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萊 玉
지리적·역사적 배경
운봉은 '구름에 싸인 봉우리'라는 지명 그대로 지리산 주능선의 북서부에 위치한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남동쪽으로 덕두산(1150m)등 해발 100m가 넘는 산들이 연이어 있으며, 북쪽으로 황산, 서쪽으로는 고남산(846m)에 둘러싸여 있다. 산골짜기에서 동천, 서천이 흘러나와 그 주변에 들판이 펼쳐져 있는데, 처음 와보는 사람은 산 속에 갑자기 넓은 평야가 나타나므로 깜짝 놀라게 마련이다. 지리산 등반을 하는 경우 대부분 88 고속도로 지리산 나들목에서 인월로 빠져나와 곧장 뱀사골로 들어가게 마련이므로 운봉은 등산객들에게도 낯선 곳이다.
지리산 산기슭에 자리잡아 山紫水明하고, 일찍부터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는 외에 벼농사를 지어 주민의 생각이나 가산이 넉넉한 편이다. 전라북도 내에서 제일 먼저 추수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외부의 간섭이 없고 먹을 것이 풍족하니 인심은 절로 좋게 마련이다.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주변 산세가 한결같이 살기를 벗고 있어 큰 인물이 나는 땅으로 알려져 있고 동학 농민전쟁 때나 해방후 빨치산 전투에서도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다.
남원에서 경상도 함양을 거쳐 대구로 가는 교통 요지로서 1970년대 이후 면양 목축, 지리산 관광자원의 개발이 추진되면서 남원-운봉간 도로가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흔아홉 구비의 여원치(연재)가 난관이었으나 지금은 남원의 시내버스가 운행할 정도로 교통이 편리해졌으며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88 고속도로가 북쪽으로 멀지 않다.
역사적으로 운봉은 전라·경상 양도의 접촉지역으로 중시되었으며 특히 고려말에는 이성계가 이 부근 황산벌에서 왜구를 섬멸함으로써 병권을 장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아직도 '비전'이라는 동네에는 이성계의 황산 대첩비가 서 있다. 운봉은 또한 흥부·놀부전의 발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흥부는 제비가 물어다준 박을 타서 부자가 되었지만 본래 성이 朴氏였다. 춘향전에서는 거지로 변장한 암행어사를 알아보는 눈치 빠른 운봉 현감이 등장한다.
운봉은 朴赫居世로부터 40세손인 中始祖(仲華)가 고려때 총리(都僉議贊成事) 벼슬을 하고 운봉군으로 봉함을 받은 후 그의 食邑이 되었다. 조상 중에 큰 벼슬을 한 분은 별로 많지 않았어도 雲峰은 대대로 운봉 朴氏가 모여사는 본거지였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200여호가 사는 가운데 만석군, 천석군이 여럿 있었고 대부분 지주 아니면 자작농이었다. 지금은 옛날 부자들은 간 곳이 없고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행세를 하고 있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60세손인 壬淳(개명후 升在)公은 13세에 가정을 이루고 92세를 일기로 작고하실 때까지 운봉을 기반으로 개척정신을 발휘하여 농지를 보존하셨으며, 9남매를 열심으로 가르치셔서 전라도에서 이름난 집안으로 만드셨다. 지금은 新羅始後 58세손인 文瑛公, 59세손인 行祚公, 그리고 60세손인 升在公의 산소가 모두 용산리 가족묘지에 안장되어 있으니 모름지기 우리 후손들은 우리를 전세계로 힘차게 뻗어나게 한 근거지로서 이곳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祖上의 뿌리
운봉은 이제 마음만 먹으면 서울에서도 당일로 성묘를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의 세대만 해도 성묘 다녀온 지가 오래 되어 2002년 늦여름의 태풍으로 운봉이 수해를 겪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조상의 산소가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알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升在公 할아버님·할머님의 산소는 운봉 읍내가 바라다보이는 용산리에 나란히 있었는데 그 위에 제방이 건조되면서 최근 안전한 곳으로 이장하였다. 용산리 동네 동쪽에 行祚公 할아버님·할머님의 묘소가 있고, 그 아래에 61세손인 琪玉公, 華玉公 형제의 산소가 붙어 있으며 거기서 동쪽으로 좀 떨어진 고지대에 湊玉公의 묘소가 있다.
박혁거세 57세손인 述曾公은 3형제중 막내로서 38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는데 산소는 신기리에 있다. 그 할머님(김해 金氏)은 둘째 아들(文瑛公)을 해산하자마자 돌아가셨는데 스물하나의 꽃다운 나이셨다. 참 미인이셨을 뿐만 아니라 가막재 묘자리가 아주 좋아 박씨 집안 후손들의 인물이 한결같이 곱고 번듯하다고 한다.
升在公은 본래 59대 景祚公의 셋째 아드님이었다. 그러나 그 사촌(述曾의 차남인 文瑛의 자)인 할아버님에게는 자식이 없어 할머님(전주 李氏)이 업어다 키우시면서 온갖 정성을 기울이셨다고 한다. 지금도 전해오기를 이 할머님은 손자들 생일만 되면 새벽에 목욕재계하시고 자손이 잘되기를 정성을 다해 기원하셨다고 한다.
1920년대만 해도 운봉 박씨 집안에는 타고난 부자가 두루 많았으나 우리 집안만큼은 新學問에 열심을 보여 대조적이었다. 行祚 할아버지는 몸소 개화기에 운봉초등학교의 전신인 晩成소학교라는 사립학교를 세우셨다. 그후 사회혼란과 토지개혁으로 전통적인 부자 계급은 몰락하고 말았으나 교육을 많이 시킨 우리 집안에는 관계, 학계로 나간 인사가 많았으니 교육만이 가문을 일으킬 수 있음을 절감케 된다.
운봉 마을도 1970년대 이후 새마을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많이 변모되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큰집의 香先이만이 옛날 할아버님 때부터 살아온 집을 지키고 있을 뿐 대부분 연고관계를 상실하였다. 우리나라가 산업화됨에 따라 모두 大處로 나가 성공하고 살아야 하니 이를 탓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모름지기 고향의 뿌리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출처: 아버지 朴萊玉의 八十平生,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