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의 뉴욕 방문

Sheep Meadow of Central Park in New York 2002년 1월 하순 10년 만에 뉴욕을 찾았다.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현재 수행 중인 프로젝트의 자료 수집차 미국에 갈 필요를 느끼고 있던 차에 집사람에게 뉴욕 출장 건이 생겼기 때문이다. 숙박비를 절감할 수 있는 찬스다 싶어 1월 24일부터 7박 8일 일정으로 대한항공과 뉴욕의 호텔에 예약을 하였다. 항공편은 그 동안 누적된 마일리지를 이용하여 '프리스티지 클래스'로 업그레이드하고 뉴욕 센트럴 파크 남단의 에섹스 하우스에 집사람 거래처를 통해 숙박료 할인까지 받으니 분에 넘치는 호화판 여행이 될 듯 싶었다.

이처럼 홀가분한 기분으로 여행을 떠났지만 10년 만에 보는 뉴욕은 전과는 딴판으로 크게 변모해 있었다.
우선 9·11 테러[당시 참상을 Slide Show로 볼 수 있음: 미국 댈러스의 김병태 변호사 제공]로 맨해튼 남단의 쌍둥이 빌딩이 사라진 게 엄청난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다운타운 쪽에 가면 어디에서나 쌍둥이 빌딩이 시야를 압도했었는데, 뉴욕 도착 직후 제일 먼저 찾아간 사건의 현장(이곳을 "Ground Zero"라고 부른다)에서는 아직도 빌딩 잔해 정리작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찾아간 전전날에도 소방관의 시신이 발굴되어 현장 부근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그라운드 제로의 건설계획을 둘러싸고 뉴욕 시민과 시 당국, 건축가들 사이에 논의가 분분한 가운데 테러 희생자들을 기억하면서 지역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될 새 빌딩에 대한 현상공모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곳곳에 나붙어 있는 슬로건 "United, We Stand"처럼 미국 시민들은 꿋꿋하게 새로운 랜드마크를 건설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두 번째로 뉴욕에서 받은 인상은 맨해튼 거리의 치안이 몰라보게 좋아졌고 그만큼 밤거리도 활기 차 보인다는 점이었다. 10년 전에는 거리에 노숙자(homeless)들이 우글우글했고 맨해튼의 밤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녀야 했는데 지금은 서울의 밤거리나 다름없었다. 10년만에 가보는 42번가 브로드웨이의 타임 스퀘어는 X레이트 극장들도 자취를 감추고 사람들이 낮이나 밤이나 안심하고 돌아다녔다. 이러한 변화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검사장 출신 줄리아니 뉴욕시장이 경찰력을 강화해 이룩한 성과라고 했다. 금년에는 마이클 블룸버그라는 금융정보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뉴욕 시장에 새로 취임하였으니 모두들 뉴욕의 경제가 활성화될 것을 기대하는 듯 했다. 이처럼 타임리하게 뉴욕에 필요한 지도자들이 등장하여 市政을 책임지니 뉴욕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세계적인 대도시로 군림할 것이라 여겨졌다.

셋째로 우리가 만난 한인 교포들은 고국의 외환위기와 9·11 테러사건 여파로 경제적으로 다소 위축된 모습이었다. 특히 지상사 주재원들의 수가 크게 준 반면 유학생 수가 늘었다고 했다. 그런데 맨해튼의 식품점에 들어가보니 많은 곳에서 한국인 주인이 여러 종업원을 데리고 샐러드바, 우동 및 스시바, 꽃집까지 갖춘 종합식품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또 허드슨강 건너편 뉴저지의 팰리사이즈 파크에는 한인업소가 엄청나게 불어나 한 집 건너 한글로 된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한국인의 인구비중이 40%가 넘는다 하니 우리 교포들이 미국 시민권을 속속 취득하게 되면 정치적인 세력으로 등장하는 것도 시간문제라 여겨졌다.

우리 내외는 10여년 전 뉴저지 버겐 카운티의 우리가 자주 다녔던 길(501, 505번 도로)로 해서 전에 살았던 듀몬트까지 찾아가 보았다. 우리가 살던 집 앞뒤의 큰 나무들이 베어져 있었을 뿐 집 주변에 큰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숲에 둘러싸인 조용한 동네였다. 집사람은 우리가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살았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고 했다. 나 역시 뉴욕이 변모한 것 이상으로 우리가 초스피드로 변화무쌍한 人生―직장 복귀와 전직, 몇 차례의 이사, 아이들의 성장, 국가적인 IMF 위기―을 살아온 반증이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10여년 전에 메모해두었던 1988. 12 ∼1991. 9 뉴욕/뉴저지에서의 생활기록을 새삼스럽게 들춰보았다. "10년이면 江山도 변한다"고 했는데 현재의 모습하고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뉴욕/뉴저지가 변모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목  차

           1989 뉴욕 통신
           미국생활 프롤로그 - 1988년 서울에서의 미국
           내가 맡은 일
           파크 애브뉴 460번지
           개인 사생활(privacy)
           여행의 즐거움
           가족관계
           저 축(Saving)
           쇼 핑(Shopping)
           골프의 매력
           공항 행사
           미국의 인종문제
           인종문제의 해결방안
           인종별 특징
           시큐리티(治安)
           일요일(Sunday)
           병 원(Hospital)
           자동차(Automobile)
           영 화(Cinema)
           뮤지컬, 콘서트
           이삿짐
           귀국 비행기
           에필로그 1991

1989 뉴욕 통신

C 兄,
World Trade Center Twin Building 뉴욕에 부임한지 여러 달이 지나도록 소식 전하지 못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분주하게 움직이는 도시에서 근무하는 탓인지 그 동안 몸도 마음도 바빴던 것 같습니다. 지난 며칠 사이 정원 잔디 위에 수북히 쌓인 낙엽을 치우면서 내가 미국에 와서 보낸 4계절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다행히도 집이 허드슨 강 건너편의 가든 스테이트(뉴 저지 주의 별칭)에 자리잡고 있어 자연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지요. 본래 울창한 숲과 계곡이었던 곳이 택지(宅地)를 조성하여 집을 지은 터라 아직도 앞뜰에는 다람쥐가 뛰어 다니고 밤에는 너구리와 스컹크가 잠행을 한답니다.

그런 만큼 팰리세이즈 절벽 위를 가로지른 죠지 워싱턴 브리지를 건너 건물들이 빽빽이 찬 맨해튼으로 들어설 때마다 적전상륙하는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맨해튼 북부의 '할렘'하면 웬지 으시시한 느낌이 들지만 대개는 이 구역을 우회하는 강변도로를 이용하거나, 그 지하를 관통하는 A 트레인을 타게 되므로 위험에 빠진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특히 워싱턴 브리지 버스 터미널과 연결된 175가 지하철역은 뉴욕의 한 단면을 보게 해주는 곳입니다. 버스에서 내려 키오스크에서 신문과 로토(복권)를 사든 출근길의 시민들은 쾡한 눈빛의 홈리스들이 적선을 구하는 긴 회랑을 뛰다시피 건너 지하철 플랫홈에 내려섭니다. 익스프레스 트레인이 통과하는 역인데도 지릿한 냄새가 코를 찔러 만일 A 트레인이 연착이라도 하는 날이면 여간 고통스럽지가 않습니다. 뉴욕의 지하철망은 사통팔달로 연결되어 있어 매우 편리하지만 시설이 낡아 고장과 연발착이 잦습니다. 또 심야의 지하철은 강력범죄의 온상이기도 하지요. 뉴욕의 지하철 플랫폼에는 '타는 곳'의 표시가 없기에 내가 서 있는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대하는 심정은 아틀랜틱 시티에서 '휠 오브 포츈'을 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맨해튼과 '동부의 라스베가스' 아틀랜틱 시티를 인수분해하면 도날드 트럼프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맨해튼의 많은 고층 빌딩과 호텔을 소유한 그는 아틀랜틱 시티의 카지노 호텔王이기도 합니다. 전설(傳說)의 마이더스 왕처럼 그가 손대는 것마다 황금이 쏟아진다고 하지요. 그는 이스턴 항공사가 파업에 휘말린 틈을 타서 뉴욕-워싱턴 셔틀 노선을 사들였습니다. 그가 이례적으로 비분강개한 사건이 1989년 봄에 일어났는데 센트럴 파크에서 심야에 죠깅을 하던 살로몬 브라더즈 여사원이 인근 동네의 흑인 청소년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사건이었습니다. 트럼프가 뉴욕 타임즈 전면광고를 통하여 死刑제도의 부활, 경찰력의 증강을 주장하자 흑인사회에서는 인종적 편견이라고 들고 일어났지요.

