽 랜치에 1km가 넘는 활주로를 만들어 놓고 DC-3기로 손님을 나르거나 용무가 있으면 직접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다녔다. 그러나 허스트가 여러 차례 시도하였음에도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다. 그는 수많은 언론매체를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미국 대통령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또 나이가 들자 캐슬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도시로 떠났다.

타일에 금도금까지 한 로마풍의 실내풀장 그의 사후 그의 유족은 더 이상 캐슬을 유지하기 힘들다고 보고 캘리포니아의 여러 대학과 주 정부에 기부할 뜻을 밝혔다. 랜치의 일부 시설은 자손들이 계속 이용할 수 있다는 조건을 붙였다. 모두가 난색을 표한 가운데 새로 취임한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이에 관심을 보여 그의 캐슬은 1957년 캘리포니아 주립공원(State Park: Historical Monument)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래서 허스트 캐슬을 보려면 인터넷 사이트(http://www.hearstcastle.com/) 또는 전화로 입장권을 예매(성인 $24, 허스트 캐슬에 관한 National Geographic 아이맥스 영화 관람료 포함)해야 하는데 취소할 겨를도 없이 늦게 도착하면 냉정히 입장을 거절하는 마치 관공서 같은 분위기마저 풍겼다.
허스트 캐슬은 여러 진품, 명품, 명화의 컬렉션이 진열되어 있는 2층, 3층이 볼 만하다고 하는데 바깥 정원과 1층만 둘러보기(Tour I)에도 바쁜 초행의 방문객으로서는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 허스트 캐슬에 관한 더 많은 사진을 보려면 좌측 [국제거래 견문기]의 허스트 캐슬 참조

통제불능의 헐리웃 연예인들과 천문학적인 재활치료비

아무래도 헐리웃을 끼고 있다 보니 LA에서는 연예인 관련 기사나 보도를 자주 접하게 된다.
2007년 8월 중순 케이블 방송에서는 통제불능 상태의 연예인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무슨 문제를 일으켰고 어떻게 재활치료(rehab)를 받았는지 보도(Out of Control: 10 Celebrity Rehabs Exposed)하였다. 이런 것이 다 뉴스가 되나 싶기도 하지만,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면 반대차선도 똑같이 밀리는 것처럼 스스로를 경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패리스 힐튼의 경우와 같이 별난 사람들이 별나게 사는 것도 보통사람들에게 흥미로운 화제거리가 될 수 있다.

시골뜨기 여대생에서 하루 아침에 미스USA가 된 타라 코너 2006년도 미스USA 타라 코너(Tara Conner)는 켄터키의 시골뜨기 아가씨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신데렐라가 되어 그만 일탈을 하고 만 케이스에 속한다. 그녀는 맨해탄 트럼프 타워에 살면서 말로만 듣던 유명 클럽에 줄을 서지 않고도 무상 출입할 수 있게 되자 거의 매일 클럽을 순례하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녀는 급성 알콜 중독자가 되었고 급기야 미스USA 답지 않은 행동을 하면서 왕관을 뺏길 위기에 처했다. 미스유니버스 사업권을 갖고 있는 도날드 트럼프가 그녀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기로 하여 그녀는 두 달여 재활시설(rehab)에 다녀온 뒤 정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와 [찰리 채플린]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로벗 도우니 2세(Robert Downey Jr.)의 경우는 더욱 극적이다. 그는 약물중독으로 여러 차례 구속되었고 보호관찰(probation) 조건을 위반하는 바람에 실제 교도소에 들어가 3년간 복역을 하기도 했다.
미국 최고의 팝가수였던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는 세간의 동정을 살만도 하다. 그녀는 두 아이를 낳은 후 남편과의 불화와 이혼으로 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통(psychological meltdown)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머리를 박박 밀었을 때 한국 같았으면 절에 가서 수도승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멜 깁슨이 성령이 충만하여 만들었다고 하는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 멜 깁슨(Mel Gibson)이 거의 불치의 알콜중독자라는 것은 놀라운 소식이었다. [레썰 웨펀]에서의 호탕한 성격으로 보아 '두주불사'임에는 틀림없었으나, [브레이브 하트], [패트리어트]의 주인공이었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Christ)을 제작 감독한 사람이 알콜의 노예라는 것은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맨처음 부인의 신청으로 AA(금주) 프로그램에도 참여하였고, 여러 차례 치료를 받았으나 그의 주사는 여전하다고 한다. 그는 종종 성차별적이고 반유대인적인 발언으로도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가장 미국여자(American girl)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는 린제이 로한(Lidsay Lohan)은 거의 매일 밤 파티에 나가는데 술과 마약으로 경찰조사를 받은 일이 부지기수이다. 2007년 들어서만 해도 여러 차례 사고를 쳤다. 그녀는 아직 캘리포니아에서는 술을 마실 수 없는 21세 미만이다. 11살 때부터 연예계에 데뷔하여 항시 인기의 중압감에 시달리면서 시도 때도 없이 파파라치의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으니 머리가 돌지 않은 것도 다행이라 할 것이다.

