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帝國의 SOC 건설

로마 제국의 현대적 해석

로마는 이탈리아 본국과 무력으로 정복하여 영토에 편입시킨 속주, 그리고 자치권을 인정한 동맹국 등으로 이루어진 세계적인 대제국이었다. 기업으로 비유하자면 로마 본사와 크고 작은 현지법인들로 구성된 글로벌한 다국적기업(MNC)인 셈이었다. 본사와 현지법인들은 法과 契約을 토대로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었으며 철저한 책임경영이 실현되었다.

'다국적기업 로마'의 주력사업은 토지임대업이었고 핵심사업은 유통, 토목건설, 군수산업이었다. 로마 군대가 땅을 점령하고 도로와 일차적인 인프라를 구축하면 상공업자들이 가서 도시를 건설하고 유통을 담당했으며 산업을 부흥시켰다. 말하자면 로마는 국가의 지역적 사업단위와 민간의 기능적 사업단위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매트릭스 경영조직이었다. 토착의 정치권력보다 훨씬 싼 정치적 코스트로 공정한 재판과 완벽한 치안, 편리한 시장과 도로망을 제공했기 때문에 주변의 많은 나라가 로마에 합병되기를 원할 정도였다.

'팍스 로마나'의 秘訣

로마 아피아 가도 로마의 역대 황제들은 국가의 안전보장(外政)과 안정된 속주통치(內治), 사회간접자본(SOC)의 정비에 역점을 두었다. 제국 전역의 사회간접자본 정비에 드는 비용은 원로원의 의결을 거쳐야 하는 국고(아이라리움)로 충당하지 않고 황제의 내탕고(피스쿠스)에서 지출했다. 말하자면 로마 황제는 건설부장관도 겸하고 있었다.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는 로마 제국 방위선 바깥에 사는 사람들--로마인들이 '야만족'(바르바리)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의 습격으로부터 제국 주민을 지키는 것만으로 달성할 수 있었던 '평화'가 아니었다. 로마 제국은 다민족 국가였기에 사이가 나쁜 이웃한 민족끼리 어울려 살 수 있도록,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분쟁을 조정하고 수습하여야 했다. 예컨대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도 1년에 한 번 열리는 갈리아 부족장 회의를 없애지 않았다. 그리고 부족회의의 의장, 즉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은 로마인이 맡도록 했다. 로마군이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아주게 된 뒤 그때까지 수렵민족이었던 갈리아인은 안심하고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는 농경민족으로 바뀌었다.

SOC 정비의 利點

로마가 속주, 심지어는 야만족이 사는 곳까지 차별하지 않고 사회간접자본을 정비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생활 수준을 높이려고 애쓴 것은 로마인들이 휴머니즘에 눈을 떴기 때문이 아니었다. 인간은 굶주릴 필요가 없으면 온건해진다. 과격함은 절망의 산물이다. 로마의 세제가 소득에 대한 비율로 성립되어 있는 이상 경제가 활성화하면 속주세도 관세도 매상세도 저절로 많이 걷히게 마련이었다.

일반 서민,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어디에나 가장 가까운 길을 통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했다. 필자는 로마사를 공부하면서 사회간접자본 정비의 중요성과 그로써 인적 교류가 쉬워진 것을 강하게 느끼고, 그 느낌을 독자들과도 공유하고 싶었다. 로마 시대에는 가능했던 것이 왜 그 후에는 오랫동안 불가능하게 되었는가? 이런 의문을 품은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宿願을 품고 있다가 20세기 들어 유럽 共同體를 통하여 조금씩 실현하고 있다.

로마 제국의 한쪽 끝인 스코틀랜드에서 聖地순례에 나선 사람이 다른 한쪽 끝인 예루살렘까지 어떻게 갈 수 있었을까. 로마 가도를 이용하여 무난하게 지름길을 택할 수 있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대에 세워진 성벽 근처의 글래스고에서 군단기지가 있는 요크를 거쳐 런던까지 449 로마 마일(1로마 마일은 1.478킬로미터)-도버-(바닷길)-불로뉴-아미앵-랭스-리옹-(알프스)-밀라노-로마-브린디시-(아드리아 바닷길)-알바니아의 두러스-비잔티움-앙카라-지중해 연안의 타르수스-안티오키아-레바논의 티루스-예루살렘까지 총 4,071로마 마일의 코스를 택하면 된다. 약 6천 킬로미터를 로마의 이정표를 보면서 여권을 제시할 필요도 없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SOC 건설의 財源

트라야누스 원주에 새겨진 도나우강의 부교건설 장면 로마 제국의 황금기--賢帝시대의 막을 연 트라야누스가 두 차례에 걸친 다키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로마 제국 전역에서 벌인 공공사업의 재원은 무엇으로 충당했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것은 다키아 지방의 매장량이 풍부한 금광과 은광, 그리고 다키아 왕으로부터 빼앗은 엄청난 양의 보물이 그 원천이었다. 무엇보다도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로마식 조형미를 유감없이 발휘한 아폴로도로스를 비롯한 건축가와 엔지니어를 군대에서 빼낼 수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 결과 서기 107년부터 112년에 걸쳐(이것은 당시의 건조물에 사용된 벽돌의 제조연도를 보고 알 수 있다)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제국 전역에 걸친 공공사업 러시가 벌어졌다. 다키아 전쟁 중에 대하 다뉴브 강에 건설한 '트라야누스 다리'는 뛰어난 기술, 웅장함에 대한 취향, 실용성에 대한 집착의 결정체였는데 이것이 제국 전역에서 발휘되었던 것이다. 트라야누스 목욕탕, 트라야누스 포룸, 오스티아 항만, 아피아 가도의 복선화 등 트라야누스와 아폴로도로스가 로마와 이탈리아에 세운 공공시설물은 제국의 모든 도시에 본보기가 되었다. 그리고 황제의 영향으로 小플리니우스가 고향인 코모시에 신전과 도서관을 기증하는 등 지방의 유력자들이 사재를 털어 공공시설을 만들어 기증하는 것(노블레스 오블리제)이 붐을 이루었다.

트라야누스는 공공사업을 벌이는 데 그치지 않고 공사를 발주한 측이나 수주한 측에 부정이 저질러지지 않을까 감시의 눈을 번득였다. 시리아 다마스쿠스 태생의 그리스 사람인 아폴로도로스를 비롯하여 그리스인이 없이는 로마의 공공사업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처럼 크게 활약한 그리스인들이 로마인과 공동작업을 할 때에는 좋은 결과를 낳았지만, 자기들끼리 하면 그렇지 못했던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페리클레스나 소크라테스 시대부터 그리스인은 상상력이나 진취성은 누구보다 풍부하지만 조직력이나 효율성 면에서는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늘이 인간에게 두 가지를 주지 않는다면, 각자 뛰어난 분야에서 서로 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출처: 이인화, "본디오 빌라도 찾아내기";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제9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