産銀 법제팀의 IMF 분투기

환란 이후 우리 국민을 여러 모로 각성하게 만들었던 IMF(국제통화기금)는 그 해석도 갖가지였다. 직장에서 해직된 사람은 "I aM Fired."(잘렸다), 명퇴권고를 받은 사람은 "I aM Frightened."(놀랐다)라고 했지만, 한국산업은행 조사부 법제조사팀(이하 "법제팀"이라 함)의 경우에는 단연코 "I aM Fighting."(분투한다)이었다.
그만큼 IMF는 법제팀의 기능을 크게 바꿔놓았다. 그 동안 금융법률에 관한 책([회사정리법 해설], [금융법률실무] 등은 여전히 금융법률서적의 典範으로 꼽히고 있음)을 만들면서 주어진 법률질의에 답변하는 것에 그쳤던 受動的인 역할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은행의 이익을 전면에서 방어하고 이익을 창출하는 積極的인 기능으로 변신하였기 때문이다.

법제조사팀의 기능 변화

1997년초 한보철강이 위기에 봉착하자 최대 채권기관인 산은의 행보가 주목을 받고, 결국 회사정리절차에 들어가면서 법제팀의 회사정리법 해설서가 새롭게 각광을 받았다. 도산법 담당조사역은 관계기관 연석회의에 나가 우리 은행의 입장을 대변함은 물론 대형 로펌에서 나온 전문변호사와 논쟁을 벌여가며 회사정리법이 올바로 적용되도록 애썼다. 그해 여름 기아자동차가 기습적으로 화의 신청을 하자 법제팀도 일약 매스컴의 관심을 끌었다. 많은 기자들이 법정관리, 화의제도의 차이점에 관하여 문의를 하고 자료를 구해 갔다.

이 무렵부터 법제팀에서는 전 직원이 열람할 수 있도록 회사정리·화의, 부실채권 정리 관련자료를 인트라넷 자료실에 올리는 한편 행내 문자방송인 [오늘의 뉴스]에 자료 게재 사실을 띄우기 시작했다. 당시 산은은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의 적용을 받지 않게 됨으로써 20년전에 발간된 [한국산업은행법 해설서]를 새로 만드는 것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그 당시 [오늘의 뉴스]에 소개된 법제팀이 한 일을 몇 가지만 열거해보기로 한다.

- 1997. 10. 24  기아차 문제 처리와 관련된 회사정리절차상의 이슈, 대출금의 출자전환, 
                WTO 보조금 협약에 관한 문제의 정리 소개
- 1997. 11. 25  새로운 금융기법인 자산유동화(ABS)에 관한 자료 소개
- 1997. 12.     정투법 배제에 따른 산은 기본법규 국·영문판 발간 소식
- 1998.  1. 13  [중소기업을 위한 은행법무 핸드북] 발간
- 1998.  1. 19  제13차 개정(98.1.13) 내용까지 반영한 [산은법 해설서] 발간
- 1998.  2. 17  위험관리연구회의 [디리버티브 법률문제] 세미나 안내
- 1998.  2. 26  회사정리법 등 도산관련법 주요 개정내용 해설
- 1998.  4. 15  자산유동화와 특수목적기구(SPV)에 관한 세미나 안내
- 1998.  5.     부실채권 정리대책의 법적 측면, 미국의 정리신탁공사(RTC)에 관한 자료 소개
- 1998.  6. 20  당행 실무자가 입법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자산유동화 입법추진과 당행에
                미치는 영향] 분석
- 1998.  7. 15  5개 시중은행의 퇴출과 P&A(자산·부채 이전)의 법률문제 분석
- 1998.  8. 17  도산절차상 은행의 대응방안 분석자료 소개

위의 활동상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법제팀의 업무는 사후관리보다도 우리 은행의 위험관리 대책, 부실자산 처리 문제로 重點이 옮겨갔다. 법제팀에서는 특히 파생금융상품 거래에 많이 쓰이는 ISDA(국제스왑-디리버티브 협회)의 계약서 규정을 면밀히 검토하는 한편 정부가 입법을 추진하고 있는 자산유동화(ABS) 관련 제도를 소개하는 데 주력하였다.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들