아무튼 홈리스와 범죄, 마약, AIDS는 뉴욕시가 당면한 최대의 골칫거리입니다. 중산층 미국의 가정에서 보듯이 버젓한 집에서 차 2대 굴리고 모기지 할부금 물면서 휴가여행 다니려면 부부가 함께 벌어도 모자랄 정도랍니다. 그러니 학식이나 체력면에서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문제가 있는 사람은 근로의욕을 포기한 채 거리로 나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약은 홈리스나 하류층 흑인뿐만 아니라 중산층 백인사회와 청소년들에까지 파고들어 문제가 자못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국운(國運)을 걸고 마약 소탕 작전을 벌이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AIDS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지요. 최근 통계에 의하면 뉴욕시내 병원 응급환자의 1/4이 AIDS 항체검사에서 양성반응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미국에 망조(亡兆)가 들었다고 하는 것은 아직 속단일 것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나 위기는 닥치게 마련인데 요는 어떻게 효과적으로 응전하느냐가 문제겠지요. 다시 말해서 日本의 진주만 공격,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 때처럼 미국민 전체가 합심하여 대처할 수 있느냐가 관건일 것입니다. 일본기업들이 미국문화의 상징이랄 수 있는 컬럼비아 영화사, 록펠러 센터를 마구 사들이자 매스컴이 앞장서서 일본의 도전을 물리치자고 촉구하고 있는데 대국(大國)의 자존심이 이만저만 상하는 게 아닌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미국의 바이탤리티와 다이너미즘은 세계의 리더십을 유지하기에 충분하다는 인상입니다.

Time Square in New York 호기심과 두려움을 간직한 맨해튼의 밤은 이방인(異邦人)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듭니다. 어디선가 화려한 조명 아래 파티와 쇼 무대가 펼쳐지는가 하면, 그늘진 골목에서는 마약과 범죄의 음습한 공기가 감돌기 때문이지요. 관광객들이 으레 찾는 42번가 타임 스퀘어 주변에서는 자칫 봉변 당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촌사람처럼 두리번거렸다가는 영락없이 어깨에 멘 카메라를 들치기 당하거나, 가짜 술병을 일부러 부딪치곤 깨뜨렸다고 뒤집어 씌워 돈을 갈취 당하기 십상이지요. 이 구역은 낮이나 밤이나 사람(특히 떼지어 다니는 흑인이나 히스패닉)이 두려운 곳입니다.
치안과 교통, 주거환경이 갈수록 열악해지자 최근들어 맨해튼을 탈츨하는 기관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시티코프가 53가 본점 사옥을 일본 투자가에게 매각하고 롱 아이랜드 시티로 본부를 신축 이전했는가 하면, 다운타운에 있는 메릴 린치도 허드슨 강 건너편의 저지 시티로 본거지를 옮긴다고 합니다. 어차피 컴퓨터 통신(C&C)이 발달하여 거리의 遠近은 별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C&C는 전화요금 청구서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근거리 통화는 아예 계상되지도 않으며 장거리 통화도 할인 혜택이 많습니다. 어느 곳을 가보아도 컴퓨터 없이는 미국사회가 잠시도 움직일 수 없으리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 첨단을 가는 것이 금융기관이라 하겠습니다. 어느 은행이나 증권회사을 다녀보아도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이 바로 일하는 모습입니다. 업무처리 절차와 내용은 전부 컴퓨터 안에 들어가 있지요. 그래서 블랙 박스 테크놀로지에 접근 할 수 없는 바에야 OJT연수도 수박 겉핥기식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 금융기관들은 선진 노하우의 전수가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보고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미국 은행들을 통째로 사버리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우리 은행에서도 실효가 없는 OJT를 지양하고 전문 연수기관에 직원들을 많이 보내고 있는데, 이편이 비용은 좀 들더라도 제대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뉴욕에서는 연수생 케어가 일과중의 하나인 만큼 저 있는 동안에 C 兄을 모실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환절기에 C 兄의 건투를 빌며 두서 없이 적은 글을 끝맺고자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89.12.28자 [산은소식]에 게재)

미국생활 프롤로그 - 1988년 서울에서의 미국

1988년은 한국인으로서는 자랑스런 한 해였다. 그 해 9월에 열린 서울 올림픽은 자칫 자기비하(自己卑下)에 빠지기 일쑤이던 우리들 자신도 놀랄 만큼 성공적으로 치룬 국제행사였다. 세계 각국이 동아시아의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남북(南北)이 분단된 한반도에 주목하게 되었으며 우리도 비로소 해냈다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인들이 미국에 대하여 자존심을 내세우게 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고마운 나라가 아니라 통상압력이다 뭐다 우리를 귀찮게 구는 나라로 여겨지면서 헐값으로 TV 중계권을 따낸 미 NBC 방송사의 편파적인 중계보도에 모두들 분노를 표시하였다. 올림픽 게임에서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미국팀과 싸우는 반대편, 심지어는 소련팀에까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을 하찮게 봄으로써 스스로 위안을 찾은 셈이었다. 이때를 계기로 80년 광주 사태 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반미(反美)감정이 운동권범주를 벗어나 범시민적으로 공감대를 확산하게 되었다.

내가 뉴욕 사무소로 발령을 받은 것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우리가 미국을 對等하게 바라보게 된 서울 올림픽이 폐막된 다음이었다. 가을 정기 인사가 올림픽 때문에 11월로 순연되었다. 암스텔담 대학원에서 유럽 統合을 전공하였기에 런던과 같은 유럽지역으로 발령이 날 것으로 예상하였던 나로서는 다소 뜻밖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이 바뀌었음에도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뉴욕은 그 중심지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유럽에 이어 미국에까지 가서 견문을 넓힐 수 있게 된 행운에 감사하며 출국 준비를 서둘렀다.

내가 맡은 일

Skyline in New York 1988년도 며칠 남지 않은 12월 27일 나는 뉴욕 케네디 공항에 내렸다. 그 이튿날부터 조금은 실망하고 조금은 만족해하면서 産銀 뉴욕사무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내가 3년동안 담당한 일은 주로 조사업무였다. 사무소의 모든 조사·연구 보고서를 도맡아 쓰면서 사람도 폭넓게 사귀고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특히 産銀의 국제업무 강화 방침에 따라 사무소의 영업점화를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는데 내가 뉴욕을 떠날 때까지 결론을 내지 못한 게 자못 아쉬웠다. (본점에 돌아와서도 美洲 네트워크 정비를 맡게 되었으므로 그 任務는 계속 연장된 셈이다.)

영업점화 방안을 마련하는 동안 미국의 은행관련 법·제도하에서 우리 은행에 적합한 방법을 모색하다보니 맨해튼 유수 로펌의 변호사들과 접촉이 잦았다. 마침 1991년 초부터 미 재무성이 금융제도개혁입법을 추진하게 되었으므로 그 추이를 지켜보며 우리 작업을 진행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만난 변호사들의 프로페셔널리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전문분야에 있어서 나도 그들 못지 않은 실력을 쌓을 수 있다는 자신을 갖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었다. TOEFL 시험도 한번 보았는데 英語는 미국생활 3년 후에도 실력이 크게 진보된 것 같지 않았다. 향상된 것은 완전히 히어링이 되지 않아도 거리낌없이 내 말을 할 수 있는 눈치와 배짱이라고 할까.