이날 TV 보도에서 이채를 띤 것은 LA 주변의 헐리웃 힐, 말리부 같은 경치 좋은 곳에서 한 달에 3-4만불씩 하는 재활요양소(rehabilitation facilities)가 성업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스파 같은 고급 호텔시설을 갖추어 놓고 헐리웃 스타나 부유층의 알콜, 약물 중독증을 치료한다는데 오랫동안 굳어진 중독증(addiction)을 몇 주간의 프로그램으로 고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연예인들이 이곳에 가는 이유는 지긋지긋한 파파라치에서 놓여날 수 있는 데다 퇴원을 할 때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는 공식발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항상(24hours/7days) 대중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연예인들로서는 장기간 잠수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 날 TV 채널을 돌리니 공영방송에서는 유명한 심리상담가 웨인 다이어(Wayne Dyer) 박사가 중독증 치료에 관한 강연을 하고 있었다. 천 마일이나 되는 먼 길도 첫 걸음에서 시작한다는 메시지였다. 그는 아무리 심각한 중독증도 하루만, 한 시간만, 아니 일분만이라도 중단하고 스스로를 단련하면 극복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헐리웃과 같은 곳에서 노자(Laotse)의 사상이 소개되고 있다는 것도 아이러니칼하게 들렸다.

'빅 브라더' 미국의 National ID Card 논란

10여년 만에 미국에 와서 살다보니 전과 달라진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외국인으로서의 신분을 확실히 할 것을 요구받고 있는 점이다. 우선 비자신분이 확실해야 하며 유학생(F1)이나 방문교수(J1)로 입국한 경우 소속학교 담당자의 확인을 받아야 한다. 학교를 옮기는 경우에도 국토안보부(Dept of Homeland Security) 이민국에 신고가 접수되어야 하며 무심코 캐나다나 멕시코에 놀러갔다가는 재입국을 거부 당하는 사태마저 빚어질 수 있다.
또 하나는 관공서 출입 시에 사회보장번호(Social Security Number)의 제시를 요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동차등록국(DMV)에 가서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으려면 사회보장번호가 있어야 한다. 미국의 제40대 대통령 로날드 레이건(1911-2004)

그 동안 미국에서는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같은 주민카드를 만들자는 논의가 여러 차례 대두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상징하는 것 때문에, 이를테면 조지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빅 브라더' 같이 국민의 사생활을 감시하는 정부를 만들 수 있다는 비판에 부딪혀 금새 움츠러들곤 하였다.
여기에는 성경적인 의미도 있다.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의 각료회의 석상에서 전국민에게 인식표(identification tatoo)를 부여하자는 말이 나왔다. 그때 레이건이 "오 맙소사, 그것은 짐승의 표(mark of the beast 요한계시록 13:16) 아니야?"하고 일갈하는 바람에 더 이상의 논의는 없었다고 한다(레이건 대통령의 국내정책보좌관을 지낸 마틴 앤더슨의 증언).

행정부의 입장에서는 국민 개인별로 고유의 식별번호(주민번호)를 부여하면 그렇게 편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선 범죄자의 식별과 감시에 편리하고, 주민번호에 따라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놓으면 주민 개인은 물론 국가 전체적으로 현황파악이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데이터베이스를 매칭하면 행정상으로 필요한 DB를 새로 구축할 수도 있다.

미국에서의 주민카드는 주로 이민과 의료보험 때문에 그 필요성이 논의되었다. 1994년 텍사스의 바바라 조르단 의원은 사진을 붙인 취업증(work card)을 만들자고 제안하였으나, 의회에서 부결되었고 사회보장국(SSA)에서도 많은 예산이 소요된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는 그와 같은 결과가 시행되고 있다. 예컨대 자동차운전면허증을 신청하거나 갱신할 때, 혼인신고를 할 때, 각종 자격증을 발급할 때 사회보장번호를 제시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전국적인 주민카드의 시행은 불법 체류자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미국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여론이 높다. 의료보험(health care)의 적절한 집행을 위하여 개인별로 보건카드(health ID number)를 만들자는 주장이 광범한 지지를 받았으나 그 오남용에 대한 우려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러던 것이 2001년 9.11 사태를 겪으면서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적어도 항공기 탑승 시에는 신원확인을 거친 주민카드(fast-lane ID)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지만, 여전히 은행거래나 의료보험에 이를 적용하는 것은 반대하는 여론이 압도적이다.
2008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후보들 간에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예컨대 루돌프 쥴리아니 전 뉴욕시장의 경우 위조불가능한 주민카드(tamperproof ID)에 찬성한다고 말했으나 이는 이민자의 경우에 한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반면 텍사스 출신 공화당의 론 폴 의원은
REAL ID Act(2005년에 제정되었으나 아직 시행이 보류되고 있는, 운전면허증을 사실상 ID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법률)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미네소타 출신 공화당의 노름 콜맨 상원의원은 서류미비 이민자(undocumented immigrant)라고 의심할 만한 사유가 있을 때 그의 신분증을 요구할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을 편다. 현재 대부분의 주에서는 경찰관의 직무수행 시 범죄신고를 한 사람이나 범죄피해자에 대하여는 미국시민인지 여부를 확인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참고자료: Privacy Journal Monthly Vol.33 No.9, July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