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을용 박사가 본을 보여주신 가르침

2003년에 큰 수술을 받으시고 그런 대로 건강을 유지하시던 사촌형님 박을용(朴乙鏞) 박사가 부활절 다음날(2004. 4. 12) 이른 아침 소천하셨다.
일반적으로 말기 암 환자의 어려움이란 육신의 고통이 너무 심하여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음에도 의식은 더욱 선명해져 생에 대한 의욕이 강렬해지는 것인데 형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2003년 13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으신 후 사흘만에 일반병실로 나오신 후에는 놀랍게도 미국에 출장도 다녀오시고 학교 강의도 정상적으로 수행하셨다.

서울아산병원 빈소 학생들의 단체조문 온누리교회 천국환송예배

고인을 일생을 돌이켜 볼 때 안타까운 일은 집안의 장형으로서 대소사를 막론하고 자상하게 챙겨주시고 애로사항을 조언해주셨는데 우리가 그러한 구심점을 상실했다는 것과, 학문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종교적으로 많은 위업을 달성하셨음에도 대학 동창(고건 총리, 故 서석준 부총리)이나 KDI 동료들(김만제·사공일 장관)에 비해 별로 각광을 받지 못하셨다는 점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형님이 집안의 동생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서울대-하버드 박사라는 것말고도 유수한 국제기구에서 고위 이코노미스트로 활약하면서 해외 강연 및 연구활동을 왕성하게 수행하신 것은 은행원에서 대학교수로 변신한 나에게도 많은 자극이 되었다. 그리하여 아버지 여섯 형제분으로 구성된 우리 집안에는 첫째 큰아버지의 3남인 고인의 뒤를 이어 박사와 대학교수가 줄줄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특히 전라도 남원 산골 출신으로서 5대양 6대주가 비좁을 정도로 활약하신 것은 온 집안의 자랑이 아닐 수 없었다.

하용조 목사의 설교 학생들의 추모사 하용조 목사의 설교 이영덕 이사장과 아들,자부의 인사

가정적으로는 보통사람으로서의 행복을 누리시지 못했지만 당신의 정열을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의 경제발전을 지원하는 일에 쏟고, 교회의 장로로서 해외 선교에 열성적이셨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한동대학의 운영자로서 세계적인 크리스천 프로페셔널의 양성을 위해 진력하셨다.
고인이 유엔기구에서 일하실 때부터 줄기차게 연구하셨던 "가난한 사람들은 한 국가의 부담이 아니라 자산이 될 수 있다"는 명제는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도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다.
뿐만 아니라 고인이 위독하실 때 포항에서 버스를 대절해 문병을 온 한동대생들, 고인의 장례식을 위해 영안실로, 장례식장(온누리 교회)으로, 장지(문막 충효공원)까지 찾아온 학생들에게서 집안 식구로서는 몰랐던 고인의 감춰진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학교수인 내가 세상을 뜰 때에도 과연 학생들이 이처럼 애통해 할까 자못 심각한 의문이 들기도 했다.

온누리교회 조문객들 장례행렬

장례식에 참석한 여러 학생들의 간증을 통해 은발의 박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미소 띤 얼굴로 세계화(Globalization)의 비전과 크리스천으로서의 섬기는 리더십을 강조하시고, 다른 사람들 몰래 당신의 월급을 털어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주셨다는 것도 알았다.
더욱 부러운 것은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와 목사님의 영국 유학 시절부터 돈독한 유대를 맺고 형제와도 같은 우정을 나누셨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인의 와병 중에 하용조 목사와 이형기 사모는 목사와 장로의 관계 이상으로 개인적으로도 극진하게 병 문안을 하셨던 것이다. 고인이 재정난에 처한 한동대 부총장으로 부임하신 것도 하용조 목사가 그렇게 종용하신 때문이라고 했다.
고인의 한동대 사랑은 지극하여 8년간 봉직한 퇴직금에 사재를 보태 1억원의 갈대상자(한동대 발전기금) 기탁금을 출연하셨을 뿐만 아니라 온누리 교회에도 한동대에 대한 재정적인 후원을 간곡히 부탁하셨다고 한다. 이 점은 고인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녔고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셨기에 향학열에 불타는 학생들이 큰 어려움 없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몸소 실천하신 것이라 생각된다.