조사정보의 주된 소스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이었다. 3년 동안 사무소에서 한 일이란 이 신문을 훑어보는 것이었다. 그 기사 스타일은 내가 글 쓰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뉴욕 생활에서 가장 큰 수확이라면 글을 쉽게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3년 동안 벼라별 보고서를 주무르다보니 제한된 자료만 가지고도 그럴 듯한 내용으로 꾸미는 솜씨만 발전하였다. 더욱이 모든 보고서를 PC 워드 프로세서로 처리하였으므로 어지간한 보고서는 기왕의 자료를 일부 수정하는 것만으로 즉석 OK였다. 나중에는 집에다 포터블 PC(Toshiba Notebook T1200XE)를 장만하여 편지를 비롯하여 무슨 글이나 쉽게 쓰게 되었다.

파크 애브뉴 460번지

460 Park Avenue, New York, NY 10022 은 항상 태극기가 나부끼는 코리아 센터 빌딩의 주소이다. 맨해튼에서는 중간규모인 22층 건물로서 6층에는 소유주인 무역협회 뉴욕지부, 4층에는 뉴욕 총영사관(지금은 대민 영사업무만 취급하고 총영사관은 유엔대표부로 들어가 있다), 5층에는 뉴욕 문화원이 각각 자리잡고 있으며 한국계 금융기관으로는 4층에 KDB(産銀), 12층에 외환은행 뉴욕지점, 20층에 수출입은행 뉴욕사무소가 있다. 우리와 같은 층에는 KOTRA가 함께 있어 자매기관 같은 느낌을 준다. 코리아 빌딩은 그 별칭에도 불구하고 1층에 시티뱅크, 2층과 3층에는 인도은행, 17층에는 독일 총영사관이 입주해 있어 가히 국제적인 오피스 빌딩이라 할 만하다.

57 스트리트는 센트랄 파크에 인접한 미드타운의 중심인 데다 쌍방통행로이므로 차량통행이 많고 파크 애브뉴 주변에는 일본인이 신축중인 리젠트(Rigent) 호텔(지금은 'Four Seasons Hotel'로 이름이 바뀌었다)과 리츠-미쓰코시 빌딩이 있어 맨해튼의 요충지임에 틀림없다. 한국과 독일 영사관이 입주해 있으므로 (비록 Police Line 바깥이지만) 종종 데모대가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의 443호실에 얽힌 일화(episode)는 손꼽을 수 없으리 만치 많다. 본래 한은(BOK) 뉴욕 사무소가 들어 있었는데 81년 韓銀이 써드 애브뉴로 이전한 뒤 우리 은행이 터잡고 있다. 출입문에 재무관(지금은 '재경관'이라 한다)실 팻말이 나란히 붙어 있으므로 총영사관으로 착각한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기 일쑤이다.

역대 사무소장은 고참 부장이 중역(重役) 코스로서 밟고 가는 한은 뉴욕 사무소와는 달리 비교적 신참 부장이 부임해 왔다. 아무래도 그 우두머리의 퍼스낼리티에 따라 분위기가 좌우되게 마련인데, 자회사(子會社) KASI가 같은 지역에 있고 또 재무관이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는 까닭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다. 예컨대 개성(個性)이 강한 C소장 때에는 약간의 잡음도 있었으나, 매사에 신중하고 이른바 통빡(?)을 잘 재는 L소장 때에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많은 해외 네트워크 중에서 뉴욕이 인화(人和)의 표본으로 예거되는 것을 볼 때 두 분 밑에서 인간의 처세(處世)를 배울 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개인 사생활(privacy)

사생활이 유리창처럼 속속들이 드러나는 해외생활에서 동료 직원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 모두 5명에 불과한 뉴욕 사무소의 경우 다른 직원과 不和가 조성된다면 단 하루도 견디기 힘들 것이다. 대부분 직급 순으로 결정되지만 어느 한 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도 아랫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A과장하고 상당한 갈등을 겪기도 했으며, J과장은 이러한 갈등을 견디다 못해 早期 귀국을 심각히 고려하기도 했다.
가족간에도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각자 私生活이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무실과 집은 絶緣이 되어야 하므로 밖에서 일어난 일을 안에다 옮기는 것은 졸렬한 짓으로 치부된다. 때로는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들은 척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바깥에서 스트레스가 쌓이더라도 집에 돌아와 음악을 듣거나 여행을 다니거나 하는 것으로 이를 해소했다. 또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미국에서는 동료, 친구들과 술을 마실 기회가 거의 없으므로 대부분 골프 치는 것으로 시종한다. 그러나 나는 미국에서의 경험을 글로 써보겠다는 막연한 계획 아래 다른 사람의 글을 읽어보고 (내방에는 떠나기 직전까지도 묵은 신문, 잡지를 수북히 쌓아놓아 이것을 치우자는 집사람과 종종 마찰을 빚었다) 직접 현장을 답사하는 데 치중했다. 그 결과 별다른 感情의 앙금이 없이 뉴욕을 떠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미국 체류 중에 개인적인 관심을 갖고 찾아가 본 곳은 다음과 같다.
- 영화 [위트니스]의 무대가 된 필라델피아 부근 랭커스터 카운티의 애미쉬 마을
- 워싱턴 근교에 있는 프리 메이슨 집회장소(조지 워싱턴 기념관)
- 게티즈버그의 전장터
- 뉴욕 주변과 뉴포트의 고급 맨션
- 잠자는 예언자(豫言者)로 일컬어진 애드가 케이시(Edgar Cayce)의 버지니아 비치 A.R.E.(Association for Research and Enlightenment) 연구소

여행의 즐거움

해외 근무의 메리트는 본국에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쇼핑과 여행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미국에서 만끽할 수 있다. 누구는 미국에서 여행 다니던 것이 "휴게소에 가서 일 보고, 주유소에서 기름 넣던 기억밖에 안난다"고 하지만, 우리 가족은 探究的인 여행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주말이나 휴가철이면 여행계획을 세워 마치 역마살(驛馬殺)이 낀 것처럼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녔다. 사진에, 캠코더에 담아두기도 했지만 그 성과도 컸다고 자부한다. 이것은 1990년 초 요통을 앓은 뒤로 주말에 골프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우리 식구가 여행 다니면서 잊을 수 없는 것은 할러데이 인과의 인연이다. 할러데이 인은 세계적인 체인을 갖고 있는데 미국 방방곡곡에 없는 곳이 없다. 다만, 실내풀장 등 스포츠 시설이 잘 돼있어 다른 모텔에 비해 객실료가 약간 비싼 편이다. 그렇기에 우리 아이들은 할러데이 인하면 실내 풀장부터 연상하고 좋아라 하였다. 워싱턴에서 호텔 종업원의 권유로 Priority Club에 가입했는데 10% 할인혜택이 있고 예약이나 객실 배정에 있어 편리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뉴욕에서의 마지막 여행 때에는 주저하지 않고 실내 溫水풀장을 갖춘 포코노 할러데이 인에 투숙하였다.