사실 이러한 노력은 행내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훌륭한 결실을 맺었다. 우선 금융기관 퇴출 과정에서 야기된 스왑 거래의 뒷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우리 은행의 스왑거래 계약서 해석이 치밀하고 분석적인 관계로 대부분 판정승을 거두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ISDA 마스터 계약서를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 국내 금융기관 실무자들 사이에도 거의 없는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1998년초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던 당시 필자는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실무기획단에 참여하여 증권투자회사법 제정과 기업구조조정기금 설치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또한 자산유동화법 제정시에도 법제팀 관계자가 관계기관, 국회 토론회에서 제 몫을 다하여 우리 은행업무에 전혀 지장이 없게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자산유동화 입법실무작업단 멤버들이 자산유동화에 관한 해설서([금융혁명-ABS], 1999.5, 한국경제신문사刊)를 만들 때에도 법제팀 관계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도록 하였다. 그 결과 이 법 시행 이후 많은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신규 재원조달과 부채비율 축소를 위해 자산유동화에 나설 때 이 책은 '바이블' 역할을 하였고, 법제팀의 참여는 우리 은행이 자산유동화 거래에서 주요 역할을 따내는 데 무형의 자산 구실을 톡톡히 할 수 있었다.

1998년 들어 은행의 관심이 부실채권의 정리 및 법률분쟁의 조속한 해결에 집중됨에 따라 법제팀이 하는 일도 더욱 다양해졌다. 80년대말 미국의 저축기관(S&L)이 대거 부실화되었을 때 부실 금융기관 자산의 정리를 전담했던 정리신탁공사(Resolution Trust Corporation)의 업무내용을 법적인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자산·부채 이전(P&A) 방식으로 퇴출은행을 정리할 때 본격적으로 그 법적인 의미와 효과를 분석한 것도 우리 은행이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이 해 6월 종전의 부도유예 협약 대신 등장한 기업개선(Work-out) 작업에 있어서도 선순위 담보권을 갖고 있는 산은의 지위는 법적으로는 막강하였지만, 채권금융기관들이 다수결로 결정하는 채권금융기관협의회에 있어서는 수적으로 열세일 수밖에 없었다. 선순위 담보권자로서 산은의 입장을 법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자료를 담당부점의 실무자들과 힘을 합쳐 만들었고 많은 경우에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대상기업의 청산가치를 측정할 때 자산가치로 하느냐, 현금흐름에 바탕을 둔 수익가치로 하느냐의 문제는 이미 법률의 영역을 떠난 것이어서 짧은 재무관리 지식을 가지고 자문에 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은행의 존립에 관한 법률자문

IMF 체제하에서는 정부출자 은행의 입지도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BIS 대책의 일환으로 감자 방안을 논의할 때에는 산은의 감자 사태를 결코 예상할 수 없었던 산은법 입법자들의 맹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전문변호사들과 법리논쟁을 벌이고 그들을 설득하여 결국 우리의 안대로 큰 무리없이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그러나 IMF 협약에 따라 국책은행도 건전성 감독(prudential regulation)을 받기로 한 점에 있어서는 워낙 정책적으로 결정된 사안이기에 법제팀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작을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서 산은법·시행령, 정관 등의 개정 업무가 종합기획부로 이관되고 법제팀은 산은법의 해석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1999년 3월 산은이 금융감독원의 감사를 처음으로 받게 되었을 때 감사관들과 산은법상 "중요 산업"의 개념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던 것도 기억에 새롭다.

IMF 체제하에서는 무든 부서가 새로운 업무를 개발하는 데 매우 열심이었다. 그에 따라 새로운 약정서를 여러 가지 만들어야 했는데 법제팀에는 그 법적 구조와 은행의 권리·이익에 미치는 효과를 검토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이러한 계약서는 어느 정도 유형화가 가능하였으므로 법제팀에서는 데이터베이스의 구축과 자체 팀원 훈련을 목적으로 "Documentation Clinic" 서비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다큐멘테이션 클리닉 서비스

종전의 법제팀 업무가 법률질의에 대하여 묻는 것만 답하는 것이었다면, 다큐멘테이션 클리닉에서는 의뢰자가 묻지는 않았어도 거래의 구조와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배경 및 법률관계의 설명에 초점을 맞추었다. 다시 말해서 환자가 클리닉을 찾아가 진료를 받을 때 질병의 치료는 물론 예방을 위한 섭생과 운동의 처방을 내려주는 것처럼 전문변호사의 법률의견(legal opinion) 수준으로 종합적인 법률자문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또 공개할 수 있는 내용은 그룹웨어 지식창고에 그때그때 올리고 있으므로 '지식경영'의 요체인 업무지식의 공유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다큐멘테이션은 각종 양해각서(MOU)에서부터 우리 은행의 크레딧 카드사 업무제휴 약정, 스왑거래 약정, 해외건설사를 위한 입찰/공사이행/선수금환급 보증서 발급은 물론 컴퓨터 시스템 업그레이드에 관한 계약, Y2K 대책, 위험관리 보고서의 작성에 이르기까지 법률문서(legal document)의 형태를 취한 것이면 모두 의뢰대상이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매월 10건 가까운 클리닉 서비스를 수행하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법제팀 내부적으로 새로 배우는 것도 많았다.

