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구활동

학자로서 평생 연구할 일관된 주제를 갖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대부분의 학자가 박사학위를 받은 주제를 갖고 계속 씨름하게 마련이지만, 시대·사회의 수요에 맞춰 엉뚱하게 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자신의 관심분야를 즐겁게 연구하면서 때에 따라 발표도 하고 연구비지원까지 받을 수 있다면 맹자가 말씀하신 군자의 3락에 "때로 궁리하면서 세상의 인정도 받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를 덧붙일 만하다.

필자의 경우 금융기관에서 근무하다가 관심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4년 전에 대학교수가 되었으니 요즘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인생의 제2막'을 성공적으로 시작한 셈이다. 그러나 그 발단은 아주 우연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 1996년 은행의 사료(史料)전시회를 기획하면서 평양에 은행지점을 세운다는 컨셉을 잡았는데 도대체 북한 기업이나 주민을 상대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은행원들이 익숙한 담보대출을 북한 지역에서는 전혀 취급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생산수단이 국유화되어 있고 경제가 개방되더라도 저당권설정은 토지이용권이나 건물 등에 국한되어 담보가치가 보잘 것 없는 실정이다. 하물며 쇠고기를 '진단서고기'라고 부르는 북한(생산수단에 속하는 소(牛)는 수의사가 더 이상 일을 시킬 수 없다는 진단서가 있어야 도축할 수 있음)에서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마침 미국 SMU 로스쿨에서 공부할 때 지도교수가 시장경제체제로 갓 전환한 폴란드에서 미국의 담보법(UCC Article 9)을 전수하는 일을 하였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바로 그거다!"

당시 동구의 체제전환국들(transition economies)이 외자유치를 위해 담보법의 정비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미국 교수의 설명을 상기하였다. 통일시대에 북한 실정에 맞는 담보법제를 정비하는 일이야말로 누구든지 당장 착수해야 할 일이라 여겨졌다. 때마침 우리나라가 IMF 위기를 겪을 때 IMF, IBRD 등 국제금융기구는 우리나라에 구조조정을 하라며 돈을 빌려주고, 미국계 컨설팅회사는 개선방안을 제시합네 하면서 막대한 정보와 용역료를 챙겨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만일 북한 지역에 미국이나 중국의 담보제도가 시행된다면…? 오늘날 담보제도는 단순히 법률제도에 그치지 않고 담보권의 공시를 위한 전산시스템과 이를 운용하고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인력의 양성이 그 못지 않게 중요하므로 엄청난 이권과 잠재시장이 내포되어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남북통일이 되었을 때 남과 북의 담보법제가 서로 다르면 막대한 사회적·경제적 코스트를 수반하게 된다.

학자로서의 프리미엄

은행에 재직하면서 기업의 동산, 매출채권을 담보로 활용하고자 하는 국제거래법 동향을 학계에 소개하는 일에 주력하였으나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법학자들은 담보법을 민법교수 소관이라 하고, 민법학자들은 담보법을 재미없고 복잡한 분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심분야를 살려 박사학위 논문을 썼고 운 좋게도 곧바로 대학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때에는 교수의 연봉이 은행에 있을 때의 절반도 못된다는 걱정만 하였는데, 순진하게도 서울에 있는 대학교 그것도 사학의 명문에서 전임교수를 한다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인 것을 미쳐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대학교수가 되었고 매년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마다 처음의 관심사와 이리저리 연결하게 되었다. 예컨대 개인정보보호나 인터넷법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기업의 재고자산이나 매출채권, 지적재산권을 담보로 취득하자면 변동이 심한 내역을 온라인 상으로 전자공시하는 일이 불가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북한 담보제도 정비방안 체제전환국의 담보제도는 부동산 이외의 동산, 특히 기업의 재고자산과 매출채권, 지적재산권을 담보로 취득하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공장의 기계·기구는 담보로서의 실효성이 떨어지는 양도담보나 공장저당권의 부대목록으로 담보 취득하는 것이 통례였다. 새로운 담보제도란 기계·기구, 재고자산은 물론 증감·변동이 심하고 단기에 생성·소멸하는 매출채권까지 전자방식의 등기를 통해 공시할 수 있게 함으로써 담보로 활용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이미 자산유동화(ABS)에서는 매출채권, 재고자산도 금융감독위원회에 등록함으로써 자금조달에 활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북한에 이러한 담보제도의 시행을 제안하기에 앞서 우리나라에서 먼저 실시한다면 기업의 담보제공능력이 현저히 향상되어 기업 특히 중소기업들의 자금조달능력이 크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기업금융, 담보제도, 인터넷법학 등 오지랖 넓게 펼쳐놓은 관심사와 경희대 교수라는 프리미엄 덕분에 해마다 이런저런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앞으로 필자의 연구성과가 개성공단 같은 곳에서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되어 장차 통일시대에 필자의 제안이 북한지역에서 채택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리하여 경희대에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담보법 연구센터'를 이룩할 수 있다면 어찌 학자의 보람이라 아니할 수 있을까!
[경희대 "대학주보" 2004.3.15 9면]