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사촌, 고 박훤구 박사

아버지 형제가 고모까지 포함하여 아홉 분인 만큼 나에게는 사촌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일찌기 자녀교육에 열심이셨던 할머니의 영향으로 아버지 형제분들은 일제 강점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모두 고등학교 이상 대학까지 마치셨다.
전라도 벽촌(운봉)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쌍동이 교장선생님이 계션는가 하면 일찍부터 공직에 오르신 분도 계셨다.

Late Fun K. Park 그 중에서도 "오째집"으로 일컬어진 숙부님(고 박기승 님)은 학문적 성취욕이 남다르셨다.
사촌들이 대부분 박사학위 소지자일 뿐만 아니라 숙부님 본인도 공직을 은퇴하신 다음에 박사학위를 받으셨다.
그것도 일본 동경대학의 농학박사 학위이니 숙부님의 형설지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평생 관개농업의 발전에 힘쓰셨으나, 박정희 정권에서 지하수(관정) 개발에 역점을 두자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서 활동을 하셨다.
그러니 당신의 지식과 노하우를 높이 평가한 일본 학자들이 박사논문을 쓰시도록 독려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으신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 소개하는 사촌 고 박훤구 박사는 오째집의 장남이셨다.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중-고등학교, 서울대학교(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하여 미네소타대학교에서 계량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으셨다.
1978년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노동경제 연구를 담당하였으며 김영삼 정부에서 청와대 경제비서관(노동 담당)을 역임하고 1996년 8월부터 2000년 6월까지 한국노동연구원장을 지내셨다.
KDI에서 근무하실 때에는 첫째집의 박을용 박사와 함께 사촌간이 재직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1990년대 말 IMF 사태를 맞아 대량해고와 실직이 만연할 때 노동시장의 안정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노사정 화합을 위해 분투 노력했다.
그 후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으로 있다가 2005년 7월 30일 58세 생신을 며칠 앞두고 주말 아침 테니스를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Funeral service of Late Fun K. Park

고인은 같은 "훤"자 돌림자를 쓰는 사촌으로서 자랑거리였다. 누가 한글이든 한자든 "훤"자를 잘 못 읽을 때면 "박훤구 박사"를 모르느냐고 반문하곤 했다.
이와 같이 고인은 어른들에게는 집안의 자랑이었고 손아래 동생들에게는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다.
고인은 "훤"자를 영어로는 "Fun"이라고 표기하는 등 유머와 위트가 넘치고 두루 배려심이 많은 분이었다.

필자도 잊을 수 없는 고인과 관련된 추억이 있다.
1996년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제네바에 있는 국제노동기구(ILO) 초청연구원으로 가 계실 때였다.
나는 제네바에 있는 WTO를 찾아갈 일이 있어서 제네바 공관에 사전 연락을 취하였는데, 박훤구 박사와 사촌이라는 것을 안 제네바 주재 재무관(국장급)이 내가 투숙한 호텔까지 찾아와 짐을 날라다 주는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수원공원묘지의 장례식

고인의 묘소는 천안공원묘지에 있다.
고인의 가족이 세운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여기 우리와 함께 했던 한 사람이 잠들어 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사랑한 사람, 자연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땀과 눈물까지도 사랑한 사람,
    그 무엇보다 가족을 사랑한 그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다 나누어 주고 갔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려 했고 이 나라에 노사문제를 위해 온 힘을 다 바쳤다.
    그 큰 사랑과 노력에 지쳐 쉬고 싶었을까 너무나 일찍 우리 곁을 떠나버린 그대.
    이제 그 모든 짐을 내려 놓으소서 남은 것은 우리에게 맡기고 부디 편히 쉬소서.

선친 곁에 묻힌 고 박훤구 박사

묘비명이 이렇게 감성적인 것은 미망인이 "세노야"의 작곡자로 유명한 김광희 교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 은 시인의 시에 젊은 시절의 아내 김광희 교수가 곡을 붙이고 가수 양희은이 불러 전국민이 애창했던 이 곡은 고인의 삶을 함축적으로 노래하는 것 같다.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님에게 주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바다에 주고
        슬픈 일이면 내가 받네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