우리 식구의 손꼽을 수 있는 장거리 여행은 다음과 같다.
- 89. 8 Arcadia National Park→Quebec→Adirondack(7박 8일)
- 90. 7 Gettysburg→Williamsburg→Virginia Beach→Chesapeake Bay Bridge-Tunnel(4박 5일)
- 90. 9 Thousand Islands→Toronto→Niagara Falls(2박 3일)
- 91. 4 Orlando→Miami Beach→Key West(7박 8일)
- 91. 5 Cape Cod→Newport(2박 3일)
- 91. 9 Grand Canyon→Las Vegas(2박 3일 Package Tour)

나이아가라 폭포는 모두 네 번을 다녀왔다.
- 89. 7 우리 내외의 공통친구인 최종범 박사를 보러
- 90. 5 장모님을 모시고 2박 3일(Finger Lakes에서 1泊)
- 90. 8 LA 조카들과 함께. 그러나 모텔을 못잡아 무박(無泊) 2日의 고달픈 여행이었다.
비록 함께 고생을 하며 집사람과 동지애(同志愛)를 느끼기도 했지만 그 후로는 숙소 예약 없이 여행을 떠나는 법이 없었다.
- 90. 9 캠코더를 산 기념으로 Thousand Islands 관광 귀로(歸路)에

아디론댁도 우리 가족이 즐겨 찾은 곳이었다.
- 89. 8 여름 휴가때 집에 돌아오는 길에
- 89.11 Saratoga에 온천욕(溫泉浴)을 하러
- 90. 6 토론토 사무소 직원들과의 합동 캠핑
- 90.10 아디론댁 단풍 구경하러

포코노는 주로 당일치기로 여러 번 다녀왔다. 미국에서의 마지막 가족여행도 펜실베니아 주립 공원이었다. 그러나 1989년 봄에 뉴욕에 다녀가신 부모님께는 미처 지리를 몰라 펜실베니아주의 나이아가라 폭포(?)라고 하는 부시 킬 폭포조차 구경시켜드리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다른 사무소 직원들은 IMF 총회 리셉션 행사 때문에 워싱턴에 여러 차례 다녀왔지만 나도 가족과 함께 두 번 다녀왔다.
- 90. 3 백악관, 의사당 등 사회과목 복습하는 셈치고
- 91. 3 벚꽃 구경하러 갔으나 꽃샘 추위에 떨다가 왔다.
- 91. 5 C이사장 심부름으로 C대리와 함께

가족관계

뉴욕에 사는 주재원 가족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미국에 와서 무한한 自由를 만끽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본래 미국이 신앙의 자유를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이므로 최대한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부인들의 경우를 볼 때 그 의미가 두드러진다. 한국에서는 층층시하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겠지만 미국에서는 누가 간섭하랴! 퇴근 후 술 마실 곳도 없으니 남편 일찍 귀가하겠다, 입학시험의 특혜 받는 자녀들 시험준비 시키느라 같이 밤샘 할 필요도 없고, 간간이 바겐 세일하는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즐기면 되니 만사형통이다. 그래서 처음 부임해온 주재원 가족들은 장기 휴가 나온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임기가 끝날 무렵 심각한 고민에 휩싸이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주재원 본인이야 월급쟁이로서 당연히 귀국을 서두르겠지만 부인과 자녀들은 미국을 떠나기 싫은 것이다. 그 결과 남자만 귀국하는 경우도 종종 생기는데 그 분수령은 5년으로 보고 있다. 5년 이상 미국에 살다보면 서울에 가서 좀처럼 적응을 못하기 때문이다. 주재기간이 길어질수록 귀국의 가능성은 점차 희박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주재원들이 서울의 친가와 처가 부모님을 모셔오거나 방학을 이용하여 처자를 서울에 보내기도 한다. 가족간의 유대와 의무감을 지속시키고 서울의 실정을 직접 체험케 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경우 아이들이 어려 전혀 고민할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年老하신 兩家 부모님이 그동안 어떻게 되실까 하여 서둘러 모시기로 했다. 뉴욕에 부임하자마자 丈人이 돌아가셨으므로 부모님을 첫해 봄에 뉴욕에 오시도록 했는데 우리가 미국 지리와 물정을 몰라 마음먹은 만큼 즐겁게 해드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 이듬해 뉴욕에 오신 장모님은 미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나이아가라 폭포를 비롯하여 여러 군데 모시고 다닐 수 있었다.
우리가 뉴욕에 있는 동안 LA와 시카고에 떨어져 사는 친가와 처가 식구들이 찾아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도 길이 추억에 남을 만한 일이었다.

저 축 (Saving)

미국민의 평균 저축률은 4%가 채 되지 않는다. 그만큼 번대로 쓴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사업을 하는 한 친구는 매주 금요일 Pay Check에 사인하기가 귀찮아서 주급제(週給制)를 월급제로 바꾸었더니 현지 종업원들이 1∼2주는 흥청망청 지내다가 다음 월급날을 앞두고서는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더라는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또 월급을 받은 직후에는 결근을 많이 하게되어 결국 주급제로 환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미국에서 살다 보니 우리도 그들을 닮아가지 않나 생각하게 되었다. 좀 목돈이 생겼다 싶으면 세일 광고에 현혹되어 물건을 구입하는 등 저축이 늘어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야 어차피 세간살이를 새로 장만해야 하므로 언젠가는 살 물건을 미리 챙긴다고 치부하였지만 정말 미국 사회에서 돈 모으기는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90년대 들어 미국에는 개인파산 신청을 하는 사람이 크게 증가하였다. 80년대 후반 빚을 얻어 부동산 투자를 한 사람이나 불경기에 해고(lay-off)될 줄 모르고 크레딧 카드로 값비싼 물건을 사들인 사람이나 연체(past due) 독촉에 시달리다가 파산신청을 한다는 것이다. 또 미국의 파산제도는 우리나라처럼 사회생활에 치명적인 것이 아니고 경제활동에 약간의 제약을 가하는 정도이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파산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크레딧 카드만 해도 자칫하면 사람을 빚더미 위에 올라서게 만든다. 현찰 없이 어떤 물건이나 살 수 있게 하는 플라스틱 카드의 위력은 대단하다. 한 사람이 여러 장을 신청할 수 있으므로 크레딧 카드로 동원할 수 있는 금액은 수천불, 수만불에 이른다. 미국 도처에는 크레딧 카드 중독자를 치료하는 크레딧 클리닉이 있는데 여기서는 환자로 하여금 크레딧 카드를 한 장도 남기지 않고 찢어 없애게 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크레딧 카드를 쓰지 않는 게 저축의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은행이용명세표를 보더라도 처음 1년 동안에는 크레딧 카드 대금이 5백불을 넘지 않았으나 말년에는 3천불 한도에 거의 육박하도록 써재꼈다. 결국 나의 저축액은 車 판돈에 불과했고, 집사람이 생활비를 절약하여 모아놓은 돈이 상당한 목돈이 되어 귀국 짐 쌀 때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쇼 핑(Shopping)

미국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쇼핑이다. 남편이 쇼핑을 거들지 않아 이혼하겠다는 여자도 많다. 도심지 말고는 구멍가게(흔히 "Deli"라 부름)가 없기 때문에 우유 한 통을 사더라도 차를 몰고 그로서리에 가야 된다.
쇼핑 몰에 가면 미국식 생활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길거리가 한산하여도 쇼핑 몰에는 주차장에 차댈 곳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붐빈다. 쇼핑 몰에는 없는 게 없다. 백화점은 물론 각종 전문 숍, 서점, 레코드점, 음식점(주로 패스트 푸드를 취급하지만), 주유소, 심지어는 극장, 이발소까지 있다. 그러므로 쇼핑 몰에 들어가면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북부 뉴저지, 특히 버겐 카운티에는 대형 쇼핑 몰이 많다. Paramus, Garden State Plaza, Riverside Square, Bergen, Wayne, Shorthill Mall등 모두 고속도로와 로칼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요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이들 쇼핑 몰에 가는 지리부터 익히지 않으면 안된다.
보다 고급의 다양한 물건을 고르려면 루트17과 루트4에 즐비한 해당 전문점을 찾아야 하며 Secaucus, Woodberry, Flamington과 같은 팩토리 아웃렛에 가면 유명 브랜드의 고급상품을 공장도 가격으로 싸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쇼핑의 메카라면 역시 맨해튼의 Fifth Avenue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감히 발을 디뎌놓을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Sax, Bergdorf Goodman을 비롯한 고급 백화점과 Gucci, Bali, Burberry, Aquascutom, C.Jourdan 등 세계의 이름 있는 고급 전문점의 화려한 쇼윈도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 중에서도 128.54 캐럿 다이아몬드가 전시돼 있는 티파니는 관광객들의 아이 쇼핑 코스이다. 피프쓰 애브뉴에는 천박한 자본주의를 상징하듯 온통 金빛으로 치장된 트럼프 타워도 있지만 Doubleday, B. Dalton, Barnes & Noble과 같은 서점도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골프의 매력

주재원들이 열심히 하고 가는 골프에 나는 솔직히 말해서 별로 열의가 없었다. 뉴욕에 오자마자 '핑' 골프채를 장만하고 안양 C.C. 출신의 손흥수 프로한테 10시간 레슨을 받기도 하였으나 필드에 자주 나가지 않았으며 눈에 띄는 진보도 없었다. 1989년 4월 로클리 컨트리클럽에서 C 소장이 머리를 얹어 주셨는데 Front Nine 4번 연못을 넘기는 홀에서 버디를 한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비슷한 시기에 골프를 시작한 신한은행의 고환상 하고는 平生 골프 친구를 하자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1990년 초 내가 허리 디스크로 입원을 한 뒤로 골프채를 손에도 대지 않았기 때문에 같이 골프를 칠 기회가 거의 없었다. 1991년 들어 허리가 어지간히 회복되어 골프를 다시 시작하였으나 그가 귀국 발령을 받아 한번도 같이 라운딩을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다.