더욱이 이와 같은 서비스를 제공받은 현업부점에서는 나름대로 감사의 표시를 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팀장으로서는 그보다는 법제팀이 업무수행시의 수비수(피해·손실의 방지) 역할에 그치지 않고 공격수(이익의 실현) 역할도 할 수 있음을 인식시키는 일이 시급했다. 따라서 의뢰부점에서 법제팀의 클리닉 서비스를 받고 상당한 이익을 올렸다면 그 일정 비율을 법제팀에 할애하거나 만족의 정도를 금액으로 표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물론 실제로 수수료를 지급하는 게 아니고 관념상의 수수료 지급(shadow pricing)에 불과하였지만, 이 자리를 빌어 법제팀의 노력을 별다른 오해없이 평가해주신 현업 여러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그 중의 한 예가 한보철강의 공사감독료 환급금을 산은이 전액 회수하는 데 법적 논거를 제시하고 그것이 성공을 거두게 한 케이스이다. 당진 공장의 코렉스 설비는 산은이 L/C를 개설하였고 그 대금 중에는 오스트리아 제작회사에 대한 공사감독료 선지급금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사가 중단되었으므로 회사측이 공사감독료 선지급금을 환급 받기로 하였을 때 137억원에 달하는 이 돈을 누가 수령할 것인지가 당연히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경우에는 중립적인 법리 논쟁에 그쳐서는 안되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 돈을 회수하고야 말겠다는 鬪志가 중요하다. 팀원들의 퇴근을 올스톱시키고 머리를 맞대고 숙의를 거듭한 끝에 전문변호사들이 수긍하고 법정관리인은 물론 법원 관계자들도 동의하는 법률논거를 작성할 수 있었다. 산은이 이 금액을 전액 회수할 수 있었던 것은 담당부서의 실무자들이 발로 뛰어 다닌 수고의 결과였지만, 법제팀에도 그 공의 일부를 돌리고 법제팀원들과 점심식사를 함께 한 것은 상호간에 성공을 자축하는 의미 이상의 것이었다.

장래를 위한 법제 인프라의 연구

법제팀의 기능은 산은 [업무분장요강]에도 나와 있듯이 단순히 법률문제의 사후처리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법률제도의 조사·연구(research)의 비중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법률제도의 큰 구도하에서라야 구체적인 법률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유로화의 출범과 전자상거래의 폭발적인 증가는 그 법적인 의미를 파헤쳐 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법제팀에서는 유로화 출범의 법적 측면전자상거래 관련법의 시행이 은행업무에 미치는 영향을 심층 분석하여 각각 조사월보 1999년 4월호와 5월호에 실었다. 사실 이러한 법률 분석이 없어도 은행이 유로화로 거래하고 전자상거래 업무를 취급하는 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은행의 입장에서 그에 관한 법률관계를 알고 있다는 것은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방법도 찾아낼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국내에서 어느 학자나 실무자도 이에 관한 분석자료를 내놓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만큼 산은의 관심분야와 연구 수준을 과시하는 것도 된다.

법제팀의 관심사는 통일 이후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한의 현행 법제를 조사하는 한편 통일이 되었을 때 북한의 기업인과 주민들이 은행거래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인프라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사실상 담보가치가 있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지 못한 북한 주민들이 은행을 찾을 수 있도록 하려면 북한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動産 또는 證書 담보제도가 고안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은 산은 조사부내 북한팀과 공동으로 연구자료를 발간하는 등 문제 제기에 그쳐있지만 조만간 정부당국과 학계에서도 본격적으로 논의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상과 같이 법제팀은 여러 분야에서 분투 노력해 왔거니와, 앞으로도 당분간은 첫머리에 언급한 "I-M-F"가 계속되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아직도 행내에서 법제팀은 법률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면하는 요령을 가르쳐주는 곳, 또 법무사 등이 하는 단순한 소송·등기 절차상의 문제를 처리하거나 판례를 조사해주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고, 팀장을 포함한 3명의 책임자와 2명의 행원만으로도 일상적인 업무처리, 금융법률 책자의 발간, 장래에 대비한 제도연구는 물론 은행발전에 필요한 법률전문인력의 양성까지 모두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P.S. 법제팀에서는 1999년 12월 1일 비록 법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국내 최초로 회사정리법, 화의법, 파산법을 통합 해설한 총 800쪽의 "기업도산법 해설"을 발간하였다.
(한국산업은행의 산전수전기 III "함께 극복할 때 시련은 아름답다", 1999.11.에 수록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