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즈버그에서의 南北대결

아이러니칼하게도 내가 뉴욕으로 발령을 받은 1988년은 서울에서 반미(反美) 분위기가 차츰 고조될 때였다. 그 해 9월에 열린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우리가 미국에 대해 자존심을 내세우게 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은 2차대전후 자국의 이익을 좇아 한반도 분단을 초래하였고 오늘날에는 통상압력을 가하여 국내산업을 위협하는 버거운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올림픽 경기의 TV 중계를 맡은 NBC의 편파 방송에 대한 감정까지 겹쳐 올림픽 게임중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미국팀과 싸우는 반대편, 심지어는 소련팀까지 응원하는 사태마저 벌어졌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내가 뉴욕에 근무하면서 미국의 이면을 정확히 살펴보는 데 하나의 자극이 되었다. 무조건 미국을 선망만 할 게 아니라 미국을 부강하게 만든 요인을 나름대로 찾아보고 싶었다. 베트남전이 끝나고 미국의 경제력이 쇠퇴하면서 미국의 리더십에도 금이 가고 있었지만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대국임에 틀림없었다.

미국에 간 이듬해 여름 휴가를 이용하여 게티즈버그를 방문하기로 한 것은 불과 130년전 우리처럼 남과 북이 싸웠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게티즈버그는 펜실베니아주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뉴욕이나 워싱턴에서 자동차로 여러 시간을 달려가야 하므로 우리같이 짧은 기간내에 많은 곳을 보고가야 하는 주재원한테는 별로 인기가 없는 관광지였다.

게티즈버그에서의 의문

우리 가족은 자동차로 해리스버그를 거쳐 15번 도로를 타고 게티즈버그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그 밋밋한 지형을 처음 대하는 순간 어떻게 15만이 넘는 남과 북의 대군이 이곳에서 사흘에 걸쳐 격전을 벌였을까 의아스러웠다. 여기저기 숲이 우거진 낮은 구릉이 펼쳐져 있을 뿐 상식적으로 판단해볼 때 통상적인 작전이 가능한 지형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의문은 맨처음 들른 게티즈버그 국립공원 비지터 센터에서 당시의 전황 해설도를 보면서 어느 정도 풀렸다. 남북전쟁 개전후 2년에 걸쳐 남군(Confederates)은 로버트 리 장군의 탁월한 지휘 아래 주요 전투에서 북군(Union)을 이기고 있었다. 리 장군은 유리한 전세를 이용하여 북군의 영토인 물자가 풍부한 펜실베니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전선을 교착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는 사이 유럽의 평화중재를 기대해봄직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잘 훈련된 군대가 주도(州都)인 해리스버그를 공략할 즈음 워싱턴-볼티모어 방어에 매달려 있던 북군이 뒤쫓아왔다. 그러므로 게티즈버그 전투는 양군이 우연찮게 조우하면서 시작되었고, 남군이 북쪽과 서쪽에서 증파된 반면 북군은 남쪽과 동쪽으로부터 투입되었던 것이다.

비지터 센터의 큰 홀에서는 전기 불빛(Electric Map)으로 군대의 움직임을 표시하면서 사흘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실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1863년 7월 1일 게티즈버그 전투는 보급품이 부족한 남군이 읍내 군화 창고를 접수하기 위해 소규모 북군 병력을 공격하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내 북군의 원병이 도착하였고 구릉지대(낚시 미끼 모양의 세미트리 능선)에 포진한 북군에 대해 남군이 무모하리 만큼 압박을 가하면서 전투가 가열되었다.

게티스버그 전투 첫날 전투는 남군에 우세하게 전개되었으나 북군의 수비를 결정적으로 깨지는 못하였다. 둘째날도 두 진영이 1.6Km의 거리를 두고 평행으로 대치한 가운데 중앙의 과수원과 밀밭에서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북군의 수비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7월 3일 남군은 피켓 장군 지휘하에 막판 밀어붙이기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북군의 포격으로 돌격대의 사상자가 속출하는 바람에 효과가 없었다. 보급품도 떨어지고 결국 리 장군은 작전상 후퇴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군은 포토맥 강을 건너 버지니아주로 퇴각하였다. 북군의 미드 장군이 리 장군과의 우정을 생각해서 추격을 명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사실 북군도 더 이상 남군을 뒤쫓을 여력이 없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북군은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는데 전쟁은 그 후에도 2년을 더 끌었다.

비지터 센터 전시실에는 남북전쟁 당시의 사진과 무기, 각종 유물이 체계적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당시의 군가와 유행가를 들려주는 코너도 있었다. 게티즈버그 전투에 참가한 15만여명중 5만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당시 양쪽 진영에서 동원된 인원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숫자였다. 남군은 그후 게티즈버그에서의 인적 물적 피해를 만회하지 못한채 패퇴하고 말았다.

링컨 대통령의 연설

그해 11월 19일 게티즈버그에서는 전쟁터에서 산화한 장병들의 묘지를 한데 모은 국립묘지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나는 링컨 대통령이 지나갔던 게티즈버그 거리를 따라 걸으며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였다.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몰고온 이 전쟁을 어떻게 승리로 이끌 것인가, 연방으로부터의 탈퇴를 주장하는 남부 연합을 물리치고 과연 연방정부의 정통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등등의 문제가 링컨을 우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비지터 센터 길 건너 편은 링컨이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남긴 국립묘지이다. 나는 국립묘지 중앙에 위치한 기념비의 링컨 흉상옆 비석에 새겨져 있는 게티즈버그 연설문을 읽으면서 새삼 감동에 젖어들었다.

링컨 대통령은 272단어로 구성된 짧막한 연설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미국의 건국정신을 언급한 다음 이렇게 세워진 나라가 내란(內亂)에 처하여 오래 지탱할 수 있을지 시험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수많은 장병들이 피흘려 싸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지상에서 멸망하지 않도록' 살아남은 사람들이 헌신해야 한다고 국민들에게 호소하였다. 링컨 대통령으로서는 남부의 여러 주가 자신의 노예해방 조치에 반발하여 독자 정부를 구성한 것이 몹시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는 이 연설을 통하여 정부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하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링컨은 비록 교회에 등록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의 주의주장이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은 쉬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유의 탄생을 본 아메리카 합중국이 민주정부로서 영속되어야 함'을 확신하였다. 남북 대결구도하에서 우리가 북측에 승리할 수 있는 비결도 자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경제력의 우세 이상으로 어느 체제가 국민에게 자유 민주주의를 보장하는가 하는 게 될 것이다. 게티즈버그 묘지를 둘러보니 6.25 때 전몰한 미군장병들의 묘비도 적잖이 눈에 띄었다. 나는 게티즈버그 들판을 바라다보며 미국민들처럼 남과 북이 서로 싸운 우리의 6.25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한반도 남북 통일에의 길은 얼마나 먼가 하는 한없는 상념에 잠겼다.

追 記

1990년 남북전쟁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PBS 공영방송에서 방영된 후 미국 전역에서 남북전쟁이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한편 게티즈버그 들판 끝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재임중 흐루시초프와 처칠, 드골이 찾아왔던 아이젠하워의 농장이 있다. 지금은 국립공원으로 보존되어 있는데 골프광답게 집 앞뜰에는 골프장이 잘 가꾸어져 있고, 집안 거실 한쪽에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선물했다는 자개상이 놓여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개별방문은 불가하며 비지터 센터에서 아이젠하워 농장까지 왕복운행하는 전용 관광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