여러 군데 코스를 순례하며 분투노력하였으나 뉴욕을 떠날 때까지도 100을 깨지 못한 것이 아쉽다. 다만 내가 골프를 처음 시작했던 로클리 Red 9번홀에서 벙커 샷을 날린 것이 그대로 홀컵에 들어가 '파'를 하는 진기록도 세웠다. 특기할 만한 것은 싱글을 치는 중학 동창 이범연한테 몇 차례 특별지도를 받아 기초를 다진 것이다. 아직도 비기너로서 골프를 운위할 자격은 없지만 이왕 투자한 게 아까와서라도 수준급까지는 골프를 치고 싶다.

내가 가본 골프장과, '100'을 못깨 부끄럽긴 하지만 1991년중의 스코어는 다음과 같다.
- Rockleigh(public) 104 사무소-KASI 환송 골프(91.9.7)
- Overpeck( " ) 101 N박사 방문 기념(89.10.)
- Pascack(semi-private) 104 A과장 환송(91.3.)
- Rockland(public) 102 사무소 전지(轉地)훈련(91.5.)
- Crystal Spring(private) 115 C사장 개인 멤버십(91.5.)
- Fox Hollow(private) 107 First Chicago P씨 초청(91.6.)
- Connecticut(public) 108 Mantrust K씨 초청(91.7.)
- Marine Park( " ) 108 이범연 지도 라운딩(91.7.27)

공항 행사

뉴욕에 근무하는 주재원이 케네디 공항에 100번 이상 나가면 자기 차례가 온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닌 것이 사람 마중하러, 배웅하러 공항에 나갈 일이 많이 생긴다. 나도 가족 맞이하기 위해 길 연습하러 케네디 공항에 나간 것을 시발로 심할 때는 1주일에 서너 번, 심지어 하루에 두 번까지 나갔다. 최고 기록은 91년 8월이다. 본점 重役의 대거 행차로 도합 10번 이상 공항 나들이를 했다.
뉴욕지점이 영업을 하고 있는 지금은 지점장의 공항 출입시에도 직원이 나가는 게 아니라 콜택시를 이용($40-45 plus toll)한다고 했다. 직원의 인건비가 얼만데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중이든 배웅이든 공항에 나가는 일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뉴저지에서 케네디 공항에 가는 루트는 크로스 브롱스, 디건 익스프레스, 할렘 드라이브 등 3개 있는데 "Ten Ten"(AM 라디오 1010MHz) 뉴스의 교통정보를 듣고 비교적 막히지 않는 길을 택해야 간신히 시간을 맞출 수 있다. 소통이 잘되면 40분 남짓 걸리는 거리(우리 집에서는 왕복 75마일)지만 적어도 1시간 이상 여유을 두고 떠나야 한다. 크로스 브롱스에서는 조그만 사고가 일어나도 몇 마일씩 체증이 빚어지므로 그 꿈쩍도 안하는 차량 행렬 속에는 공항에 가기 위해 발을 구르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되어 반대편 차선에 있는 나까지 안타까울 때가 종종 있다.
공항에 다녀오는 경비도 만만치 않다. 워싱턴 브리지 톨, 트라이 보로 브리지 또는 화이트 스톤 브리지 톨 2번, 공항 주차비등 최소한 13달러가 든다. 이것저것 생각하면 콜 택시 부르는 게 차라리 경제적일 수 있지만 公私間에 공항 나가는 것을 회피할 수는 없다.

본점 임원이라도 오시는 경우에는 뉴욕에 있는 전직원이 영접을 나가야 된다. 차도 경찰 눈치 보며 터미날 바로 앞(Passenger Pick-up)에 대지 않으면 안된다. 공항 구내에서도 터미날간의 이동 루트를 소상히 파악해두어야 한다. 이런 일을 할 때마다 짜증이 나지만 몇 년 후 내 자신이 귀한 손님이 되어 이 자리에 설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달래곤 하였다.

공항출입이 빈번했던 일도 기억에 새롭다. 1989년 8월과 9월중엔 연수 또는 출장차 뉴욕에 다녀가는 임·직원이 유달리 많았다. 게다가 워싱턴에서 개최하는 IMF 리셉션 행사관계로 공항출입이 잦았다.

8월 12일 밤  케네디 공항        H차장, K대리 출장차
    13일     케네디 공항        성자 누님 가족 귀국
    15일     라과디아 공항      A대리 뉴욕 연수차
    17일     마린 에어          L과장 뉴욕 연수차
             라과디아 공항      재무부 S사무관 연수차
9월  1일     케네디 공항        H부총재보 환송
                                사무소 직원들 워싱턴 출장
     2일     케네디 공항        A대리 뉴욕 연수 마치고 귀국
                                ADB J씨 뉴욕 방문
     5일     라과디아 공항      H과장 가족 뉴욕 부임
                                그러나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함
    12일     케네디→라과디아   한국종금 O사장 영접
    22일     케네디→라과디아   S부장, L과장 워싱턴 리셉션 행사 주관차
    23일     케네디 공항        SMBC C사장 IMF 총회 참석차
    30일     케네디 공항        C사장 귀국 

미국의 인종 문제

미국에서 잠시라도 살아보면 여러 인종에 대해 경험 반, 선입견 반의 인상을 갖게 마련이다. 가장 보편화된 상식은 "백인은 친절한 것 같아도 속마음을 열어주지 않고, 흑인은 다정하지만 충동적이고 통제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히스패닉(스페인어를 쓰는 중남미계 이민)은 떠들썩하고 신뢰할 수 없다"는 것 등이다. 미국에서는 여러 인종과 어울려 살 수 밖에 없으므로 나름대로 그들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단적인 예로 미국법은 사람을 채용할 때 피부 빛깔에 따른 차별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구인광고를 낸 다음 열이고 스물이고 찾아오는 지원자중에서 맘에 드는 (피부 색깔의) 사람을 결정할 때까지 면접을 계속해야 한다. 인터뷰 중 출신지를 물어보는 것조차 금지되고 있다.

지난 4월 29일 LA에서 발생한 인종폭동은 한인 교포의 피해가 엄청났지만 어느 정도 예견 가능한 사태였다. 이민 초기단계의 한국 교포들은 우선 집값이 싸고 손쉽게 장사를 할 수 있는 흑인 거주지역에서 유태인등으로부터 가게를 양도받아 사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몇년 후 기반이 잡히면 학군이 좋다는 백인 거주지역으로 집을 옮기는 게 순서다. 미국에 와서 고생하는 게 자식 잘 가르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식이 있는 흑인 주민들한테는 자기 동네에서 돈을 벌어 딴 곳에다 투자하는 한국 사람들이 불공평해 보이고 못마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 한국 사람들은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때문에 흑인들이 별 죄의식 없이 저지르는 '숍리프트'(가게 물건 훔치는 것)에 대해 과잉반응을 보이기 일쑤다. 이번에 흑인, 히스패닉들로부터 방화·약탈을 당한 데에는 이러한 평소의 좋지 않은 의식이 반작용을 일으켰으리라고 쉬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흑인들의 의식구조는 1991년 8월 뉴욕의 브루클린 크라운 하이츠에서 벌어진 흑백 분규에서도 극명하게 표출된 바 있다. 이곳은 동구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 이민온 하시딤파 유태인들이 모여살다 타 거주지역으로 떠나가 버리고 지금은 그 자리를 흑인등 유색인종이 채우고 있는 지역이다. 그곳에서 어느 날 유태인이 몰던 밴이 자전거 탄 흑인 소년을 친 사소한 교통사고가 인종 폭동으로까지 번진 것은 인구비율로 10% 밖에 되지 않는 유태계 백인들이 여전히 지역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데 대한 흑인들의 집단항거인 셈이었다.

