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60世孫婦 金氏)를 추모하며
In Memory of Our Beloved Mother


아버님, 어머님께 삼가 아뢰나이다.
오늘(음력 8월 5일)은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지 44년이 되는 날입니다. 어머님께서 세상을 뜨신 해는 8.15 조국 광복이 된지 2년째로 온 나라가 아직 혼란에 휩싸여 있을 때였습니다. 우리 9남매를 키우느라 고생만 하시던 어머님은 좋은 세상도 못 보시고 6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서운한 일이었는지요.

어머님은 1883년 3월 20일 전남 곡성군 安東 金氏 가문에 태어나셔서 1895년 어린 나이에 朴씨 집안에 시집 오셔서 아버님과의 사이에 6남 3녀를 낳아 기르셨습니다. 양시부모님께 기울이신 효성은 온 동리가 다 아는 사실이었지요.
일제하에서 온 국민이 어려운 생활을 하였습니다만, 특히 우리집은 사업의욕이 남달리 왕성하신 아버님 덕분에 어려운 고비가 많았었지요. 가난한 살림살이에 아버님을 도우셔서 9남매 자녀를 기르시느라 고생도 참 많이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장래를 내다보신 어머님께서는 그 당시 웬만한 부자도 꿈꾸지 못하던 신식 교육을 자녀들에게 베푸셨습니다. 저희들에게 공부를 해야 잘 살 수 있다고 가르치셨지요. 그에 힘입어 어머님 자손 가운데 대부분의 손자들이 명문 대학을 마쳤으며 박사가 벌써 여러 명 배출되었고 미국에도 이미 여러 세대가 진출하였습니다.

첫째 湊玉 형님 슬하에서는 섭용이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이제 탄탄한 기반을 잡았으며, 호현이는 필라델피아에서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이고 을용이는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우리나라의 경제개발 모델을 다른 개도국에 전수하는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하버드 대학 박사입니다.

둘째 琪玉 형님의 맏딸 진성이는 미국에 이민 간지 20년이 다되어 IBM 박사 사위도 보는 등 자식들을 잘 키워놓았고, 준용이를 비롯한 나머지 손자·손녀 사위들도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직장에서 모두들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세째 華玉 형님은 6.25 사변 중에 참변을 당하셨지만 남은 자녀들은 훌륭하게 장성하여 아버지의 대를 이어 교편을 잡거나 사업을 하는 등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습니다.

저희 집 자식들도 학교 진학 때 부모 걱정 안 끼치고 서울대, 연대를 쑥쑥 들어가주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 서울 법대를 나와 전문 경영인이 된 사위(이홍구)가 있는가 하면, 셋째(김민홍), 다섯째(권광일) 등 대학 교수하는 사위도 둘이나 됩니다. 훤장이와 은희는 미국에 가서 살고 있습니다.

다섯째 基丞 아우는 UN 식량농업기구를 정년 퇴임한 만년에 일본 동경대학에서 농업공학 박사 학위를 받으리만큼 학업 성취욕이 강하여 모든 이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훤구는 노동연구원 부원장을 역임한 KDI 박사이며, 성자 사위(김인기)는 금융통화운영위원을 하는 대학 교수이고 훤웅이와 훤범이도 각각 미국에서 사업을 하거나 박사 과정을 밟고 있지요.

막내 圭烘 아우도 자녀 교육에 열심이었는데 훤철이는 미국에서 살고 있고, 훤겸이는 의사가 되었지요. 혜영이는 대학 강단에 섰는데 파리에서 공부하고 온 불문학 박사이며 은영이도 시집가서 잘 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어머님께서 뿌린 씨가 훌륭하게 결실을 거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땅히 아버님, 어머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이며, 교육만이 집안을 일으키고 나라를 융성케 한다는 진리를 거듭 깨닫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어머님의 자손은 이제 전라도 땅을 벗어나 서울로, 미국으로 뻗어나가 각처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자손은 이러합니다.

LA에는 장손인 섭용과 장손녀 순남의 차남 상기, 둘째집 진성, 훤숙, 저희 집의 훤장, 은희, 오째의 훤웅이네 식구가 살고 있어 우리 집안의 分所라 할 만합니다. 저도 LA에 갔을 때 각자 기반을 잡고 튼튼히 뿌리를 박고 사는 것을 보고 마음 든든하였습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에는 첫째집 호현, 서부의 네브라스카주에는 오째의 3남 훤범, 중부의 미네아폴리스에는 막동이네 훤철이가 살고 있습니다.

저희 아들들도 세계가 좁다 하고 해외로 다니며 살고 있습니다. 3남 훤장이가 미국 이민을 떠나기 전에 호주 시드니, 인도 뉴델리에서 무역관장을 역임하였고, 4녀 은희는 이민 간지 10년이 넘어 시민권을 취득하였으며, 은행원인 막내 아들 훤일이는 가족을 데리고 화란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미국 뉴욕에서 3년간 근무하였지요. 막내 딸 경희도 사위(권광일)가 호주 브리스번에서 박사 공부를 하느라 그곳에서 아이까지 낳고 3년 살다가 왔습니다.

어머님 생전에도 해방이 되어 잘 살게 되나 보다 하셨지만, 이처럼 세계 방방곡곡에 나가 살고 있는 것은 국력의 신장에 따라 각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무대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님은 다정다감하시고 인자하신 분이셨습니다. 어려서 우리집 식구가 좀 많았습니까! 조부모님과 부모님, 저희 9남매, 형수씨, 머슴, 유모, 침모, 하녀 등 밥을 짓더라도 큰 가마솥에 두 번씩 해야 하였지요. 어머님은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배불리 먹이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그렇게 이웃 사람들까지 자애롭게 돌보아주신 음덕이 자손들에게 작용하여 일이 잘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특히 식량난이 극심하던 일제하의 보릿고개 때 식구들이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양식을 마련하시느라 고심하시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지금은 보릿고개란 말은 박물관에나 가야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모두 잘 살게 되었지요.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 국민 모두 예외 없이 忍苦의 세월을 겪었으나, 이미 유명을 달리 한 자손도 여럿이 됩니다. 어머님이 사랑하시던 막동이도 공직에 있던 1979년 초 쉰일곱이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떴습니다. 중임이 누이도 1991년 3월 유명을 달리 하여 우리 형제는 저와 오째, 태임이 누이 셋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잎이 지면 그 자리에서 새 잎이 돋는 것처럼 어머님의 손자들이 각자 중책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미 상당수의 증손과 고손까지 태어났습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후손이 아버님, 어머님 핏줄을 이어받고 태어나 이 땅에서 아버님,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릴 보람있고 훌륭한 사업을 많이 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오늘 자손들이 함께 모여 아버님, 어머님의 은덕을 추모하오며, 그 은혜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 다정다감하시고 자상하신 성품으로 우리 자손들이 잘 되기를 가호해 주시옵기를 비나이다.

1991년 9월 12일

넷째 아들 萊 玉 올림

(출처: 아버지 朴萊玉의 八十平生,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