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슨의 아이젠하워 生家를 방문하고

Dwight D. Eisenhower, 34th President of USA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되는 것도 아닌데 객관적인 기대치에 비하여 현실의 직급이나 쌓아올린 재산은 크게 못미친다고 여겨질 때가 있다. 직업군인으로서 50이 될 때까지 소령밖에 못하고 있다면, 더욱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본부와 해외의 유력한 엘리트 코스까지 거쳤다면 그의 실망은 대단하리라 짐작된다. 바깥의 어느 사람도 그가 속한 조직이 구조적으로 특이하여 승진이 늦은 게 아니라 그에게 무언가 결점이 있어서 그렇다고 믿기 십상일 것이다.

거의 마흔이 다된 나이에 겨우 대리 직급을 달고 미국 로스쿨 유학을 떠날 때의 나의 심정도 그러했다. 댈러스에서 공부를 하던 중 게티즈버그 아이젠하워 농장에서 알게 된 사실이 문득 생각났다. 아이젠하워(1890.10.14~1969.3.28)가 텍사스주에서 태어났고, 텍사스주에서 결혼을 하였으며, 텍사스주에 있는 군 부대에서 여러 차례 근무했었다는 역사 기록이었다.

그의 생가가 있는 데니슨은 오클라호마주에 가까운 텍사스의 조그만 시골 마을로 그가 태어날 무렵만 해도 철도 건설 붐을 타고 제법 번성했다고 한다. 아이크의 부친이 캔자스에서 사업에 실패한 후 데니슨으로 내려와 철도회사에 취직을 하였는데 그 사이에 아이크가 태어났던 것이다.

1994년초 승진에서 누락된 것을 알고 울적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나는 주말을 이용하여 댈러스에서 70마일 북쪽에 위치한 데니슨을 찾아갔다. 기념관으로 개조된 그의 생가는 당시의 생활상을 짐작케 하는 보기에도 가난한 철길 옆 동네에 자리잡고 있었다.

데니슨의 아이젠하워 기념관

기념관 앞에 서있는 그의 동상에는 '젊은이들이 아이젠하워를 본받아 누구나 위대해 질 수 있음을 격려해주고자' 건립하였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This memorial is dedicated to young people everywhere. That they may be inspired to greatness by the example of our most distinguished son Dwight D. Eisenhower. Born October 14, 1890 in Denison, Texas."

사실 아이젠하워(애칭 "아이크")는 마흔 일곱까지 만년 소령으로서 승진과는 인연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요청하는 덕목을 고루 갖추기 위해 노력하였고, 마침내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를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위대한 면모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부모는 6형제에게 줄 것이라고는 '기회' 뿐이라고 누누히 강조했다고 한다. 과연 아이크는 기회가 언젠가는 자기한테도 올 것을 확신하였고, 마침내 그 기회가 오자 거리낌없이 손을 뻗쳐 움켜잡았던 것이다.

아이크의 생가를 방문하고 나서 그의 처지가 나와도 비슷했던 것 같고 하여 그에 관한 궁금한 게 많아 아예 도서관에서 그의 傳記를 빌려다 보았다. Stephen E. Ambrose, Eisenhower; Soldier General of the Army President-Elect 1890-1952, Vol.1

기록에 의하면 그는 1920년 소령으로 진급한 후 1936년 중령으로 진급할 때까지 경력은 다채로왔지만 한 계급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1940년초 필리핀에서 귀국한 후에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였다. 제3 보병사단 참모장에서 1941년 3월 대령으로 승진한지 얼마 안 되어 전속된 제3 군단의 참모장으로 재직하던 중 美史上 최대규모의 모의전쟁 훈련에서 우승을 거두어 그 공로로 준장 계급장을 달았다.

그리고 太平洋 전쟁이 일어나자 마샬 육군참모총장 휘하에서 작전계획 수립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1942년 3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아프리카 작전을 지휘하면서 1943년 2월 대장으로 승진하고 (미군 편제상 대장이 도입된 것은 근자의 일로 1943년 현역대장은 마샬과 맥아더 뿐이었다) 1944년 12월에는 사상 최대의 군사권을 손에 쥔 유럽지역 연합군 총사령관(Supreme Commander, Allied Expeditionary Force in the European Theater)에 임명되어 유럽 침공(Overload) 작전에서 連勝을 거두며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아이젠하워의 좌절감

1939년말 아이젠하워는 그의 아들이 웨스트포인트를 가겠다고 하자 처음에는 적극 만류했다고 한다. "청년시절에 엄격한 훈련을 받으면서 지내려느냐, 자신의 적성과 능력, 포부에 따라 자유롭게 살지 왜 명령과 규율, 의무에 얽매어 살려고 하느냐" 하는 게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아이크는 아들이 대학에 갈 나이가 되도록 기껏 중령에 머물러 있는 자신의 처지가 무척 한심하였다. 실제로 잘 나가는 변호사를 하고 있던 아이크의 동생은 조카에게 미시간 로스쿨을 적극 권하였다.