인종문제의 해결방안

이번 LA 사태는 워낙 심각했던 만큼 미 정부와 각계에서 대책을 마련할 것으로 보이지만, 자연계는 우성인자를 가진 생명체가 환경을 지배하게끔 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 한국민들은 새로운 각오를 굳건히 해야할 것으로 믿어진다. 이것은 인종 차별 이전의 생태학상의 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뿌리를 내리는 첩경은 사업을 열심히 하여 세금을 많이 납부하고 대표자를 정치무대로 내보내는 것이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스라엘 민족도 그러했다. 당시 가나안 땅은 모세가 파견한 대부분의 정탐꾼들이 자신과 용기를 상실하리 만큼 그 원주민들이 상당한 문명을 이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성경 여호수아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 "내가 너희의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축지 아니한 성읍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 거하며 너희가 또 자기의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는다" 하셨느니라.

오늘날 세계 어느 곳을 가든지 우리 민족은 원주민들과 부딪힐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우리 민족이 고층빌딩이나 하이웨이를 건설하지도 않았음에도 우리가 신념만 가지면 그 땅을 차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은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 민족은 좌절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인종별 특징

뉴욕에서 자영업을 하는 어느 교포는 여러 인종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었다. 흑인은 일당제 아니면 주급제로 하지 않으면 굶기 십상이다. 그들은 돈이 생기면 충동구매를 하기 때문에 돈을 받은 그 다음날부터 쪼들리게 된다. 히스패닉도 사정은 비슷한데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느라 탕진하기 일쑤다. 따라서 흑인과 히스패닉을 고객으로 하는 장사는 싸면서도 화려해 보이는 아이템을 고르는 것이 요령이다. 다만 흑인 중에서도 자메이카 출신은 비교적 착실하고 성취동기가 강하여 안심하고 일을 맡길 수 있다. 멕시칸은 인건비가 저렴하고 아무리 힘든 일도 묵묵히 하면서 가족 부양에 힘쓴다. 그러나 안경 쓴 멕시칸을 보기 어려운 것처럼 자신의 신분상승을 위해서는 별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편이다.
반면 백인들은 좀처럼 접근을 허용치 않으며, 특히 앵글로 색슨계 백인의 이스태블리시먼트는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다. 그래도 이태리계 백인은 우리들과의 감정 교류가 비교적 용이한 편이다. 고급 상품의 세일즈에 있어서는 유태인의 힘을 빌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관찰은 다소 편견이 있는 것 같지만 거의 상식으로 통하고 있다. 뉴욕 맨해튼에서 카메라, 전자제품, 다이아몬드는 유태인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신문·잡지를 파는 키오스크는 인도·파키스탄인이, 주차장 관리는 십중팔구 히스패닉이 맡아 한다. 그리고 그로서리, 세탁소는 대부분 한국인 차지다. 이것은 인종에 대한 차별 때문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일종의 비즈니스 영역이 구축된 결과라고 생각된다.

시큐리티(治安)

처음 뉴욕에 도착하였을 때 매우 겁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지하철역에서는 흑인 부랑아들이 지나가는 행인의 허점을 노리는 듯 어슬렁거리고 거리에 나서면 흑인 또는 히스패닉 청소년들이 작당이라도 한 듯 서 있다. 심지어는 경비가 출입문을 지키고 있는 오피스 빌딩에서도 열쇠가 있어야 화장실에 들어갈 수 있다. 어느 곳을 보아도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구석이 별로 없었다.
사실 맨해튼에서는 피해를 당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일부러 부딪혀 놓곤 술병을 깨뜨렸다 하여 돈을 갈취하는 놈, 토마토 캐첩을 뿌린 옷을 세탁해주겠다 하고 그 사이에 지갑을 소매치기하는 놈, 길을 물어보는 척하다 소지품을 네다바이하는 놈 등 조금만 방심을 해도 소리개 병아리 채듯 하므로 아무라도 자칫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터였다.
그러므로 맨해튼에서는 안전수칙이 까다롭게 마련이었다. 두리번거리지 말고 똑바로 앞만 보고 걸을 것,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지 말 것, 호주머니에 돈을 분산시켜 넣고 다닐 것, 러시 아워 이외에는 지하철을 타지 말 것, 42가와 같은 우범지역은 혼자 다니지 말 것 등등. 뉴욕에 연수차 온 어느 연수생은 너무 겁먹은 나머지 하숙집에 틀어박혀 TV나 보다가 귀국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뉴욕에 오래 살게 되니까 자연 요령이 생겼다. 사실 거리의 부랑아나 엉터리 세일 스토어는 관광객이 밥이라 할 정도로 촌티 나는 사람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때문이다. 불쑥 튀어나와 자동차 유리창을 닦아주고는 코인 몇 닢 받아가는 흑인 청년과 농담을 할 단계가 되자 전에 얼씬 못하던 우범지역도 거리낌없이 다닐 수 있었다.
한가지 다행한 일은 비록 출퇴근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도 좋은 동네에서 사는 덕분에 가족들은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었던 점이다. 밤에 현관문을 잠그지 않아도, 심지어는 차고문을 열어놓고 자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 만큼 맨해튼이 범죄의 소굴처럼 인식되었으므로 집사람은 자연 맨해튼을 멀리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년 전하고 가장 많이 달라진 부분이 이 대목일 것이다.

일요일(Sunday)

미국의 주말은 좀 유별난 데가 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모두 쉬므로 금요일 아침이면 TGIF! (Thank God, it's Friday!)라고 외친다. 우리와 같은 주재원들도 처음에는 갑자기 닥친 이틀 간의 여유에 무엇을 할지 몰랐으나, 미국생활에 좀더 익숙해지니 이틀도 짧다고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흔히 주말의 이틀 중 하루는 골프를 치는 등 나만의 시간을 갖더라도 나머지 하루는 가족과 함께 쇼핑을 가거나, 피크닉을 가는 등 봉사의 날로 정하는 게 보통이다. 우리의 경우 일요일 오전에는 교회에 나가야 했으므로 골프는 가급적 토요일날 치고 일요일에는 교회 끝나고 쇼핑 몰에 가거나 외식을 즐기곤 하였다.

이때마다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 것이 우리가 살았던 버겐 카운티에는 "Blue Law"라는 법률이 있어 일요일에는 대부분의 쇼핑 몰이 문을 닫는다는 점이었다. 먹는 것과 관련된 그로서리나 레스토랑은 문을 열지만 문을 닫아도 별지장이 없는 다른 상점은 대부분 영업을 쉬었다. 이러한 카운티 법률은 청교도 이민 때 제정된 것으로 보이는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버겐 카운티에서는 이를 위반하면 벌금을 물리는 등 아직도 엄격히 시행되고 있다.
버겐 카운티가 얼마나 보수적인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카운티 북부에 위치한 에머슨이라는 동네에는 19세기 빅토리아풍의 집들이 즐비한데, 이 때문에 영화의 로케 장소로 곧잘 사용되곤 하였다. 그러자 1991년 동네주민들이 영화 세트장 대여행위는 동네 분위기를 소란스랍게 만든다 하여 이를 일체 금지하기로 결의한 바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끝난 다음 버겐 카운티를 벗어나 웨인 몰까지 가거나(그곳에는 두꺼운 피자를 파는 우노(Uno) 가게가 있다) 드라이브 삼아 우드베리까지 가곤 하였다. 가고 오는 도중에 경치 좋은 곳에 들러 차를 내려 쉬곤 하였으므로 주말에는 우리의 행동반경이 자연 넓어질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일요일날 교회에 빠질 요량을 하고 1박 2일로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병 원(Hospital)