장례행렬 장례예배 하관식

사촌동생으로서 장례준비를 위해 고인의 약력을 정리하면서 우리들에게 남겨주신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되새겨보았다.

故 朴乙鏞 박사·장로의 약력

2004년 부활절을 보내고 하늘나라로 가신 박을용 장로님의 약력을 소개합니다.
고인은 1938년 6월 5일 지리산 자락의 전북 남원군 운봉면 서천리에서 태어나서 1957년 전주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셨습니다.
196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하신 후 공군사관학교 교관을 거쳐 미국에 유학, 1975년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고인은 미국의 브루킹스 연구소 연구원(Fellow)으로 일하시던 중 1977년 조국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여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싱크탱크 역할을 한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우리나라 주요 경제정책의 수립 과정에 깊이 관여하셨습니다. 그 후 다시 미국 워싱턴 소재 세계은행(IBRD) 이코노미스트, 조지타운대 경제학교수, 유엔개발기구(UNDP)에서 근무하시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도우셨습니다.
1992년 귀국하셔서는 KDI 국제협력센터에서 개도국 공무원들에게 우리나라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하여 전파하는 일을 맡아 하시다가, 1996년 9월부터 한동대학교 경제경영학부에서 후진을 양성하셨습니다. 특히 한동대학교의 학사부총장과 국제경영대학원장을 역임하시고 2003년 가을부터는 석좌교수로서 봉직하셨습니다.

온누리 공원묘지의 풍경 하관식에 참석한 조문객들 문막 충효공원 전경

고인의 생애는 한 나라의 경제정책이나 학문을 연마하는 연구원이나 박사 이상으로 젊은 세대에게 비전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신 형님 같으신 교수님, 기독교 신앙을 몸소 실천하신 장로님으로서 더 기억될 것입니다.
일찍이 경제발전과 세계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시고 다양한 국제적인 활동을 통하여 최일선 현장에서 뛰셨을 뿐만 아니라, 고인이 강의하시는 대학교와 교회에서의 봉사활동을 통하여 수많은 세계화의 역군을 길러내셨습니다.
고인은 많은 대학생 제자들은 물론 우리나라의 정·관계 인사들, 개도국 공무원들에게까지 사랑과 봉사로 섬기는 자세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기에 고인의 업적은 정부의 요직에 앉아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보다는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는 일에서 더욱 빛났습니다. 한동대 학생들이나 고인이 봉직하셨던 서울 온누리 교회에서 여러 목사님과 장로님, 제직들이 고인의 장례식을 헌신적으로 돌보아 주시는 것도 이를 반증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고인은 아들, 며느리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우시면서도 엄격하신 면도 있었습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풍선처럼 천국에 안기신 영혼

이제 고인은 소천하셨지만 생전에 몸소 보여주시고 실천하셨던 사랑과 봉사, 헌신의 가치와 덕목은 우리의 가슴속에 길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뜻 깊은 부활절을 보내고 하늘나라로 가신 박을용 장로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에서 서로 만날 때까지 몸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봉사하라"는 권면의 말씀을 끊임없이 하실 것만 같습니다.

     His Life at a Glance

  1938. 6. 5    전북 남원군 운봉면 출생
  1957-1961   서울대 문리대 외교학과 졸업
  1962-1965   서울대 대학원 졸업 (국제정치학석사)
  1967-1975   미 하버드 대학원 졸업 (정치경제학박사)

  1962-1966   공군사관학교 사회과학과 조교수
  1970-1973   하버드대 통계학과 펠로우
  1975-1976   미 브루킹스 연구소 연구원
  1976-1977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
  1977-1982   한국개발연구원(KDI) 수석연구위원
  1982-1988   세계은행 자문위원
  1984-1989   미 조지타운대 아세아경제 교수
  1990-1994   APEC Network of Economic Development Management 사무총장
  1992-1995   한국국제협력단 자문위원
  1996-1996   UNDP 고위자문관
  1996-2003   한동대 부총장, 경영경제학부 교수
  2003-2004   한동대 경영경제학부 석좌교수
  2004. 4.12   숙환으로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