아이크의 군대경력을 보면 그의 실망과 좌절감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는 1911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軍門에 들어선 이래 29년간 상관과 동료, 부하들의 신망을 받았다. 맥아더 같은 특출한 장군도 품성 좋은 아이젠하워가 언젠가는 큰 인물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7년씩이나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아이크는 참모학교(C&GS)를 수석 졸업하고 국방대학원도 마쳤으나 대령까지는 연공서열(seniority)이 지배하는 군대조직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1차 대전후 축소된 군대조직에서는 그가 설 땅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산술적인 계산에 의하면 1950년에나 대령이 될 수 있는데 그때는 이미 환갑이 될 터이니 장성 진급은 처음부터 가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크는 아들에게 타이르기를, 그가 "군에 남아 있는 이유는 명예와 애국심으로 뭉쳐진 유능한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고, 남자로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깊은 감화를 준 상관은 파나마 근무시절의 Fox Conner 장군, 전사편찬위 시절의 John Pershing 장군, 육군본부와 필리핀 시절의 McArther 원수, 2차대전 당시의 Marshall 참모총장 등이었다. 아이크에게 있어 군대는 대공황 같은 때에도 失職을 모르는 안정된 직장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는 상황이 급변할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었다. 사실 그 무렵 유럽에는 戰雲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크는 외아들이 육사에 입학하여 아버지와 같은 직업군인의 길을 택하자 누구보다도 기뻐했다고 한다.

아이젠하워의 노력

미 육군 인사기록에 남아있는 아이크에 대한 인물평은 다음과 같았다. "아이젠하워는 큰 비전을 품고 진취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며, 군대내의 어떠한 문제이든지 파악하여 앞장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He is possessing broad vision, progressive ideas, a thorough grasp of the magnitude of the problems involved in handling an army and lots of initiative and resourcefulness.)

Marshall Douglas MacArthur 그는 군인으로서 큰 성공을 거두고 나중에는 대통령까지 되었지만 단지 행운만으로 그리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소령 시절 경력을 보면 잠깐이지만 육사 선배인 패튼과 함께 탱크 부대도 지휘했고, 파나마 운하와 프랑스 파리에서의 해외근무도 했다. 1927년부터는 워싱턴의 전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면서 1차 대전에 참전했던 미군의 유럽내 격전지를 직접 돌아보았으며 1933년 맥아더 참모총장의 부관으로 임명될 때까지 전쟁성에서 전시 물자동원체제를 연구하기도 했다.

아이크는 맥아더를 따라 필리핀에 가서 케손 대통령의 군사고문관으로 필리핀 육군의 창설을 도왔다. 필리핀에서 카리스마와 독선이 강한 맥아더 밑에서 근무를 하는 것이 큰 고역이었지만,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태평양전쟁 플랜을 마샬 참모총장에게 건의할 수 있었고 그의 신임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크는 인생에서 가장 한심한 시기에 장차 유럽에서 연합군을 지휘 통솔할 수 있는 실력과 역량을 착실히 쌓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합군 총사령관의 인선에 고심할 때, 마샬 참모총장이 제일 먼저 고려되기는 했었지만, 아이젠하워 이상 가는 적임자가 없었다고 한다. 아이크가 육군참모총장을 맡게 되면 그가 대선배들인 마샬과 맥아더를 지휘하는 모양새가 되어 곤란하고, 무엇보다도 영국군과의 협조관계를 고려하거나 영국과 프랑스의 미묘한 알력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아이젠하워 장군이 최적임이었다.

이와 같이 아이크는 기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람이었고 (이 점은 그가 최전방 부대에 대하여도 훈련을 강조하고 이를 몸소 점검했던 일화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마침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물로서 무대 전면에 등장하였다. 아이젠하워는 20세기의 세계 역사 속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군인이자 행정가(아이크가 대통령이 되기 전 잠시 미국 콜럼비아대 총장을 역임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정치지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