뉴욕에서 3년 사는 동안 우리 식구는 병원신세를 여러 번 졌다. 처음 사건은 영진이가 거실에서 놀다가 TV 모서리에 부딪혀 눈두덩이 찢어진 일이었다. 이때 집사람은 미리 홈 닥터한테 전화로 알려 소아외과 의사를 수배해 놓고 인근 잉글우드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침착하게 일을 처리한 집사람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두 번째로는 내가 1989년 가을 허리를 삐끗한 뒤로 치료를 게을리 한 탓에 1990년 1월초 요통이 도져 결국 11일간 입원한 일이다. 이때에는 절대안정(bedrest)을 위해 병원에 들어갔는데 5천달러 이상의 치료비(물론 의료보험으로 처리되었다)가 든 것이 아깝지 않으리 만큼 진료 및 미국생활경험 면에서 효과가 있었다. 예컨대 룸 메이트인 니콜라스(Nicholas Vasquez)와 집중적으로 영어회화를 한 것도 좋았다고 생각된다. 불쌍한 니콜라스는 初老의 협심증 환자였는데 의사가 엄금한 피자를 그렇게 먹고 싶어했다. 마침 콜롬비아 아비앙카(Avianca)항공 여객기가 연료부족으로 롱 아이런드에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뱃속에 마약을 숨겨 갖고 오다 죽은 사람은 죽는 순간에도 환각 속에서 웃었을 것이라는 그의 유머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세 번째로는 영진이 탈장(inguinal hernia) 수술을 위해 1991년 7월 22일 잉글우드 병원에 하루 입원하였다. 새벽 6시에 병원에 나가 8시경 수술에 들어갔는데 경과가 좋아 오후 1시에 퇴원할 수 있었다. 이때에도 병원비가 3천달러 가까이 들었지만 전액 보험 처리가 되어 내 개인부담은 全無하였다. 그렇지만 미국의 의료수준이 세계 최고라 해도 이처럼 의료비 부담이 커진다면 오래지 않아 보험이 없는 저소득층에는 그림의 떡이 되지 않을까 저으기 염려되었다. 사실 교포 중에는 출산비를 아끼려고 애기 낳으러 서울에 다녀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자동차(Automobile)

미국은 자동차 없이는 살 수 없는 나라이다. 미국에 처음 도착하였을 때 1.5Km 떨어진 그로서리에 걸어서 간 적이 있었다. 갈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이것저것 한 보따리 사들고 오려니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중교통수단이 많은 대도시말고는 쇼핑을 하든, 영화를 보든 외출이란 차 몰고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 직원이 부임해 왔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운전면허 따는 것이다. 뉴저지에서는 소셜 시큐리티(SS) 번호가 있어야 면허증이 발급되므로 자동차 관리사업소(MVS)에 가기 전에 사회보장국(SSA)부터 들려야 한다. 그 다음은 자동차를 구입하는 일이다. 지금은 새 차를 구입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었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는 중고차를 사는 것이 관례였다.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가 흥정을 벌여야 했다. 경험 많은 동료 직원이 도와준다고 해도 좋은 차를 싸게 산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내가 2년 8개월 동안 5만 마일 이상 몰고 다닌 올즈모빌 시에라(Oldsmobile Cutlass Ciera)도 이렇게 구하였다. 두 번째 찾아가서 마음에 딱 드는 차를 발견하였고 800달러나 깎아 살 수 있었으니(현금 9천달러) 다행이었다. 더욱이 3년 동안 한번도 말썽을 부린 일이 없었으므로 자동차에 관한 한 큰 행운을 누렸던 셈이다. 81천마일이나 달렸음에도 엔진 상태가 너무 좋아 방법만 있다면 서울에 가져가고 싶을 정도였다.
이것은 본래 좋은 차를 인수한 탓도 있지만, 시에라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인격적(?)으로 대하고 자동차 손질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운행을 마치고 차고에 넣을 때면 한번씩 어루만져 주곤 했다. 시에라도 주인의 심정을 이해하고 충분히 보답을 한 것이다.
※ 신문광고내용: V6 4 door Sedan Black color w/leather seats All power AM/FM Stereo w/cassette

영 화 (Cinema)

우리 식구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소니 27인치 TV를 사고 하루종일 영화만 보여주는 케이블(HBO)을 신청한 것이었다. HBO는 'Home Box Office'의 약자로 안방 영화관이란 뜻이다. 개봉 영화도 반년 내지 1년 있으면 방영해준다. 그럼에도 우리는 새 영화를 보러 극장에도 여러 번 갔다. 3년 기한으로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오래 기다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영화관은 여러 홀에서 동시에 몇 편을 상영한다. 따라서 표 한 장을 사가지고 팝콘을 먹으면서 하루에 여러 편 보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가 본 인상적인 영화는 다음과 같다.
- National Lampoon Christmas Vacation (K대리 가족과 함께 89년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 SF (선주에게 베이비시터 맡기고 본 이상한 공상과학 영화)
- Indiana Jones and the Last Crusader (아이들이 좋아하는 닥터 인디를 만나기 위해)
- Teenage Mutant Ninja Turtles (아이들 성화에 못이겨 속편까지 보았다)
- Home Alone (나중에 Video Tape도 샀다)
- Sleeping with Enemy (집사람과 번갈아 TMNT II와 동시에 보았다)
- Dances with Wolves (집사람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화제작)
- Rocketeer (아이들 특선 프로)
- Robin Hood (영진이 친구 웅규, 혜련이와 함께)
- Thelma & Louise, Terminator 2(이사짐을 꾸리고 나서)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영화는 [Dances with Wolves]라고 생각된다. 케빈 코스트너가 제작, 감독, 주연하고 91년도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던 화제작으로서, 오늘날 미국 사회의 각 부문에 파급되고 있는 신사고(新思考)를 반영하고 있다. 넌 픽션 같은 픽션이 이 영화는 러닝 타임 190분이지만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남북전쟁 당시 부상을 입고 다리를 절단 당할 위기에 처한 북군(北軍)의 던바르(John J. Dunbar) 중위가 자살적인 행동으로 南軍 진영으로 뛰어든다. 팽팽한 대치상태가 일시 교란되면서 북군이 승기(勝機)를 잡고 던바르 중위는 일약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이 된다. 그는 인디언이 출몰하는 서부 변경의 1인 요새로 자원하여 떠난다. 황량한 광야에서 홀로 늑대를 벗삼고 지내던 던바르('늑대와 춤'이란 인디안이 그에게 붙여준 이름임)에게 인디안 수(Sioux)族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는 수족에 섞여 살던 白人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나름대로 인디언과의 평화적인 공존(共存)을 모색한다. 그러나 그는 남북전쟁 후 서부 개척에 나선 미국 군대로부터 이미 아웃사이더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인디언族 사이에 섞여 함께 쫒기는 신세가 된다.

이 영화에서는 수 족조차도 거의 잊어버린 라코타(Lakota) 방언이 주된 대사로 나오며 영어는 자막으로 처리되고 있다. 인디안 피가 섞여 있는 코스트너가 라코타 말을 쓰는 것을 끝까지 우겨 간신히 오리온 스튜디오의 동의를 얻어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Little Big Man]과 같이 인디언의 관점에서 서부 개척을 다룬 영화는 있었지만 이 영화처럼 인디언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바꾼 영화는 일찍이 없었다. 이 영화를 보고 많은 인디언들이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었다고 하니 한 편의 영화가 천 마디의 웅변보다 더 호소력이 있었던 셈이다.
이 영화는 스케일 면에서도 단연 뛰어나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서부의 광야와 버팔로 들소 떼의 대질주 장면은 아름다운 존 배리(John Barry)의 음악과 함께 압권이다. 이 영화의 무대가 되었다는 와이오밍주와 사우스 다코타주를 직접 찾아가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뮤지컬, 콘서트

춤과 노래가 화려하게 어우러지는 뮤지컬은 미국의 대표적인 공연예술이다. 영화화된 것도 많지만 극장에 가서 보는 것만 훨씬 못하다. 문화적으로 고상한 척 할 수 있는 극장 분위기가 좋기 때문이다. 사무소 年末 행사로 [Gypsy], [Grand Hotel]을 구경했고 우리 내외만 따로 [Phantom of the Opera], [Cats], [Les Miserables]을 보았다. 뮤지컬 관람은 귀빈을 모시는 VIP 코스이므로 지난 6월 시카고 妻兄이 뉴욕에 오셨을 때에는 오케스트라席($60)에서 [Cats]를 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두 달전에 미리 예약하고 1990년 10월 3일(개천절) 낮 프로(Matinee)로 본 [오페라의 유령]이 제일 인상적이다. 변화무쌍한 무대와 가슴 아픈 줄거리 못지 않게 우리 귀에 익은 아름다운 아리아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작곡한 앤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는 그의 뮤지컬이 뉴욕과 런던에서 동시에 4편이나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의 鬼才이다. 그는 이재(理財, 재테크)에도 매우 능하여 그의 [모스트 유스풀] 프러덕션은 주식회사로서 사채까지 발행하며 그 자금으로 그의 뮤지컬을 전세계 주요 도시에서 공연하고 있다.

링컨 센터의 뉴욕 필 콘서트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이웃 덕분에 몇 차례 가볼 수 있었다. 콘서트나 오페라 공연이 있는 날 링컨 센터에 가보면 藝術 애호가들 덕분에 세계 제일의 음악회관이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이 회원으로 가입하여 적쟎은 돈을 기부하거나 자원봉사자로서 프로그램 안내, 기념품 판매 등을 맡아 하기 때문이다.
우리 내외도 애버리 피셔 콘서트홀(Avery Fisher Hall) 회원 티켓을 이용하여 베토벤 교향곡을 현장에서 감상할 기회를 가졌다. 집에서 레이저 디스크로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르린 필의 [에로이카] 연주를 여러 번 들었지만, 문화적으로 고상(?)해 보이는 白人들 사이에 끼어 (사실 링컨 센터에서 흑인 청중을 찾기란 쉽지 않다) 生음악을 듣는 것은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에 카라얀, 번쉬타인과 같은 마이스트로(巨匠)가 타계한 데 이어 커다란 지휘 폼으로 유명한 주빈 메타가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뉴욕 필의 지휘봉을 놓게 되었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삿짐

뉴욕 생활의 시작과 끝은 이삿짐을 풀고 싸는 것이다. 배로 부쳤건 이민 가방을 들고 왔건 몇 가지 생필품으로 시작한 미국 생활이 떠날 때쯤이면 침대·소파다, TV·냉장고·세탁기다 해서 한 차 가득 되게 마련이다. 뉴욕 출발 직전에는 누구나 이삿짐을 꾸린다. 그 물건 하나 하나에서 미국생활의 단편이 묻어나는 것을 본다. 짧은 시간에 상념에 젖어들 시간은 없어도 이것 살 때 어디로 쇼핑 갔었지, 이것 사고나서 한동안 경제적으로 곤란을 받았지, 이것 가지고 안가본 데가 없었지 하며 미국생활을 돌이켜보게 된다.

이삿짐을 꾸릴 때 때로는 자기모순 속에서 고민을 하기도 한다. 내가 얼마나 한국 경제에 기여했기에 이렇게 외제물건만 사가도 되나, 차라리 '메이드 인 코리아'를 구해보거나 아니면 현금으로 챙겨가 국산품을 애용해야 하지 않나 잠깐은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新婚때 장만한 세간살이를 바꿀 때쯤 미국에 와서 남들이 모두 동경하는 美製물건을 사들이는 것이 과연 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인가 하고 自省을 해본다.
그러나 똑같은 품질을 기대하지는 않더라도 같은 돈으로 한국에 돌아가 살 수 있는 물건이 半도 안된다는 구매력 면에서 보면 더 이상 주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세탁기가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터에 미국에서는 20만원이면 제일 좋은 것을 살 수 있는데 기능이 훨씬 떨어지는 국산 세탁기를 50만원씩 들여 사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지도층에 있는 더욱이 국록(國祿)을 받는 인사들이 앞장서서 최고급 외제만 사가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힐 때가 있다.

아무튼 이삿짐을 실어 보낼 때면 내가 벌어 이만한 물건을 장만했다는 것이 가슴 뿌듯해지면서 실감이 난다. 그러나 이삿짐 리스트에 들어 있지는 않지만 제일 중요한 재산이 있다. 3년 동안 몰라보게 자란 아이들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얼마나 반가워하실까, 아이들이 지껄이는 몇 마디 영어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생각하면 다른 값진 물건이 없다손 쳐도 미국 생활이 손해 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귀국 비행기

해외 근무의 그랜드 피날레는 공항에서 동료 직원들과 作別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임기는 끝나게 마련이다. 시간이라는 억센 손에 떼밀려 귀국 길에 오르게 된다. 바로 엊그제만 해도 떠나보내는 편에 서있던 내가 어느덧 떠나는 사람이 되어 비행기를 타게 되는 것이다.
귀국 길에서는 온갖 상념이 머리를 교차한다. 지난 세월 후회스러웠던 일, 보람되었던 일과 함께 새로운 임무에 대한 기대와 불안, 가족·친지들과 재회의 기쁨, 귀국후의 생활 걱정 등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러나 이 일은 직접 닥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법. 우리 가족도 비행기에 올라 안전 벨트를 하고 난 다음에야 생활 근거지가 바뀌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젠 이 도시에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다.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서 붕 떠오르고 난 뒤 우리가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 가족은 로스 안젤레스에 사는 형제, 친척을 만나기 위해 귀국 길에 L.A.에 들렀다가 그랜드 캐년까지 보고 가기로 했다. 아이들을 위해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관광하니(디즈니랜드는 플로리다에서 디즈니 월드를 본 것으로 갈음하기로 했다) 하루 해가 다갔다. 이튿날 한국 관광회사(새로나)에서 모집하는 2박 3일의 그랜드 캐년-라스 베가스 투어에 나섰는데 내가 차 운전을 안하니 홀가분하였지만, 정작 사우쓰 림, 메도우 포인트에서 그랜드 캐년을 구경한 시간은 단 30분, 아이맥스 영화 관람시간까지 합쳐도 1시간여에 불과했다. 사실 세상일이란 진짜(絶頂)는 순간에 끝나버리고 나머지 시간과 노력은 그 준비와 정리에 투입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랜드 캐년에 가기까지 모하비 사막과 아리조나 평원 등 연도의 풍경도 잊지 못할 장관이었다.

Olympic Blvd, LA → Barstow → Needles → Kingman → Williams → Flagstaff (Travel Lodge) → Grand Canyon South Rim → Grand Canyon Village → Williams → Kingman → Hoover Dam → Las Vegas (Excaliber Casino Hotel) → Calico → Barstow → LA

에필로그 1991

염려해주신 덕택에 LA와 그랜드 캐년 관광을 마치고 25일 저녁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짐이 다소 많았지만 통관에도 전혀 어려움이 없었고 마중 나오신 부모님과 가족 친지들 차에 분승하여 전에 살던 아파트에 들어갔습니다.

모든 것이 3년 전하고 크게 달라진 게 없는데 뉴욕에서 보낸 기간(入國신고를 하며 날짜 계산을 해보니 정확히 千 하루였습니다)이 마치 립 반 윙클처럼 캐츠킬山 속에서 지내다 온 것만 같습니다. 북적거리는 서울에서 살다보면 미국 시절이 많이 그리워지겠지요. 그러나 이곳이 모든 면에서 익숙하고 편안합니다.
뉴욕에 있는 동안 저희 가족에 베풀어주신 후의(厚誼)에 깊이 감사드리오며 뉴욕에서 계속 건승(健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991.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